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 뉴스 도살자”를 자처하는 ‘헬마우스’가 가짜 뉴스에 대응하는 방식은 “원점 타격”이다. 가짜 뉴스가 쏟아지는 상황에서 사안별로 가짜 뉴스를 다루어서는 효과적인 대처가 어려우므로 가짜 뉴스 생산자를 저격하는 방식으로 원점 타격한다는 것이다. 헬마우스의 최종 목표는 <신의한수>다. <신의한수>는 유튜브 구독자가 100만 명이 넘고 세트장이 거의 종편 수준이다. 가짜 뉴스 세계에서 타노스급이라고 한다. 헬마우스의 전략은 약한 사람부터 한 사람씩 밟는 것이다. 그러면 누가 제일 약한가. 헬마우스가 선택한 사람은 윤서인이다.
헬마우스가 윤서인을 한참 밟고 있을 때 성제준이 헬마우스를 선제공격을 했다.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는 양립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윤서인의 입장을 지지하며 헬마우스를 반박한 것이다. 그렇게 헬마우스와 성제준은 지금까지 두 번씩 주고받았다. 각 영상의 제목은 다음과 같다.
- 영상(1): 성제준 - “헬마우스”는 반박해보세요
- 영상(2): 헬마우스 - 성제준씨나 반박해보시죠(못하겠지만)
- 영상(3): 성제준 - 패배를 인정합니돠
- 영상(4): 헬마우스 - [AS]성제준 원장님, 알고 보니 개그맛집이었자너?!
영상(1)에서 성제준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1) 사회주의는 신좌파적인 사회주의와 맑시즘적인 사회주의가 있다. 조국이 추구하는 사회주의는 맑시즘적인 사회주의다. 윤서인이 말한 사회주의는 맑시즘적인 사회주의인데 헬마우스는 신좌파적인 사회주의를 가져와서 윤서인이 틀렸다고 한다.
(2) 헬마우스가 말하는 자유주의는 빈약하다. 앙시앙레짐에서 벗어나려고 한 프랑스 대혁명이 추구하는 자유주의에 한정한다. 헬마우스는 로크, 몽테스키외, 칸트로 이어지는 자유주의도 있다는 점을 간과했다.
(3) 칸트 식 자유주의는 법적인 절차를 통해서만 개인의 자유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고 이것이 정언명령에 입각한 기본적인 자유주의다. 이것이 대한민국이 추구하는 자유민주주의의 기초다.
(4) 칸트는 현대식 자본주의를 지지한다. 바디우와 들뢰즈도 마찬가지다.
영상(2)에서 헬마우스는 다음과 같이 반박한다.
(1) 바디우가 현대식 자본주의를 지지한다고? 위키피디아를 찾아봐도 바디우가 빨갱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2) 로크・몽테스키외・칸트가 살았던 시대가 앙시앙레짐 시대다. 성제준은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 줄도 모른다. 자유주의로 혁명주의를 비판하려면 토크빌을 인용해라.
(3) 칸트가 말하는 법은 인간의 이성이 발견한 도덕법칙에서 연결된 것이다. 칸트는 검사 출신 자유한국당 국회의원이 아니다. 그냥 윤리 교과서에서 칸트 부분을 읽어라.
(4) 조국이 사노맹이었던 게 30년 전이다. 사노맹이 해병이냐? 한 번 사노맹은 영원한 사노맹이냐? 그러면 박정희, 김문수는 어떻게 된 거냐?
영상(2)가 올라오자 24시간도 안 되어 성제준의 영상(3)이 올라온다. 급했던 모양이다. 성제준은 “서울대학교 철학과 김상환 교수님이 탈고한 소논문”과 칸트의 『영구평화론』을 인용하며 칸트・들뢰즈・바디우가 현대식 자본주의를 옹호했다고 주장한다. 헬마우스는 영상(4)에서 다음과 같이 반박한다.
(1) 칸트의 『영구평화론』이 그런 책 아니다. 김상환 교수가 해석한 칸트 말고 칸트가 현대식 자본주의를 옹호했다는 구절을 가져와라.
