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5/15

[과학철학] Laudan (1982), “Commentary: Science at the Bar - Cause for Concern” 요약 정리



[ Larry Laudan (1982), “Commentary: Science at the Bar - Cause for Concern,” Science, Technology and Human Values, 7(41): 16-19. ]

■ 이 글의 동기 [p. 16]

- 1981년 미국 아칸소 주 재판은 창조과학이 과학이 아니라는 오버튼 판사의 판결로 끝남.

- 판결 자체는 바람직하지만 근거가 잘못되었거나 논증 과정이 의심스러움.

■ 판결의 핵심 [p. 16]

- 판결의 핵심은 “과학의 본질적 특징들”을 형식화한 것

• 과학과 창조론을 대조하고, 창조론은 “과학”이 아니므로 종교라고 함.

- 오버튼 판사가 제시한 과학의 특성

• (1) 자연 법칙을 따르고,

• (2) 자연 법칙에 의한 설명이 이루어져야 하며,

• (3) 경험적 세계에 대해 시험가능하고,

• (4) 그 결론이 잠정적이며,

• (5) 반증가능함.

- 라우든은 다섯 속성을 두 분류로 재분류

• 분류(1): (1), (2)는 과학의 법칙성과 설명력과 관련

• 분류(2): (3), (4), (5)는 과학적 주장의 시험가능성과 반증가능성과 관련됨.

- 분류(2)가 심각한 오류이므로 분류(2)부터 살펴볼 것임.

■ 시험가능성 [pp. 16-17]

- 창조론자들은 경험적 문제에 관한 시험가능한 주장을 함.

• 지구의 기원이 매우 최근(6천 년-2만 년 전)

• 지표면의 지질학적 특징들이 대홍수의 흔적임.

• 종의 다양성이 제한되어 있음.

• 하등 동물과 인간이 동시대에 창조되었음이 화석으로 증명될 것임.

- 창조론자의 주장은 시험가능하고 시험받아왔으며 시험에서 탈락함.

• 창조론이 경험적 주장을 하지 않는다고 단정하는 것은 창조론자들에게 경험적 증거에 대한 반박에 면역을 주는 것이 될 수 있음.

• 창조론과 제대로 싸우는 길은 창조론의 경험적 주장을 반박하는 것이지, 경험적 주장을 하지 않는 것처럼 하는 것이 아님.

- 창조론자들의 주장들 중에는 개별적으로 시험할 수 없는 것들도 있으나 이는 과학에서도 흔히 있는 일임.

• 그런 진술들도 더 큰 진술 체계에 놓이면, 그로부터 도출된 귀결이 시험될 수 있음.

■ 수정가능성 [p. 17]

- 오버튼 판사는 “탐구 과정에서 증거가 발전된 증거가 발견되어도 변화를 거부”하기 때문에 “비-과학적”이라고 했는데 이는 실수임.

- 현대의 창조론자들은 19세기의 창조론자들과 비교했을 때, 많은 차이가 있음.

• 굴드: 창조론자들은 종 변화 수준을 용인하고 변이성에 대한 관점을 수정했음.

• 창조론자들도 새로운 증거들이 나타남에 따라 그들의 생각을 수정함.

- 오버튼 판사는 창조론자들의 핵심 가정들이 어떠한 심각한 수정으로부터 닫혀있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임.

- 그러나 과학의 영역에서도 과학자들이 근본적인 믿음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거부나 협상의 가능성을 열어두지 않음.

• 예) 뉴튼은 세계에 힘이 있다는 주장에 대해 잠정적이었는가?

• 예) 양자역학 연구자들이 불확정성의 원리를 포기하거나 물리학자들이 에너지 보존을 포기할 수 있는가?

• 쿤, 파이어아벤트, 라카토슈 등 과학철학자들은 과학 연구의 핵심 믿음에 대한 일정한 정도의 독단주의가 존재해왔고 그러한 독단주의가 어떤 측면에서는 과학의 목표를 증진하는 데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주장함.

