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과정을 거쳐 그런 야심 차고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STS 연구자들 중 이공계 대학원생이 당하는 착취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는 비판은, 사회학자들이 사회운동 안 한다는 비판이나 정치학자들이 정치 안 한다는 비판이나 다를 바 없으니 그냥 넘어가자. “현재 과학철학/과학사회학의 담론은 2차 대전 종전 이전의 내용 같은 과거의 과학만 다룬다”는 비판은 사실인가? 과학사나 과학기술학 연구의 양과 종류만 놓고 봐도, 최근 30년 동안에 관한 연구가 2차 대전 이전 시기에 관한 연구보다 압도적으로 많다. 굳이 RISS에 들어가서 논문을 검색하지 않더라도, 교보문고 사이트에 들어가서 한국어로 된 교재만 검색해도 알 수 있다. 저자명으로 검색하고 싶으면 “홍성욱”이라고 치면 된다. 과학철학이나 STS 학부 수업계획서를 찾아보아도 된다. 경험적 과학철학/STS를 하겠다는 사람은, 과학철학이나 STS 수업도 들은 적이 없고, 주변에도 그런 수업을 들어본 사람도 없고, 영어로 된 교재는 물론이고 한국어로 된 교재도 읽은 적이 없으며, 논문도 안 찾아본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도 그렇게 야심 찬 헛소리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혼자만의 망상으로 그런 결론에 도달한 것인가? 그러기에는 그 망상이 어떤 생물학 박사의 페이스북/블로그/트위터/칼럼에 나오는 내용과 매우 흡사하다. 아마도 게시글 작성자는 그 박사에게서 어느 정도 영향을 받은 것 같다. 과학철학이 이래서 문제니 과학사가 저래서 썩었니 하며 자신만만하게 쓴 글을 보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과학학에 대해 뭔가 아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생물학 박사는 자기 분야도 아닌 분야에 (틀려먹었지만) 서릿발 같은 지적을 해서 문외한들의 존경과 지지를 받고 있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착실히 연구하는 사람보다는 학계가 다 틀려먹었고 나만 옳다고 하는 사람이 더 매력적으로 보이는 법이다. 학계가 썩었니 폐쇄적이니 하는 떠벌이들이 언론에서 득세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언론은 그런 떠벌이들이 연구 능력이 없어서 그러는지 정말 학계가 썩고 폐쇄적인지는 검증하지 않는다. 그런 것을 검증할 생각이나 능력이 있었다면 애초에 그런 사람들에게 지면을 할애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분위기에 편승해서 황교익처럼 대학원 근처도 안 가본 사람조차도 “대학원에 갈 생각이 있었으나 학계의 폐쇄성이 싫어서 대학원에 가지 않았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매우 당당히 말하기도 한다.
학계 운운하는 야심 찬 주장들이 맞는지 틀리는지 확인하는 데는 큰 비용과 시간이 들지 않는다. 다만 어떻게 확인해야 할지 몰라서 당하는 것뿐이다. 예를 들어보자. 그 생물학 박사는 페이스북에 한국 과학기술사에서 세종대왕, 장영실, 첨성대 같은 것은 그만 연구하고 세운상가 같은 것 좀 연구하라는 게시글을 올린 적이 있다. 게시글만 보면 그 생물학 박사가 관련 학계 동향을 매우 잘 아는 것처럼 보인다. 정말 그런가? 간단하게 확인할 수 있다. <한국과학사학회지> 최근 논문 목록을 보면 된다. 한국에서 과학사학회지는 하나밖에 없으니까 금방 확인할 수 있다. 서평과 특집 기사 빼고 최근 5년 간 <한국과학사학회지>에 실린 연구논문은 다음과 같다.
