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사에서 책을 소개하는 기사를 보면 참 한심하다. 그러한 기사를 쓰는 기자들이 책을 읽고 다른 사람들에게 소개할만한 능력이 있기나 한지 의심스럽다. 심지어 글도 못 쓴다. 책 내용을 피상적으로 언급하다가 폼이나 잡고 이상한 너스레나 떤다. 여기에는 좌/우 구분도 없고 보수/진보 구분도 없다.
마르쿠스 가브리엘의 『나는 뇌가 아니다: 칸트, 다윈, 프로이트, 신경과학을 횡단하는 21세기를 위한 정신 철학』을 소개하는 <한겨레> 기사를 보자. 나는 이 책을 읽지 않았으므로 책에 대하여 말할 수는 없겠으나, 그와 무관하게 기사가 엉터리임은 말할 수는 있다.
기사만 놓고 본다면 가브리엘의 책은 믿을 수 있는 내용이 별로 없다. 가브리엘이 정의하는 신경과학은 인식, 자아, 자유 등이 뇌가 만들어내는 환상이라고 말하는 현대의 과학과 과학철학이다. 이러한 신경과학은 인간의 뇌가 디지털화한 데이터와 알고리즘으로 완전히 치환되면 인간 이상의 존재로 영생하며 더 강력한 힘을 소유하게 된다고 믿는 ‘트랜스휴머니즘’으로 이어진다고 가브리엘은 주장한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겠지만 이는 시작에 불과하다. 신경과학의 이데올로기가 인간의 자유를 부인한다고 주장하는 가브리엘은, 신경과학이 냉소하는, 인간 존엄과 자유의 핵심인 자유의지를 옹호하기 위한 논변을 편다고 한다. 해당 기사는 해당 논변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어떤 사건이 일어나는 필요조건에는 자연법칙과 같은 ‘엄격한 원인’들이 있지만, 동시에 다양하고도 구속적이지 않은 ‘이유’들도 존재한다. 예를 들어, 레스토랑에 가서 다양한 종류의 스파게티 중에 토마토 스파게티를 고른다고 하자. 거기엔 ‘나의 신경 화학이 나를 토마토소스로 이끈다’ ‘내 안의 미생물들이 토마토소스를 선호한다’ 같은 엄격한 원인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토마토 스파게티의 가격이 적당하다’ ‘그럴 만한 돈이 있다’ 등 자연법칙이 아닌 복잡한 경제 시스템에서 결정되는 ‘이유’들도 있다. 즉, 하나의 결정에는 무수한 조건이 존재하고, 이 조건들은 하나의 이론으로 통찰할 수 없다. 형이상학만이 아닌 경제학, 윤리학 등 다양한 세계관에서 연유하는 조건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조건 중에는 강제적이지 않은 ‘이유’들이 있고, 가능성의 공간에서 인간은 자유롭다.
이게 어떻게 자유의지를 옹호하는 논변이 된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책에 어떠한 신묘한 논변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기자는 이것이 자유의지를 옹호하는 논변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책에 그럴 법한 논변이 없거나 기자가 논변을 잘못 뽑은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기사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가브리엘은 인간의 자유를 부인하는 신경과학 이데올로기는 자본의 논리와 공모하는 것이기에 더 우려스럽다고 주장한다고 한다. 기자가 그 책을 제대로 이해하고 책 내용을 소개한 것이 맞다면, 책 내용을 소개한 다음 책을 비판하는 내용이 이어져야 할 것이다. 가령, “BMW 차량의 뒤를 이은 또 하나의 독일산 불량품이 나왔다”든지 “『피로사회』의 뒤를 잇는 또 하나의 피로 서적이 나왔다”든지 등등. 그런데 기사의 서두는 이렇게 시작한다.