• 과학자들의 독단성과 창조론자들의 독단성에는 미묘하지만 중요한 차이가 있지만, 철저하게 개방성이 과학의 특징인 것처럼 하면 그러한 차이가 포착되지 않음.

- 창조론자들의 독단적인 태도를 들어 창조론을 비판하는 것은 이론과 이론의 지지자를 혼동하는 것임.

- 중요한 것은 창조론의 지식으로서의 위상이지 창조론자들의 마음가짐이 아님.

■ 법칙 [pp. 17-18]

- 오버튼: 과학은 자연 법칙의 문제이며 자연 법칙에 의해 설명가능함.

• 과학 법칙으로 알려진 것으로 설명될 수 없는 어떤 과정이나 사실의 존재를 가정하는 것은 부적절하며 비-과학적이라는 것임.

• 창조론자: 종의 변화에 자연 법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한계가 존재함.

• 오버튼: 이런 한계를 자연 법칙으로 설명하지 못하므로 비-과학적

• 노아의 홍수설에 대한 오버튼의 답변: “전 세계적인 홍수는 자연 법칙의 결과물이 아니며 자연 법칙에 의해 설명될 수 없다.”

- 라우든: 우리는 대홍수가 과학 법칙에 의해 설명될 수 없음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 우리가 대홍수를 익숙한 물리 법칙들로 환원하는 방법을 모른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요건은 어떤 주장이 과학적인지 구분하는 데 부적절한 기준임.

• 현상의 존재가 확립된 것과 그 현상을 법칙으로 설명하는 것은 다름.

• 어떤 존재 주장에 대하여 주장된 현상이 의존하는 법칙을 발견하기 전까지 그것을 비-과학적이라고 간주한다면, 갈릴레오, 뉴튼, 다윈의 작업도 비-과학적임.

• 이 기준에 따르면, 현대의 판 구조론도 지각 운동을 설명할 물리-화학적 법칙들을 아직 제대로 갖추지 못했으므로 비-과학적임.

• 창조론에 대한 진짜 반박은, 종의 (상대적) 불변성이 과학 법칙에 의해 설명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불변성의 증거들이 변이성의 증거들보다 덜 강건하다는 것.

■ 라우든의 우려 [p. 18-19]

- 오버튼 판사의 논증 방식은 이미 많은 과학자들이 사용해 온 전략과 같으며, 거기에는 창조론자들이 악용할 허점들이 많음.

- 시험가능성, 수정가능성, 반증가능성은 너무 약한 조건임.

• 창조론자들이 “인간과 유인원의 중간 종의 살아있는 표본을 발견한다면 내 견해를 포기하겠다”고 하면 세 가지 조건을 한꺼번에 만족시킬 수 있음.

- 창조론을 한 마디로 “비-과학적”이라 규정하기보다는 창조론자들의 주장을 하나씩 살펴보고 각 주장에 어떤 증거와 논증을 사용할지 고민해야 함.

• 진짜 문제는 현존하는 증거가 창조론보다 진화론에 더 강력한 논증을 제공하는가임.

• 창조론이 과학적 지위를 가지느냐에 대한 논쟁은 문제로부터 주의를 분산시킬 뿐.

- 아칸소 재판의 승리는 과학에 대한 잘못된 전형을 공고히 하여 얻어진 것임.

• 과학자 공동체가 이를 바로잡으려 하지 않는다면 공동체의 지적 정직성에 심각한 의문이 제기될 수도 있음.

(2024.03.29.)


