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연구실을 쓰는 과학사 대학원생이 나에게 이 논문을 보여주었다. 연구 대상은 훈민정음인데 글은 국한문 혼용체다. 그 논문을 보여주면서 형식과 내용의 부조화를 볼 때 느끼는 미묘한 감정에 대하여 이야기하길래 나는 “이래서 내가 일본어 섞어서 쓰는 사람을 보면 야마가 돈다니까요”라고 했다.
(2018.05.17.)
같은 연구실을 쓰는 과학사 대학원생이 나에게 이 논문을 보여주었다. 연구 대상은 훈민정음인데 글은 국한문 혼용체다. 그 논문을 보여주면서 형식과 내용의 부조화를 볼 때 느끼는 미묘한 감정에 대하여 이야기하길래 나는 “이래서 내가 일본어 섞어서 쓰는 사람을 보면 야마가 돈다니까요”라고 했다.
(2018.05.17.)
[ Einar Duenger Bohn (2012), “Monism, Emergence and Plural Logic”, Erkenntnis, 76(2): 215-216. ]
본은 정크의 세계가 불가능하다는 섀퍼(Schaffer)의 의견에 반박함.
(1)
섀퍼: ‘세계’는 한 대상에 대한 단수 용어이며, 정크의 세계는 하나의 대상이 아닌 복수의 대 상들이기 때문에 정크의 세계라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본: 우리가 반드시 세계에 대해 이렇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세계’가 단수인지 복수인지는 세계가 실제로 하나의 대상인지 복수의 대상인지에 달린 문제이다.
(2)
섀퍼: 가능 세계는 구체적인 가능한 대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본: 그렇게 믿어야 할 이유가 없다. 가능세계는 가능한 구체적인 복수의 대상들로 이해될 수도 있다.
(3)
섀퍼: U는 천체물리학의 기초 탐구 대상(primary subject ratter)이다. 홀리(Hawley)와 훌침 (Holcomb)(2005: 5)은 천체물리학은 “전체로서의 우주의 형성, 구조, 진화에 대한 연구”라고 말했다.
본: 전체로서의 우주라는 많은 복수의 모든 것들이라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따라서 정크 때문에 천체물리학이 무너지지는 않을 것이다.
(4)
섀퍼: 고전 부분-전체론(classical mereology)온 U의 존재를 보장한다. 즉, 겅크의 모형은 존재하나 정크의 모형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본: 고전 부분전체론이 필연적이라고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 우리는 정크의 모형을 가지는 비-고전 부분 전체론 체계, JM을 구성할 수 있다.
(5)
섀퍼: 정크의 모형에 대해 SCQ에 대한 적절한 설명이 없다.
본: 무제약적 구성이 “어떤 xx가 융합일 때” 구성이 일어난다는 적절한 설명이라면, “어떤 x와 y가 융합일 때”라는 설명도 적절할 것이다. 무한히 많은 복수의 단순자(simple)들에 대해서도, 이 구성 원칙은 정크의 모형을 제공한다. 왜냐하면 이 원칙에 따르면 무수히 많은 단순 자들을 한 번에 융합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대신 단순자들은 점차적으로 융합되어 가면서 무한에 달하는 점점 더 큰 구성체가 된다.
(2018.09.17.)
한국 사람들 중 상당수는 자기가 교육에 관심이 많은 줄 안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 자원 배분에 관심이 있을 뿐이며, 정확히는 자기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자원이 배분되기를 바랄 뿐이다.
대학에서 수능으로 학생을 뽑을지 학생부종합전형으로 뽑을지를 두고 논쟁을 벌이는 모습을 보자. 많은 사람들이 초점을 맞추는 것은 어떤 제도를 채택해야 어느 동네 사람들이 대학을 더 잘 가느냐, 재수생이 유리하느냐 고3이 유리하느냐, 사교육비 증감을 어떻게 되느냐 하는 것밖에 없다. 평가 방식에 따라 중등교육 과정이 어떻게 바뀌고 학생들에게 어떠한 교육을 제공하게 될지 같은 것은 논의 대상에 포함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애초부터 학생들이 학교에서 무엇을 어떻게 배우는지는 관심도 없기 때문이다. 누가 좋은 대학에 가서 많은 소득과 높은 지위를 차지할 수 있느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그런 것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면 천박하다는 소리를 들으니까 소득과 사회적 지위 같은 이야기는 빼고 대학 이야기만 하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교육열이라고 부르는 것은 교육 자체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일종의 자원 배분 방식에 대한 관심에 불과하다.
그러면 한국 사회의 소득 격차를 줄이면 교육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까? 공부 능력이 있으면 대학에 가고 그런 능력이 없으면 다른 능력을 살려서 먹고 살면 되는데 이것을 가로막는 것은 소득 격차니까 소득 격차를 줄이면 똑똑하지도 않은 자식한테 사교육비를 쓸 필요도 없어질 것 아닌가. 그런데 그렇지도 않다. 소득 격차 줄이자고 하면 빨갱이다. 내 자식이 좋은 대학 갈지도 모르는데, 좋은 대학은 아니더라도 후진 대학은 안 갈 건데, 어떻게 대학교 졸업한 사람이 고등학교만 졸업한 사람과 비슷한 소득을 얻는단 말인가. 절대 그런 일은 있어서는 안 되고 용납할 수도 없는 일이다.
한국 사회에서 언급되는 공정성이라는 것은, 사람들이 퍽이나 정의로워서 그러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남보다 더 먹을 수 있는 상황에서 남 눈치 안 보고 당당하게 자랑하면서 더 먹으려고 미리 침 발라놓는 것이다. 내 말이 의심스럽다면 주변에서 대학 입시의 공정성을 주장하는 사람 중에 동일노동 동일임금 같은 데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는지 찾아보면 될 것이다.
(2018.05.14.)
졸업하게 해주세요. 교수되게 해주세요. 결혼하게 해주세요. * 링크: [알라딘] 흰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소설 ( 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43220344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