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기가 케이블에서 강의를 잘못해서 엄청나게 욕을 먹고 있다. 사실 자체를 틀리게 말했으니 욕먹어 마땅하기는 하다. 그런데 인문학에 대해 뭔가 단단히 잘못 아는 사람들이 틀린 근거를 들어 최진기를 비판하기도 하는 것 같다. 심지어 인문학을 단순명료하게 강의했다는 것으로 욕하기도 한다.
“인문학이 학원 강의와 다른 점은 그것이 명쾌함과 단순함을 거부한다는 데 있다. [...] 문학이든 미술이든 음악이든 철학이든, 인문학 분야의 지식은 공부하면 할수록 명쾌해지는 게 아니라 더 모호해지고 더 복잡해지기만 한다. 인문학이 탐구하는 대상인 ‘인간’ 자체가 바로 그런 존재이고, 그 인간들이 살아가는 사회가 바로 그런 공간이기 때문이다. [...] 대중인문학은 이 혼돈을 제거한 채로 춤추는 별에만 집중하는 엔터테인먼트이다. 인문학은 혼돈 속에서 즐거움을 발견하는 사유 행위일 때만 의미가 있다.”(문강형준, <광대의 인문학>)
“소위 인문학적 소양이란 치열한 ‘왜’로부터 출발한다. ‘왜’를 묻는다는 것은 비판적 사유와 분석을 필요로 한다. 근대를 지난 현대 인문학의 다양한 분야들을 아우르는 정신이 있다면, 그것은 ‘질문은 해답보다 심오하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인문학적 사유에 들어서는 사람들이 먼저 마주하게 되는 것은 간결함과 명쾌함이 아닌, 불확실성과 모호성이다. 인문학적 사유는 이전의 익숙한 이해세계를 뒤흔드는 내면적 불편함을 경험하게 한다. 한국의 대중매체에서 소비되고 있는 인문학의 상품화가 결정적으로 놓치고 있는 점이다.”(강남순, <인문학의 상품화, 그 위험한 유혹>)
공부할수록 더 어렵고 복잡해지는 것은 모든 학문의 특성이지 인문학이 인간을 다루어서가 그런 것이 아니다. 입문이나 개론 때는 최소한만 배우지만 갈수록 고려해야 할 요소가 증가한다. <경제학원론>에서 수요-공급 곡선만 배운 신입생은 최저임금제가 실업률을 높이니 없애야 한다고 믿지만 <노동경제학>을 배우면서 경제 현상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음을 알게 된다. 이과대나 공대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들었다.
“인문학은 혼돈 속에서 즐거움을 발견하는 사유 행위일 때만 의미가 있다”느니 “인문학적 사유는 이전의 익숙한 이해세계를 뒤흔드는 내면적 불편함을 경험하게 한다”느니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도 모르겠다. 학문은 뒤섞이고 모호한 것을 명료하고 정돈되게 하려고 하는 것이다. 혼돈이나 내면의 불편함이 어떤 학문의 가치라면 그딴 학문은 할 필요가 없다. 그렇게 혼돈을 즐기고 싶으면 왜 굳이 어렵게 학문을 하는가? 자취방을 답 안 나오게 어질러 놓고 침대에 앉아 아무 것도 손대지 말고 천천히 방을 응시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학부 때를 돌이켜보면 본인이 뒤죽박죽으로 가르치는 것을 오히려 자랑삼아 말하는 교수도 있었다. 아무 것도 모르는 학생들한테 아무 설명 없이 원전 번역서만 읽혀놓고 “읽어왔으면 질문을 해라. 왜 질문을 안 하냐?”고 닦달하던 교수도 있었고, “나는 매년 같은 텍스트를 읽으면서 일부러 텍스트의 다른 측면에 초점을 맞추려고 한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교수도 있었다. 그 분들한테 미안한 말이지만 교육의 측면에서만 보면 최악의 방식이다.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한테 모호하고 혼란스럽게 가르치면 그 수업은 망한다.
모든 것을 한 번에 가르칠 수는 없다. 이 때문에 교육과정에서 교육 내용을 어쩔 수 없이 왜곡해야만 하는 경우가 있다. 가령, 사칙연산도 못 하는 초등학교 저학년 학생한테 음수 개념을 가르칠 수 없기 때문에 “5 빼기 7”의 답은 –2가 아니라 “없다”고 가르친다. 수학적으로는 틀리지만 그렇게 해야만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 중학교에서 이차방정식 가르칠 때 판별식이 0보다 작으면 근이 허수라고 하는 게 아니라 “근이 없다”고 가르치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것을 중등교육의 문제라고 하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왜 인문학만은 초보자가 혼돈과 불편함을 느끼게 해야 한다고 말하는가? 어디 화끈하게 인문정신을 맛보라면서 혼돈과 모호의 구렁텅이에 초심자를 밀어 넣으면, 대부분은 그 다음 단계로 못 넘어가고 그 수렁텅이 속에서 허우적거리다 책을 덮는다. 요행히 책을 안 덮어 봐야 개멋이나 부리고 헛소리나 하는 무식쟁이가 된다. 처음에 단순명료하게 가르치고 수준을 높여가며 약간씩 교정하는 것이 더 낫다.
대안은 교양 강의를 보급형과 고급형으로 나눠서 제공하는 것이다. 시청률에 민감한 지상파나 케이블에서는 사교육 강사를 쓰고 시청률 상관없는 교육방송 같은 데는 훌륭한 연구자를 쓰면 된다. 이러면 시청자들은 자기 수준에 맞게 방송을 찾아서 볼 수 있다. 단, 후자의 경우 몇 번 하고 마는 게 아니라 작정하고 장기 편성해야 한다. <노자와 21세기>도 20회 정도까지는 사람들이 방송이 있는 줄도 모르다가 이후에 시청률이 급상승했다. 로마사 천년을 100회 분량으로 하든지 춘추전국시대를 200회 분량으로 하는 편성도 괜찮을 것 같다. 아재 개그도 계속 듣다 보면 정신 놓고 실실 웃게 되듯, 노잼 강의도 물량으로 밀어붙이면 고정 시청자가 생길 수 있다.
사교육 업자들의 강의 질 문제는 간단히 해결할 수 있다. 전문가들의 감수를 받으면 된다. 사실, 나는 최진기가 전문가 감수를 안 받은 게 더 신기하다. 방송국에 전문가 감수를 요구했다면 방송국은 공식적인 경로를 통해 해당 분야 교수에게 접근했을 것이다. 업자는 전문가와 쉽게 교류하고 그 비용은 방송국이 부담한다. 사업할 때 아는 사람이 많이 필요하다던데 교수들은 다들 출신이 좋으니 사업에 필요한 다른 사람한테 접근할 때도 도움이 될 거다. 그런데 최진기는 왜 그렇게 안 했을까? 사업이 잘 되어서 그럴 필요성을 못 느꼈나?
* 링크(1): [한겨레] 광대의 인문학 / 문강형준
( www.hani.co.kr/arti/opinion/column/747690.html )
* 링크(2): [경향신문] 인문학의 상품화, 그 위험한 유혹 / 강남순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6132106005 )
(2016.06.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