2020/05/14

인문학에서 얻는 통찰



인문학을 배운다고 해서 없던 통찰력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다. 방송 같은 데서 인문학 타령, 통찰력 타령 하는 사람 치고 통찰력이 있어 보이는 사람이 드문 것만 보아도 그렇다. 그렇지만 인문학과 통찰력의 상관관계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그러한 사례들을 아무리 많이 접하더라도 미련을 못 버릴 수도 있다. 방송에 나오는 떠벌이들과 별개로, 정말로 인문학에서 통찰력을 얻은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 않은가? 어쩌면 방송에 나오는 떠벌이들도 원래는 똥멍청이였다가 인문학을 접하고 그나마 상태가 좋아진 것일 수도 있지 않은가? 그래서 인문학을 배운다고 통찰력이 생기는지와 별개로, 인문학을 배워서 생긴다는 통찰력이 무엇인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인문학 뻥쟁이들의 말을 종합해보자면, 인문학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통찰력은 “그러한 지식이 없는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보는 것”이고 “별다른 설명 없이 한 눈에 딱 알아차리는 것”을 말한다. 물론, 이것은 빙의나 신탁이나 기타 초-자연적인 힘을 얻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러한 능력을 얻는가? 뻥쟁이들은 “인문 고전이 지혜를 준다”고만 말하고 어떤 지혜를 어떻게 주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내가 보기에 그나마 가장 그럴듯한 설명은. 고전을 통해서 거기에 등장하는 일종의 모형과 사례를 학습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고대나 중세의 고전들에 모형이 명시적으로 제시된 것은 아니지만, 저자 나름대로 가진 암묵적인 모형에 맞게 사건이 각색된 것은 비교적 분명해 보인다. 사회과학이 없던 시절에는 그러한 고전들이 교과서와 비슷한 역할을 했을 것이고, 고전들을 통해 그러한 사례나 모형을 학습한 사람들은 그런 지식이 없는 사람들보다 당시의 현실 문제를 더 잘 해결할 수 있었을 것이다. 고전을 읽은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고전을 읽은 사람들이 발휘하는 판단력이 신비롭게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이는 아는 사람에게 과학인 것이 모르는 사람에게 마법으로 보이는 것과 비슷할 것이다.

그런데 고전에서 지혜를 얻어서 오늘날 현실 문제에 써먹으려면 몇 단계를 거쳐야 한다. 우선, 고전에 나오는 사례가 실제 역사적인 사실과 부합하는지부터 확인해야 한다. 고전의 저자들은 역사적인 사례들을 얼마나 잘 분석했는가? 그런데 따져보면 고전의 저자들도 당대의 일이나 그 이전에 일어난 일에 대해 오늘날 우리보다 잘 알지 못한 경우도 있었고, 자기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사실을 일부러 왜곡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일단은 이것을 검증하거나 알아볼 능력이 있어야 한다.

그 다음에 따져보아야 할 것은 고전의 저자가 암묵적으로 전제한 모형이 맞느냐는 것이다. 그 모형의 설명력이나 예측력은 믿을 만한가? 당시로서는 자료도 부족하고, 이론도 없고, 모형도 없고, 분석 방법도 마땅치 않았다. 옛날 동아시아 사람들이 허구헌날 덕 타령이나 한 것도 이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라가 잘 되어도 덕 타령, 망하면 덕 타령, 전쟁에서 이겨도 덕 타령, 져도 덕 타령이다. 물론 당시에도 현장 기록이나 보고서 같은 것을 썼고 그 중 일부는 지금도 남아있다. 그런데 그런 것이 읽을 맛이 나겠는가? 그런 것은 연구자나 읽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사람들이 주로 읽는 옛날 책도 덕 타령이나 하는 책이고, 고전에서 얻은 지혜랍시고 “초심”이니 “애민”이니 하는 소리나 하는 것이다.

고전의 저자들이 제시한 모형이 맞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 모형을 어떻게 응용해야 할 것인가는 또 다른 문제다. 그렇게 추출한 모형이 맞더라도, 내가 분석하고자 하는 현실 문제에 부합하는지도 알아보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것이 쉽다면 사회과학대학에서 석사 학위 받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 않을 것이다.