제36권 제1호(2014)
[연구논문] 1735년 역서의 윤달 결정과 간행에 관한 조선 조정의 논의 / 김영식
[연구논문] 액솔로틀(Axolotl)에 대한 역사적 고찰: 변태 현상이 야기했던 생물학적·발생학적 이슈들을 중심으로 / 정혜경
[연구논문] 한국의 시험관아기 시술 30년, 거버넌스의 부재와 위험의 증가: 전문가 역할을 중심으로 / 하정옥
[연구논문] 『개원점경』에 나타난 천체에 관한 논의 / 이문규
제36권 제2호(2014)
[Research] Technical Standard in Transition: The Distribution Voltage Conversion Project in South Korea, 1967-2005 / KIM Junsoo and CHOI Hyungsub
[Research] Yukawa Institute Connecting Prewar, Wartime, and Postwar Science in Japan / Daisuke KONAGAYA
[Research] Hippocratic Legends in the Pseudepigrapha / SUNG Young-gon
제36권 제3호(2014)
[연구논문] 리처드 스트롱을 통해 살펴본 식민지 필리핀에서의 미국 열대의학의 성격 / 정세권
[연구논문]전쟁기의 과학과 평화: 한국전쟁기 미국 민간인 과학자들의 공군 작전분석 활동 / 김태우
[연구논문] 한국 온라인게임 산업의 출현: 기술의 공생 발생 / 남영
[연구논문] 고리원자력발전소 1호기의 수명은 어떻게 연장되었는가? / 박정연
[연구논문]성해응(成海應, 1760-1839)의 조석설(潮汐說) / 구만옥
[연구논문]사여(四餘)의 중국 전래와 동서 천문학의 교류 / 이은희, 한영호, 강민정
제37권 제1호(2015)
[연구논문] 대중 과학에서 은유와 유비의 역할: 가모프의 우주론 3부작을 중심으로 / 오철우
[연구논문] 미국물리협회(AIP)와 순수/응용 물리학자들의 갈등 / 박민아
[연구논문] 메이지 일본의 대조선 외교와 군사 기술, 1876-1882 / 김성근
[연구논문] 카이스트 인공위성연구센터의 위성 기술 습득과 개선 과정 고찰 / 태의경
[연구논문] 조선 후기의 역서(曆書) 간행에 참여한 관상감 중인 연구 / 박권수
[연구논문] 17세기 『재이고(災異考)』의 자연 기록과 그 의미 / 경석현
[연구논문] 1792년 관상감이 출간한 새로운 『보천가(步天歌)』의 기원 / 안상현
[기획논문] 기획 서문: 식민지와 과학, 그 형용 모순의 관계를 넘어서기 / 정준영
[기획논문] 어린 혁명가들을 위한 과학: 마르크시즘, 진화론, 프롤레타리아 아동 문학(1920-1935) / 한민주
[기획논문] 신문 상담란 “지상 병원”을 중심으로 본 1930년대 식민지 조선 대중들의 신체 인식과 의학 지식 수용 / 최은경, 이영아
[기획논문] 식민지 과학 협력을 위한 중립성의 정치: 일제강점기 조선의 향토적 식물 연구 / 이정
[기획논문] ‘공업조선(工業朝鮮)’의 환상과 ‘학문 봉공(學問奉公)’의 현실: 경성제대 이공학부의 탄생 / 정준영
[기획논문] ‘지방차(地方差)’와 ‘고립(孤立)한 멘델 집단(Mendel集團)’: 두 ‘중심부’ 과학과 나세진의 혼종적 체질 인류학, 1932-1964 / 현재환
제37권 제2호
[Research] Understanding Compressed Growth of Science and Technology in South Korea: Focusing on Public Research Institutes / MOON Manyong
[KJHS Forum] Special Issue: Calendar and Astrology in Early Qing China / KIM Yung Sik
[KJHS Forum] Revisiting the Calendar Case (1664-1669): Science, Religion, and Politics in Early Qing Beijing / Catherine JAMI
[KJHS Forum] Numerology and Calendrical Learning: The Stories of Yang Guangxian and Liu Xiangkui / CHU Pingyi
[KJHS Forum] A Distinctive Way of Integration: The Main Portion of Xue Fengzuo’s Lixue huitong Revisited / CHU Longfei
제37권 제3호(2015)
[연구논문] 제5공화국의 과학 기술 정책과 박정희 시대 유산의 변용: 기술 드라이브 정책과 기술 진흥 확대 회의를 중심으로 / 신향숙
[연구논문] ‘2007년 과학’ 대 ‘2008년 정치’?: 광우병 논쟁과 과학 자문의 정치 문화 / 하대청
[연구논문] 생태학의 지적 궤적으로 본 과학의 국제화: 린네 식물학에서 국제 생물 사업 계획에 이르기까지 / 정혜경
[연구논문] 환경 연구와 기술 규제, 의도된 긴장과 전략적 공존, 1969-1973: 미국 환경 보호청(U.S. EPA)의 설립과 연방 환경 연구 센터 활동을 중심으로 / 이종민
제38권 제1호(2016)
[연구논문] 한국 천문학사의 한국적 특질에 관한 시론: 세종 시대 역산(曆算) 연구를 중심으로
[연구논문]동아시아 의학 전통의 재해석 및 전향(前向): 이제마의 “의원론(醫源論)”을 중심으로
[연구논문] 1880년대 수집된 한역 과학 기술서의 이해: 규장각 한국학 연구원 소장본을 중심으로
