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북한 측에서 했던 서울 불바다 발언은 공포스러운 것이었다. “송 선생님, 서울이 여기에서 멀지 않습니다. 전쟁이 나면 서울이 불바다가 되고 말아요. 그렇게 되면 송 선생님도 아마 살아남기 어려울 겁니다.” 서울 불바다 발언에는 군더더기 하나 없이 필요한 말만 있다. 글이나 말에서 절제는 긴장감을 높이는 효과가 있다. 협박은 이래야 한다.
그와 달리, 며칠 전 북한의 <민족화해협의회>가 한 “잠자코 앉아서 뒈질 날이나 기다려라” 발언은 긴장감보다도 한국어가 보여줄 수 있는 해학이나 리듬감 같은 것을 보여준다. 분명히 북한에서 그러한 문구를 짜는 사람들이 따로 있을 텐데, 애초에 문구 만들 때부터 자기들끼리 피식피식 웃으면서 “솔직히 우리가 봐도 웃긴데?” 하면서 글을 쓰지 않았을까 싶다.
하여간 “잠자코 앉아서 뒈질 날이나 기다려라” 같은 표현을 생각해내는 북한 매체를 보면서, 나도 모국어 감각을 갈고 닦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한국에서 힙합하는 사람들도 그런 건 배워야 한다. 통일 되고 북한에 힙합이 전파되면 정말 볼만 할 것이다.
* 뱀발: “잠자코 앉아서 뒈질 날이나 기다려라”는 웬만한 상황에 사용해도 어색하지 않은 표현이다.
(1)
이성계의 낙마 소식을 듣고 정몽주가 이성계 병문안을 왔다. 병문안을 하고 돌아가려 하는데 이방원이 정몽주에게 차 한 잔을 권한다.
- 이방원: “포은 선생님, 제가 시를 한 수 지었는데 들어보시겠습니까?”
- 정몽주: “들려줘 보게.”
- 이방원: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 선생님께 답시를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 정몽주: “잠자코 앉아서 뒈질 날이나 기다려라.”
(2)
임진왜란 때 고니시 유키나가는 대군을 이끌고 동래성에 도착했다. 전투가 시작되기 전 고니시 유키나가는 동래부사 송상현에게 푯말을 써서 보냈다.
- 고니시 유키나가: “명을 치려하니 길을 빌려 달라.”
- 송상현: “잠자코 앉아서 뒈질 날이나 기다려라.”
(3)
폼페이우스를 지지하던 로마 원로원은 카이사르에게 군대를 해산하고 로마로 돌아오라는 결정을 내렸다. 군대를 끌고 루비콘 강을 건너는 것은 로마에 대한 반역행위다. 결단을 촉구하는 부하들 앞에서 카이사르는 이렇게 말했다. “원로원 역적패당 놈들, 잠자코 앉아서 뒈질 날이나 기다려라.”
* 링크: [조선일보] “잠자코 앉아 뒈질 날이나 기다려라” 北, 김정은 비판한 朴대통령에 막말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6/09/11/2016091100335.html )
(2016.09.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