정리하자면, 고전에서 지혜를 얻어서 오늘날에 써먹기 위해서는 (과거 사례)-(모형)-(현재 사례), 이렇게 세 가지를 모두 다 잘 알아야 한다. 셋 다 쉬운 일이 아니다.

인문학에서 얻는 통찰이 이러한 성격의 것이라면, 인문학적 통찰력에 미련이 남은 사람이라도 이렇게 물을 것이다. “아니, 그러면 인문고전에 대해서는 인문학자에게 묻고 한국 사회의 문제는 사회과학자에게 물으면 되지, 왜 오늘날의 사회 문제를 인문학자에게 묻는 겁니까?” 그러게나 말이다.

인문학에서 통찰력을 얻는다는 잘못된 생각에 근거하여, <인문학에서 통찰력을 얻는다> → <인문학자에게 통찰력이 있다> → <인문학자에게 사회 문제를 묻자>는 망상으로 이어진다. 그렇게 방송에서는, 심지어 시사프로그램에서도 인문학자를 불러서 현실 문제를 물어본다. 그런 식으로 사람을 부르면 정상적인 이야기가 나올 리가 없다. 정확히 말하면, 그런 식으로 부르는데 정상적인 판단을 하는 사람이 나올 리가 없다. 왜 철학 박사에게 남북 문제와 외교 문제를 묻는 것이며, 왜 역사학 박사에게 경제 문제를 묻는 것인가? 정치학 박사나 경제학 박사는 다 얼어 죽었나?

그런 방송에는 꼭 오프닝에 “철학자의 통찰에서 지혜를 얻는다”, “역사학자의 통찰에서 지혜를 얻는다”는 멘트는 꼭 들어간다. 방송 제작에 참여하는 PD나 작가 중 상당수는 인문대 출신들일 텐데, 이 또한 인문학을 배운다고 없던 통찰이 쥐뿔 안 생긴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사례일 것이다.

(2020.03.14.)


2020/05/13

당사자가 자기 목소리도 못 내는 공익광고



지하철 2호선을 타고 다니다 보면 공익광고 같은 것을 듣게 된다. 성우가 아기 목소리로 “우리 엄마가 힘들어요. 자리를 양보해주세요. 고맙습니다”라고 말한다. 다 큰 어른이 억지로 아기 목소리를 흉내 내는 것도 들어주기 힘든데, 광고 내용도 정말 말도 안 된다. 임산부는 입 두었다 뭘 하는지 찍소리도 못 하고 말 못 하는 태아가 찡찡거리면서 자기 엄마 힘들다고 한다. 정말 듣기 힘들다.

물론 현실 상황에서는 임산부가 임산부 좌석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 “나 임신했는데 힘드니까 꺼져라”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니까 공익광고에서 임산부의 목소리를 대신 전달해야 하는 것인데, 공익 광고에서도 당사자인 임산부는 멀쩡히 입이 있고 언어 능력이 있는데도 말 한 마디 못 하고 태어나지도 않은 태아가 찡찡거린다.

편의점 계산대에도 비슷한 문구가 붙어 있다. “편의점에서 일하는 사람도 누군가의 소중한 가족입니다.” 어디 가족 없는 사람은 어디 서러워서 살겠나.

사람들이 지하철공사에 억지로 낸 아기 목소리가 내기 싫다고 항의하면, 아마도 그 다음 광고는 할머니나 할아버지 목소리로 “우리 새아가가 임신해서 힘들답니다”고 하는 광고가 나올 것이다. 한국은 그런 곳이다.

(2020.03.13.)


한강 작가 노벨문학상 수상 예언한 알라딘 독자 구매평 성지순례

졸업하게 해주세요. 교수되게 해주세요. 결혼하게 해주세요. ​ ​ ​ ​ ​ * 링크: [알라딘] 흰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소설 ( 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43220344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