[연구논문] 한국 재생 에너지 기술 개발의 초기 역사: 태양열 이용 기술을 중심으로
제38권 제2호(2016)
[Research Paper] “The Nearest Faraway Place”: South Korean Medical Outreach and Southeast Asia as Its Research Context, 1954-1973 / John P. Dimoia
[Research Paper] Governing, Financing, and Planning Cancer Virus Research: The Emergence of Organized Science at the U.S. National Cancer Institute in the 1950s and 1960s / YI Doogab
[Research Paper] What Did They Mean by “Calculation Principles”?: Revisiting Argumentative Styles in Late Ming to Mid-Qing Chinese Mathematics / Su Jim-Hong and Ying Jia-Ming
제38권 제3호(2016)
[연구논문] 애쉬비의 인공 뇌, 호메오스탓 연구: 사이버네틱스의 역사에 위치한 그의 입지에 관하여
[연구논문] 라디오의 정치: 1960년대 박정희 정부의 ‘농어촌 라디오 보내기 운동
[연구논문] 한국 과학기술 연구 체제의 형성과 발전
[연구논문] 김정은 정권 ‘새 세기 산업 혁명’ 노선의 형성 과정
[연구논문] 조선 시대 한증 요법의 운영과 변천
제39권 제1호(2017)
[연구논문] 필드 과학, 과학 서비스 그리고 해충 방제: 20세기 초 미국 남부 목화 바구미 대발생을 중심으로
[연구논문] 1990년대 한국 PC 게임 산업: PC 게임 개발자들의 도전과 응전
[연구논문] 19세기 후반 한역 근대 과학서의 수용과 이용: 지석영의『신학신설』을 중심으로
[연구논문] 정조 대 한강 배다리[舟橋]의 구조에 관한 연구
[연구논문] 『성경(星鏡)』에 기록된 항성: 『의상고성속편(儀象考成續編)』성표와의 연관성을 고려한 동정
제39권 제2호(2017)
[Research Paper] The Status of the Hwaseong seongyeok uigwe in the History of Architectural Knowledge: Documentation, Innovation, Tradition / Florian PÖLKING
[Research Paper] Making Postcolonial Connections: The Role of a Japanese Research Network in the Emergence of Human Genetics in South Korea, 1941-1968 / HYUN Jaehwan
제39권 제3호(2017)
[연구논문] 조선 초 인쇄 기관의 변화와 정착
[연구논문] 조선 후기 역(曆) 계산과 역서(曆書) 간행 작업의 목표: ‘자국력’인가? 중국 수준 역서인가?
[연구논문] 숙종 대 관상감의 시헌력 학습: 을유년(1705) 역서 사건과 그에 대한 관상감의 대응을 중심으로
[연구논문] 병자호란 시기 강화도 함락 당일 염하수로의 조석과 조류 추산
제40권 제1호(2018)
[연구논문] 함포(艦砲)의 배치를 중심으로 본 이순신 거북선의 구조 연구
[연구논문] 아랍에서 조선까지 이슬람 역법의 전래와 수용
[연구논문] 발전된 과학 공간으로의 이동을 통한 연구자 되기: 바이러스 학자 이호왕의 사례를 중심으로
[비평논문] 한국의 기술 발전에 관한 연구사적 검토와 제언
제40권 제2호(2018)
[Research Paper] Enlightenment Chemistry as an ‘Experimental Science’ / Mi Gyung KIM
제40권 제3호(2018)
[연구논문] 해방 전후 수학 지식의 보급과 탈식민지 수학자의 역할: 최윤식(崔允植)과 이임학(李林學)의 사례를 중심으로
[연구논문] 협상 테이블 위에 놓인 개발 계획서: 제2차 전원(電源) 개발 계획 수립 과정을 중심으로
[기획] 북한 사회주의 체제 형성기의 보건 의료사, 1955-1961, 서문
[기획] 붉은 보건 전사 만들기: 북한 보건 의료 부문의 사상 투쟁, 1956-1961
[기획] 북한 천리마 운동과 보건 의료 인력의 동원, 1956-1961
[기획] 사회주의적 생활 양식으로서의 위생: 1950년대 후반 북한에서의 위생 문화 사업을 통한 대중 개조
[기획] 생태계의 사회주의적 개조: 북한의 폐흡충 박멸 사업, 1955-1961
[연구노트] 『조선식물향명집』 "사정 요지"를 통해 본 식물명의 유래
구글에 검색만 해봐도 들통날 개소리가 신문 칼럼이 되고 공신력을 얻는다. 개인의 망상이 망상으로만 끝난다면 그것을 가지고 비난할 이유는 없다. 문제는 망상은 전염력이 강하고 그런 망상에 옮은 사람들이 현실 세계에서 문제를 일으킨다는 점이다. 연구 잘 하고 교육 열심히 하는 훌륭한 선생님들이 왜 한국연구재단 같은 데서 프로젝트 딸 때는 아저씨들 건배사 같은 유치한 이름이 붙은 프로젝트를 제안하겠는가? 의사결정 권한이 있는 사람이 어디서 이상한 것을 주워듣고 와서는 이상한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널리 퍼진 견해는 널리 퍼졌다는 이유만으로 공신력을 얻는다. 망상도 널리 퍼지기만 하면 공신력을 얻는다.
(2019.0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