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8/08
『환단고기』를 역사서로 믿는 사장님
아는 사람한테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어떤 회사의 사장이 머리도 좋고 사업 능력도 있고 사람도 착하고 다 좋은데, 『환단고기』를 역사서로 믿어서 1년에 한 번씩 직원들을 데리고 만주로 여행을 간다고 한다. 그 분은 여행 가는 것도 좋고 다 좋은데 이상한 것을 믿는 사장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내가 그 회사 직원이었으면 사장한테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사장님, 수메르 문명도 우리 민족이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정말인가요? 아, 혹시 이집트 문명도 우리 민족이 만든 건가요?”
(2017.06.08.)
2017/08/07
통섭형 인간 토마스 쿤
지난 주 토요일에 고등학교에서 1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아르바이트를 했다. 토요일에 3시간씩 세 번 하기로 했다. 올해는 쿤의 『과학 혁명의 구조』를 소개하기로 했는데 작년보다는 반응이 안 좋았다. 일반적인 고등학생 수준에서는 과학철학보다는 플라톤 초・중기 대화편이 더 적합한 것 같다. 과학고 같은 데서 『과학 혁명의 구조』를 하면 좋을 것 같은데 그런 제안이 들어올지는 모르겠다.
『과학 혁명의 구조』를 다루기 전에 쿤의 일생을 소개했다. 나는 물리학과에 들어간 쿤이 어떻게 과학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지 대강 이렇게 이야기했다.
“코넌트 총장은 문과생들한테 자연과학을 가르치는 프로그램을 개발하기로 했어요. 문과생들도 자연과학적인 사고를 배워야 한다는 거죠. 그런데 일반물리나 일반화학 같은 것을 그냥 가르칠 수는 없잖아요. 하버드 온 애들이 일반물리를 못 배울 리는 없겠지만, 과학적 사고를 배우는 게 아니라 문제 푸는 것만 배우고 끝날 것 같단 말이에요.
그래서 코넌트 총장은 어떻게 하느냐? 과학사 위주로 과학을 가르치기로 합니다. 글 잘 쓰는 사람한테 이 일을 맡기는 것이 좋겠다 싶어서 쿤한테 맡깁니다. 쿤이 학부 때 하버드대 대학 신문사 편집장이었어요. 대학에 가면 학교마다 대학 신문이 있어요. 여러분도 대학 가면 알겠지만 대학에서 대학 신문이라고 하는 건 아무도 안 읽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글 잘 쓰는 애들은 대학 신문사에 잘 안 가는 것 같아요. 하버드대는 그렇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버드대 대학 신문은 학교뿐만 아니라 지역 사회의 여론에도 영향을 주는 매체였고, 그런 하버드대 대학 신문에서 쿤이 편집장이었다는 거지요. 쿤은 이과생인데도 그 정도로 글을 잘 썼다는 겁니다.
나도 그랬지만, 보통은 수학을 못 하는 애들이 인문대를 갑니다. 그렇게 인문대 간 애들이 글도 못 써요. 이런 사람들을 뭐라고 하는지 아세요? ‘정상인’이라고 합니다. 그게 정상이죠. 어떻게 쿤이 정상입니까? 요즈음에 통섭이니 뭐니 하는데, 아마도 쿤 같은 사람들이 전형적인 통섭형 인간일 겁니다. 문과 조금 이과 조금 배운다고 그렇게 되는 게 아니에요. ‘아, 나는 언어 영역이 4등급 나오는데 수리 영역도 4등급 나오니까 통섭형 인간이다’, 이건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방송에서 통섭형 인간이니 뭐니 하는 게 나와도 들을 필요가 없습니다. 물론 쿤 같은 사람도 있겠죠. 그런데 그런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그러면 통섭형 인간이 될 것도 아닌데, 교양을 왜 배워야 하느냐? 교양은 성과를 내려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재미로 배우는 거예요. 교양을 배워서 어디에 쓰느냐. 교양을 배워서 이야깃거리도 많아지고 대화가 풍성하고 삶의 질도 높아지고 어디 가서 아는 척도 하고 그러면 좋잖아요. 애인한테도 프로듀스 101 같은 거나 이야기하지 말고 고상하고 재미있는 이야기 하면 좋잖아요. 이것저것 많이 배우면 더 좋은 성과를 낸다? 그런 사람은 매우 적습니다. 하지만 재미있게 살려고 교양을 쌓는다면 재미있게 사는데 도움이 됩니다. 그러니까 통섭 같은 소리에 현혹되면 안 돼요.”
