가을방학 - 가끔 미치도록 네가 안고 싶어질 때가 있어 [온스테이지]
( www.youtube.com/watch?v=fQ4DG0SBH-0 )
(2020.10.09.)
[ Alasdair MacIntyre (2007), After Virtue: A Study in Moral Theory, Third Edition (University of Notre Dame Press), pp. 62-78.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 「제6장. 계몽주의 기획 실패의 몇 가지 필연적 결과들」, 『덕의 상실』, 이진우 옮김 (문예출판사, 2021) ]
계몽주의가 도덕을 정당화하는 것을 실패한 후, 도덕을 정당화하기 위해 새로운 목적론을 만들거나 새로운 범주적 지위를 발견해야 했음.
하나는 벤담의 공리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칸트의 실천이성
벤담은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피하려는 심리학적인 내용을 바탕으로 쾌락을 추구하는 것은 선이며, 그렇지 못한 것은 악이기 때문에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추구해야 한다고 함.
이에 대해 밀은 쾌락을 양적인 개념에서 질적인 개념으로 바꾸어 목적론적인 개념을 보완하려고 함.
그러나 쾌락과 행복의 형태는 다양함.
이는 어떠한 분명한 내용이 있지 않다는 것을 증명함.
그래서 시즈윅은 ‘직관’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공리주의가 목적론을 새로 만드는 데 실패했음을 인정함.
영국에서 공리주의에서 직관주의를 거쳐 정의주의로 넘어가는 동안, 미국에서는 정의주의의 밑바탕을 실용주의가 제공함.
실용주의에서는 유용성(성공 가능성)을 강조함.
성공적인 결과를 현실에 산출할 수 있을 때 그 이론은 참.
그러나 이는 시대와 상황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보편 타당한 것이 아님.
칸트의 기획을 부활시킨 것은 분석철학자들
지워스의 권리 개념의 경우, 어떠한 권리를 얻기 위해서는 합리적 행위자가 그 권리를 얻기를 원해야 한다고 함.
그러나 권리 주장과 권리 소유는 일치하지 않음.
권리 주장은 제도를 전제로 하는 반면, 권리 소유는 그렇지 않기 때문
그래서 이 논증도 잘못되었음.
이러한 실패는 도덕적 표현의 의미와 사용의 모순을 불러옴.
자율은 자유를 전제함.
그러나 항상 타인과의 조직적 관계에서 벗어날 수 없음.
이러한 불일치는 권리, 저항, 폭로의 형태로 나타남.
권리는 18세기의 자연권이며, 침해되면 안 되는 권리를 뜻함.
그러나 이를 증명할 방법은 없음.
로널드 드워킨은 권리가 증명되지 않는다고 해서 진리가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고 말함.
그러나 이러한 논리는 허구적인 것을 설명하는 논리가 될 수도 있는 허구
권리는 전통적 도덕을 대체할 사회적 발명품이었음.
그러나 이 논증의 거짓된 합리성은 의지와 권력의 자의성을 은폐할 뿐
저항은 유용성으로 권리를 침해할 때 나타나는 반작용
불가공약적인 사실 때문에 저항자들은 어떤 논증에서도 이길 수 없음.
이는 합리적 수단으로는 아무런 효과를 거둘 수 없다는 것을 말함.
현대의 도덕적 위장을 보존한 자의적 의지와 욕망이 인식되지 않은 동기들의 폭로가 나타남.
(니체 같은 경우는 도덕이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힘을 향한 권력의지의 발현이라고 함).
프로이트는 초자아를 통해 문명과 자연적 본능에서 문명을 선택할 수밖에 없음을 설명했음.
효율성은 생활 방식을 정의하는 하나의 규정적 요소가 되는데, 이는 경영자의 권위와 권력을 정당화함.
정당화된 권위에 대해 경영자들이 권리를 주장하는 근거는 두 가지
근거(1): 도덕적 중립성
근거(2): 일반화의 적용
이는 과학은 객관적 영역에서 이루어지며(경영과학), 관찰자와 대상은 서로 분리되어 있음을 뜻함.
이는 사실에 대한 변화된 관념과 관련됨.
(2021.07.03.)