철학은 다시, 수세에 몰렸다. 철학이 종교의 시녀 노릇을 하던 중세를 벗어나, 모든 학문의 뿌리를 자처한 근대를 맞았지만 영광의 시기는 짧았다. 현대에 들어 질문을 일으키는 주도권은 과학으로 넘어갔고, 철학의 발언권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진화론은 인간 행동의 동기를 모두 설명할 수 있다고, 뇌과학은 인간 정신의 메커니즘을 모두 밝혀낼 것이라 공언한다. 과학은 마르크스의 저 유명한 테제를 뒤집는다. 철학은 그동안 세상을 해석하기만 해왔다. 이제 세상을 변혁하는 것은 과학이다.
철학이 또 다시 수세에 몰렸단다. 이상한 책을 충실하게 소개했거나 멀쩡한 책을 이상하게 소개한 것이 분명한데도 기자는 이렇게 개멋이나 부리고 앉아있다. 또 기사는 이렇게 끝난다.
인간 사회를 진보시키는 것은, 인간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지난하지만 도덕적・법적 질서를 향상하고 사회정치적 진보를 일궈나가는 것이다. “실재를 저주할 원리적인 이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사회적, 정치적 진보를 추진할 이유들이 수두룩하게 존재할 따름이다. 왜냐하면 현재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인간 존엄에 걸맞은 삶을 명백히 어렵게 만드는 조건들 아래에서 살기 때문이다. 인간이 인간에게 늑대인 상황은 지금도 여전하다. 이것이 우리의 진짜 문제다.”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는 글을 인용하며 기사가 끝난다. 아무리 봐도 이상하다. 신경과학 비판하는 책을 소개하면서 사회정치적 진보를 이루자고 한다. 이게 무슨 똥인가.
김영민의 『집중과 영혼』을 소개하는 <월간중앙> 기사도 만만치 않다. 이 기사는 다 읽을 필요도 없고 첫 문단만 읽어도 망한 글임을 알 수 있다.
우리 철학계에 김영민이란 독창적인 사고를 할 줄 아는 학자가 있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강단철학은 서구 철학을 소개하는 데 학문적 역량을 소진하는 다수 학자의 영역 아니었던가. 그곳에는 학문하는 자의 주체적 현실인식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깊이나 넓이에 있어서도, 예를 들어 김우창과 같은 문학 전공자가 보여주는 철학적 사유의 도저한 지평을 우리 철학계는 대중에게 보여주지 못했다.
한 문단에 단 한 문장도 맞는 말이 없다. 기자가 말하는 김영민의 독창적인 사고란 무엇을 말하는가? 서양 철학을 소개하는 작업이 학문적 역량을 “소진”하는 것에 불과한가? 기자는 한국 철학계의 연구 동향을 알기나 하는가? 기자가 말하는 학문하는 자의 주체적 현실 인식이란 무엇인가? 김우창 같은 문학 전공자가 보여준다는 철학적 사유의 지평이란 어떤 것인가? 김우창 같은 사람들이 철학적 사유를 하기는 하는 것인가? 이 모든 것이 다 의문투성이다.
비용 절감을 위해서도 외주 제작을 맡기는 것이 일반적인 추세인데, 왜 신문사들은 굳이 내부 인력에게 맡겨 똥을 생산하는지 모르겠다. 저자나 번역자에게 책 소개 기사를 맡겨도 될 것이고 인터뷰 기사로 때워도 될 것 같은데, 왜 능력도 안 되면서 굳이 뭘 소개해보겠다고 이러는가. 굳이 비평하고 싶으면 관련 분야 전문가를 섭외해도 될 텐데, 왜 능력도 안 되는 사람한테 알지도 못하는 분야의 책을 읽혀서 똥을 만들게 하는가?
* 링크(1): [한겨레] 과학에게 정신은 하나의 수수께끼다
( www.hani.co.kr/arti/culture/book/860010.html )
* 링크(2): [월간중앙] 집중 없이는 영혼도 없다
( https://jmagazine.joins.com/monthly/view/318984 )
(2018.09.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