나는 100분 동안 일하고 20분 쉬었다가 다시 100분 동안 일하기로 되어 있었다. 쉬는 시간에는 교무실에서 쉬었다. 교무실 벽 게시판에 포스터 두 장이 붙어있었다. 한 장은 내가 하는 일을 홍보하는 것이고 그 옆에 있는 포스터는 어느 대학 교수가 강연하러 온다는 것이었다. 놀랍게도, 그 교수는 최재천 교수였고, 통섭형 인간을 주제로 강연을 한다는 내용이었다. 담당 선생님에게 물었다. “최재천 교수가 고등학교에서도 강연을 하네요?”, “네, 최재천 교수님이 이 고등학교 출신이라서요 매년 오셔서 강연을 해주세요.” 간신히 지각을 면해서 학교에 도착했을 때 교무실에 들어가지 않고 곧바로 교실에 들어갔었다. 조금 일찍 와서 교실에 들어가기 전에 교무실부터 들어왔어야 했는데.
(2017.06.07.)
2017/08/06
지도교수의 깊은 뜻
석사 논문 심사가 임박한 어느 석사과정생이 나에게 이렇게 물었다. “선생님은 왜 저를 말리지 않았을까요? 분명히 선생님께 석사 논문 계획서를 보여드렸는데 선생님은 일단 생각한대로 써보라고 하셨어요. 제 눈에도 이러면 안 되겠다 싶은데, 그렇다면 선생님 눈에는 그런 게 더 분명히 보일 거잖아요. 그런데 왜 선생님은 말리거나 수정해주시지 않고 제가 생각한 대로 해보라고 하셨을까요?”
선생님을 5년 간 본 나는 세 가지 이유에서 그런 것 같다고 추측했다.
(1) 나름대로 괜찮다고 판단해서
(2) 어떤 연구가 가망 있는지 없는지를 판단하는 것도 연구자의 능력이라서
(3) 학생을 뜯어말려서 더 좋은 결과를 산출해도 막상 학생은 지도교수를 원망할 수 있어서
모든 연구는 한정된 자원 내에서 수행되며 연구자의 통제 가능한 범위 내에서 진행되어야 한다. 연구비가 무한정 들어가거나 연구 기간이 한도 끝도 없이 길어지면 그 연구는 망한 것이다. 수행 가능한 연구라고 하더라도 연구 가치가 없거나 너무 사소한 결론을 얻을 뿐이라면 그런 연구는 하면 안 된다. 그러니 연구 계획을 짜는 능력도 연구자의 능력에 포함될 것이다. 지도 학생이 연구 계획을 다 짠 한 후에야 지도교수님이 세부 사항을 조정하는 건 이러한 이유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또 다른 이유는 지도교수가 학생이 이상한 연구를 하려는 것을 뜯어말려서 더 좋은 결과를 산출해도 학생이 지도교수를 원망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지도 학생이 이상한 주제나 낯선 주제로 석사 논문 쓰려는 것을 적극적으로 말리는 교수들이 있는데, 그런 교수의 지도학생들 중 일부는 정상적인 기한 안에 멀쩡히 학위를 받고도 딴 소리를 하기도 한다. 자기가 원래 쓰려던 주제는 다른 거였는데 지도교수가 말려서 주제를 바꾸었다면서, 원래대로 쓰고 싶었던 주제로 논문을 썼으면 더 좋은 논문이 나왔을지 모른다고 주장한다. 나는 다른 학교 대학원생 중에서 그런 사람을 실제로 보았다. 그런 학생들이 나올까봐 내 지도교수는 지도 학생이 이상한 주제를 들고 와도 우려만 표명하고 적극적으로 말리지 않는 것 같다.
내가 석사 논문 쓸 때 계획을 무리하게 잡고 시간을 많이 허비했는데도 지도교수님은 우려만 완곡하게 표하시고 적극적으로 말리지는 않으셨다. 나 혼자 그렇게 헛짓거리를 하면서 그만 두지 않고 버틴 것을 보면, 나는 지도교수의 지시에 따라 논문 주제를 바꾸고 제때 졸업했다고 해도 분명히 뒤에서 딴 소리 하고 돌아다녔을 것이다.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반성도 많이 하고 성격도 더 순해지고 연구나 진로에 대해서도 고민하게 되었다. 지도 교수님의 지도 방식에는 깊은 뜻이 있었던 것 같다.
(2017.06.06.)
2017/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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