(2) 바디우가 “자본의 높이에서 사유해야 한다”고 말한 것은 자본주의를 극복하자는 것이다. 마르크스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는데 바디우도 맑시스트라서 그런 말을 한 것이다.
나는 영상(4)를 보고 뭔가 찜찜해서 영상(3)을 다시 보았다. 영상(3)에 구린 게 더 있는 것 같은데 헬마우스가 잡아내지 못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성제준은 영상 전반부에서는 서울대학교 철학과 김상환 교수님이 탈고한 소논문이 있다면서 출처 표기를 하지 않고 슥 넘어가는데, 영상 후반부에서는 『영구평화론』의 판본과 쪽수까지 언급하며 인용한다. 왜 그랬을까? 영상을 급하게 만드느라 그런 것인가? 아니다. 『영구평화론』을 인용할 때는 책을 들어서 카메라로 보여주기까지 한다. 즉흥적으로 책을 꺼낸 것이 아니라 영상 촬영 전에 해당 자료를 미리 준비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소논문 이야기 할 때는 왜 아무 것도 보여주지 않았는가? 소논문을 PDF 파일 형태로 가지고 있었다면 화면을 캡처해서 보여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러지도 않았다. 성제준은 외신 기사라도 인용하면 화면에 영문 기사를 띄우고, 한국어 번역만 읽어도 될 것을 굳이 한 줄 한 줄 영어로 읽으면서 설명한다. 그런데 “좋아하는 김상환 교수님”의 소논문이라면서 인쇄본이든 PDF 파일이든 영상에 공개하지 않는다. 뭔가 구린 게 있다는 것이다.
성제준은 소논문에서 세 부분을 인용한다. 헬마우스는 그 중 한 부분의 출처를 찾고는 나머지는 성제준이 김상환 선생님의 글을 여러 곳에서 짜깁기한 것으로 추정한다. 나도 세 부분의 출처를 구글에서 검색해보았다. 한 부분은 <교수신문>의 기사였고 다른 두 부분은 검색되지 않았다. 두 부분은 어디에 있을까. 힌트는 “소논문”이라는 말에 있다. 대부분의 논문은 구글로 검색할 수 있다. 학회 발표문도 대부분은 구글로 찾을 수 있다. 그런데 논문도 아니고 발표문도 아니고 기고문도 아니고 소논문이라니. 소논문을 읽었다고 말하면 논문 비슷한 것을 읽은 것처럼 남들에게 과시할 수 있으면서 해당 문서의 출처를 밝히지 않을 수 있다.
논문도 아니고, 발표문도 아니고, 책도 아니고, 비-전공자가 쉽게 접근할 수 있고, 그러면서도 인터넷으로 검색되지도 않는 김상환 선생님의 글은 어디에 있을까. 딱 하나가 떠올랐다. <네이버 열린 연단>이다. <네이버 열린 연단>의 강의록은 해당 사이트에서만 볼 수 있고 네이버나 구글에서 검색되지 않는다. 김상환 선생님은 <네이버 열린 연단>에서 두 번 강연했다. 그 중 성제준이 인용한 것은 <개론 6. 오늘의 사상의 흐름 - 현대 철학사를 보는 몇 가지 관점>의 강의록이다. 영상(3)에서 성제준이 인용한 부분은 다음과 같다.