아르바이트 하면서 난감한 경우 중 하나는 고객이 무엇을 요구하는지 알 수 없을 때다. 고객이 대략적인 얼개를 주고 나보고 알아서 하라고 하면 받은 돈에 비례하여 양심껏 일을 하겠는데, 고객이 자기가 무엇을 원하는지도 몰라서 나에게 무엇을 요구해야 할지도 모르면 난감하다. 받은 돈에 비해 일을 적게 해도 찜찜하다. 아마도 내 마음 속에는 저 하늘의 별처럼 빛나는 상도덕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여간, 이번에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 학교에서 나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 파악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총 3주차 수업 중 2주차에서야 학교의 요구사항을 제대로 파악한 것이다.
학교에서는 학생들이 책 한 권을 읽고 토론한 것에 대한 기록을 남기기를 원한다. 어떤 방식으로 기록을 남겨야 하느냐고 물으니 담당 교사는 내가 편한 방식대로 하면 된다고 한다. 아마도 담당 교사는 내가 학생들 토론시키는 것을 보고 그것을 자기 수업에 참고하려고 했던 것 같다.
담당 교사는 이렇게 말했다. “철학과에서는 토론 수업을 많이 한다던데 선생님은 철학과니까 토론 수업에 대해 잘 아실 거고…….” 나는 철학과에서 토론 수업을 많이 하는 건 맞지만 토론 수업이 정상적으로 운영되는 학교는 몇 개 없다고 답했다. 다른 과 학생을 만나서 철학과에서는 토론 많이 한다고 자랑하는 학부생들이 있는데, 학생들이 그 정도로 아는 것도 없고 분별 능력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담당 교사는 내가 진행하는 토론 수업에 관심을 보였다.
1주차 수업 때도 담당 교사는 내가 소개하는 토론 기법에 대해 관심을 보였다. 당시 나는 학교 측의 요구사항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토론 수업에 대한 논문에서 적당히 내용을 추출해서 수업을 진행했다. 수업에서 나는 대학에서 하는 토론 수업도 이 모양이니까 고등학교에서 하는 토론 수업이 이상하더라도 이상한 제도를 만든 놈을 욕하고 그냥 현실을 받아들이라고 했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게 담당 교사가 내가 소개한 토론 기법에 관심을 보인 것이다. 토론 수업 관련해서 서울시 교육청에서 연수를 받는 중인데 아직 잘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결국 나는 서울시 교육청에서 준 독서활동지를 활용하여 마지막 주 수업 때 토론 수업을 진행하기로 했다. 독서활동지에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질문이 있다.
Q1. 글과 관련하여 질문하기
(1) 사실을 확인하는 질문
(2) 내용을 분석하는 질문
Q2. 나의 관점에서 질문하기
(3) 내용을 평가・논평하는 질문
(4) 삶에 적용하는 질문
삶에 적용하는 질문? 담당 교사에게 물어보았다. “(4)는 선생님이 넣으신 건가요?” 담당 교사는 서울시 교육청에서 준 서식을 가공하지 않고 그대로 보여준 것이라고 했다. 서울시 교육청에서 학생들이나 일반고의 현실을 감안해서 그렇게 만든 것인지, 아니면 담당자가 생각이 없어서 그렇게 만든 것인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도대체 어떤 책을 읽어야 삶에 적용할 수 있나? 『고변호사의 주식강의』이나 『숀리 다이어트』? 물론, 고전에도 삶에 적용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가령, 셰익스피어의 『리어 왕』을 읽으면 자식에게 섣불리 재산을 증여를 함부로 했다가는 노년에 비참해질 수 있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그런데 플라톤의 『국가』를 읽고 삶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은?
서울시 교육청의 담당자가 현실을 감안해서 독서토론지를 그렇게 만들었다고 해도 문제는 남는다. 이런 식으로 독서지도를 하는 것은 학생들에게 도움이 안 된다. 학생들은 읽은 척 하고 교사들은 속아주는 척 할 것이다. 학생도 시간 낭비, 교사도 시간 낭비다. 왜 교육청에서는 교사들한테 쓸데없는 것을 시켜서 그들의 역량을 소모하는가?
독서 토론 같은 거 시켜봐야 독서도 못하고 토론도 못한다. 차라리 실효성 없는 독서 토론 같은 것을 시키지 말고 책에서 일부를 발췌해서 자료 해석을 하고 추론을 하도록 하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다. 발췌된 글에서 어떤 부분이 무엇을 함축하는지, 이 부분과 저 부분이 어떻게 연관되는지 등을 분석하는 것을 학생들에게 가르쳐줄 수도 있을 것이고, 발췌한 글과 연관성 있는 다른 책을 발췌해서 분석하는 것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렇게 하면 책을 일부분만 읽을 것이다. 그런데 어차피 책 안 읽고 읽은 척 하는 것보다는 일부라도 제대로 읽고 분석하게 하는 것이 낫지 않은가?