“이런 요구에 부응해 각별한 시선을 끈 철학자로는 들뢰즈와 바디우가 있다. 이들은 적어도 두 가지 이유에서 헤겔-하이데거의 세계사 도식을 대체할 후보로 평가될 수 있다. 하나는 현실의 역사적 변화를 주도하는 세계화의 물결에 대처할 철학적 시선을 제시한다는 점이다. 1960년대 프랑스 철학자들이 첨단의 인간과학의 높이에서 사유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면, 이들은 일찍부터 자본의 높이에서 사유하기를 요구했다.”(강의록 14)
“그렇다면 자본의 높이에서 내다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들뢰즈를 중심으로 이야기하자면, 그는 자본을 두 가지 상반된 관점에서 바라본다. 한편으로 철학이 극복할 궁극의 대상으로, 다른 한편으로 철학이 성립하기 위해 전제해야 할 중요한 조건으로 본다. 왜 조건인가? 그것은 자본과 개념의 유사성 때문이다. 자본은 자기 품에 들어온 모든 것을 탈코드화하거나 탈영토화한다.”(강의록 15)
“칸트적인 보편주의 윤리학(최소주의/형식주의)은 세계화를 떠받치는 화폐-기술의 보편성, 그리고 이것에 기초한 정치경제학적 이념(자본주의와 민주주의)과 가장 잘 맞아떨어지는 이론으로 평가할 수 있다.”(강의록 39)
그렇다면 성제준은 김상환 선생님의 강의록을 멀쩡하게 인용했는가? 나는 칸트도 잘 모르고, 들뢰즈도 모르고, 바디우도 모른다. 사실, 들뢰즈나 바디우가 좌파든 우파든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인가? 칸트가 현대식 자본주의를 옹호했든 말든 내가 칸트처럼 미혼으로 죽을지 모르는데 그게 뭐가 중요한가? 그런데 강의록 39에 이런 말이 있다.
“바디우는 자신의 『윤리학』에서 오늘날 윤리적 담론의 지형을 조직하는 두 가지 구심점으로 보편화의 축과 차이화의 축을 들었고, 거시적인 관점에서 보편화의 축은 칸트로, 차이화의 레비나스로 수렴된다고 보았다. 그리고 두 종류의 윤리학을 모두 상황과 분리된 윤리학으로 간주했다. [...] 현상 유지를 옹호하는 보수적 이념으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성제준에 따르면, 칸트・들뢰즈・바디우는 현대식 자본주의를 옹호한다는데, 바디우는 칸트의 윤리학이 “현상 유지를 옹호하는 보수적 이념으로 전락했다”고 비판한다. 게다가, 강의록에 나오는 칸트 관련 논의는 대부분 윤리학에 관한 것이고 시장경제나 자본주의 같은 내용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성제준은 앞뒤 맥락에 대한 아무런 언급 없이 칸트의 이론이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과 가장 잘 맞아떨어진다는 문장 하나만 인용하고는 곧바로 『영구평화론』을 인용한다. “김상환 교수의 소논문”을 인용할 때는 출처를 밝히지 않던 성제준은 『영구평화론』을 인용할 때는 출판사와 쪽수까지 언급한다. 두 자료를 인용할 때 왜 이렇게 태도가 급변하는가? 아마도 쫄렸기 때문일 것이다. 성제준은 <네이버 열린 연단>의 강의록이 검색되지 않음을 알고 이를 악용한 것으로 보인다.
내가 해당 분야 전공자도 아니고 사실상 그 쪽에 아는 게 거의 없는데도 성제준이 어디에서 인용했는지 찾는 데 30분 정도 걸렸다. 프랑스 철학에 조예가 있거나 관심이 있거나 관련 전공자라면 나보다 빨리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성제준은 분명히 “강의록”이라고 써있는 것을 가져와서 “김상환 교수님이 탈고한 소논문”이라고 속이고는 앞뒤 맥락 없이 강의록을 인용하며 자기가 “나름대로 철학 공부를 많이 했다”고 주장한다.
책을 읽고 오독할 수도 있다. 나는 안 그런가? 맨날 말귀 못 알아먹고, 글 못 읽고, 읽어도 엉뚱하게 읽는다. 성제준의 진짜 문제는, 말귀를 못 알아먹는 것도 아니고 헛소리를 하는 것도 아니고 쥐뿔도 모르면서 눈 똑바로 뜨고 아는 척 하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의 지적 정직성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가짜 뉴스 원점 타격의 목표물이 되었을 것이다.
* 참고: [네이버 열린 연단] 오늘의 사상의 흐름 - 현대 철학사를 보는 몇 가지 관점 / 김상환 교수
( https://openlectures.naver.com/contents?contentsId=79126&rid=2887 )
(2019.1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