교사 한 명이 기존의 일을 하면서 새로 교재를 만드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한국에는 중등교사가 25만 명이나 있다. 이들의 교사들의 노동력을 적절하게 활용하기만 하면 웬만한 사교육 업체는 다 이겨먹을 수 있다. 교사는 충분히 많이 때문에 책 한 권을 가지고도 충분히 다층적인 분석을 하는 자료를 만들 수 있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로 독서 지도 자료를 만든다고 해보자. 어떤 교사는 20세기 전체주의와 관련해서 자료를 만들고, 어떤 교사는 포드주의와 관련해서 자료를 만들고, 어떤 교사는 인디언 보호구역과 관련해서 자료를 만들고, 어떤 교사는 플라톤 『국가』와 관련해서 자료를 만들고 하는 식으로 한다고 해보자. 국어 교사 열 명만 잘 동원해도 교재 한 권은 나온다. 그런데 교사는 25만 명이나 된다. 학교 일이 많으면 교육대학원을 다니는 교사를 쥐어짜도 된다. 방법은 충분히 많다. 이렇게 만든 자료를 인터넷에 공개하고 각 학교에서 쓰든지, 학생이나 학부모가 쓰는지 알아서 하라고 하자. 시원치 않은 학원들은 망할 것이고, 살아남은 학원들은 수준이 높아질 것이다. 교사의 노동력을 활용해서 학생들의 학업 성취를 높일 수 있는 방법이 충분히 많아 보이는데, 왜 교사의 노동력을 소진하는지 모르겠다.
요즈음 담당 교사는 학생들 자기소개서를 봐주느라 바쁘다고 한다. 나는 고등학생들이 대학 가는 데 자기소개서 같은 것이 왜 필요한지 아직도 이해하지 못한다. 크립키나 파인만 같은 고등학생들이나 소개할 것이 있지 평범한 고등학생들이 소개할 것이 뭐가 있다고 그런 것을 쓰게 만드는가? 그런 소모적인 업무만 줄여도 공교육의 질이 높아질 것이다.
(2020.10.15.)
어린 아이들이 새로운 단어를 알게 되면 일단은 아무 데나 적용해본다. 가령, 아이들이 ‘똥꼬’라는 말을 배우면 엉덩이 비슷하게 생긴 아무 곳에나 똥꼬라고 하고, 이상하게 생긴 것에도 똥꼬라고 하고, 이상한 냄새가 나는 것도 똥꼬라고 한다. 그러면 어른들이 교정해준다. 이건 똥꼬가 맞고 저건 똥꼬가 아니다, 저 아저씨 얼굴이 똥꼬라고 하면 안 되고 아저씨가 못 생겼다고 해야 한다 등등.
어른들도 비슷하다. 새로운 단어를 알게 되면 일단은 아무 데나 적용해본다. 누군가 어디서 ‘폭력’이라는 말을 배웠다고 하자. 정확히 말하자면, 그런 단어가 있다는 것을 배운 것이 아니라 그 단어의 새로운 용법을 배우게 된 것이다. 그러면 마치 말 처음 배운 아이들처럼 아무데나 폭력이라는 말을 쓴다. 더워도 폭력, 추워도 폭력, 똥꼬가 가려워도 폭력, 약간만 기분 나쁘면 다 폭력이라고 한다. 그런데 아이들과 어른들의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아이들은 말을 잘 못 쓰면 누군가가 교정해주는데 어른들은 말을 잘못 써도 아무도 교정해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렇게 내가 조금만 불편해도 폭력이고 남이 조금만 기분 나빠도 폭력이면, 사람들이 하는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까지도 크든 작든 다 폭력이다. 그렇게 세상이 폭력으로 가득 차 있고 세상에 폭력이 아닌 것이 없으면, 도대체 폭력이라는 말을 왜 쓰는가? 어차피 사람이 하는 행위가 다 폭력이라면 그냥 행위라고만 해도 되는 것 아닌가? 그래서 아무데나 폭력이라고 딱지를 붙이는 사람들은, 남들보다 섬세한 감각으로 미시적인 폭력을 포착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폭력인지도 분간하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할 수밖에 없다.
폭력으로 가득 찬 세계라고 하는 것은, 똥꼬들로 가득 찬 세계라고 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2020.10.14.)
졸업하게 해주세요. 교수되게 해주세요. 결혼하게 해주세요. * 링크: [알라딘] 흰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소설 ( 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43220344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