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5/05

인문학 위기의 핵심은 대학 구조조정이다



한국에서 인문학으로 불리는 것은 (i) 전공으로서의 인문학 (ii) 학부 교양과목 수준의 교양 (iii) 자기계발이나 힐링, 이렇게 세 가지 정도다. 언론에 나오는 인문학에 관한 논의는 이 세 가지를 구분하지 못한다. 인문학-까나 인문학-빠나 언론에 나오는 사람들은 죄다 이 세 가지를 구분하지 못하고 섞어 쓴다.

<동아일보>에 실린 “청춘이여, 인문학 힐링 전도사에게 속지 마라”(김인규 교수)라는 칼럼과 이를 반박한 “청춘이여, 미래는 인문학에 있다”(김희원)라는 글은 둘 다 저질이지만 한 번쯤 읽어볼 만하다. 일종의 표본이라고 볼 수 있다. 언론에서 인문학의 위기를 논의하는 수준은 대체로 두 글의 수준을 넘지 않는다.

김인규 교수의 글은, 인문학(전공)을 배운 학생들이 실업자가 되는 것은 인문학(힐링)이 용 잡는 소리나 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니 대학에서 인문학(전공) 전공자 정원을 줄이고 인문학 교양수업(교양)을 강화하자는 내용이다. 이에 대한 김희원의 반론은 인문학이 필요한 이유로 잡스와 주커버그를 들며 “사용자에 대한 이해”를 들먹인다. 그 놈의 잡스 타령, 주커버그 타령, 참 지겹다. 반론자는 인문학이 사치재라는 김인규 교수의 주장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다. 아마도 사치재가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인생의 의미 같은 소리나 하는데 무슨 수로 제대로 된 비판을 하겠는가?

인문학 위기의 핵심은 대학 구조조정이고, 대학 구조조정은 전공 인문학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관한 문제이다. 구조조정에 찬성하는 입장은 명확하다. 대학의 문/사/철이 생산 활동에 도움이 안 되니 정리하자는 것이다. 이 입장에 동의하든 않든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다. 반면, 구조조정에 반대하는 입장은 도통 알아먹을 수가 없다. 인문학의 가치가 어떠니 자유가 어떠니 하는 예쁘고 뻔하고 내용 없는 소리나 하거나, 인문학을 배우면 통찰력이 생기고 창의성이 생긴다는 유사-의학 같은 소리나 하거나, 인문학을 하면 인성이 함양된다는 주자학 같은 소리나 하거나, 문화 컨텐츠로 돈 벌자는 저열한 소리나 하거나, 아니면 그냥 대책 없이 멍청하다.

흔히들 하는 착각은, 고대 그리스 시대의 교육의 목적과 21세기 대학교육의 목적이 같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시민’은 오늘날 서울 ‘시민’의 시민이 아니라 노예를 부리는 지배계급이었다. 밥 먹고 사는 일은 노예들이 해결하는 문제였기 때문에 그리스 시민들의 교육은 밥 먹고 사는 일과 무관한 것일 수 있었다. 이는 동아시아도 마찬가지다. 조선에서 공자왈 맹자왈 하는 사람은 자기 손으로 밥 벌어먹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가난한 선비 코스프레는 유가 전통을 따르는 것일 뿐이다. 일례로, 퇴계 이황은 젊어서 가난했지만 결혼을 잘하는 바람에 노비 3천 명을 거느렸다. 근세 유럽도 사정은 비슷하다. 그 당시 대학교육은 사회 상류층을 위한 교육이었다. 대학이 생산 활동에 직접적인 기여를 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경영학이 20세기에야 등장한 것은 아마도 우연이 아닐 것이다.

오늘날의 대학 교육을 고대 그리스나 근세 유럽의 대학 교육과 비교한다는 것부터 비교 대상을 잘못 고른 것이다. 부모가 노예를 부리거나 봉건 영주거나 부르주아인 사람은 대학에서 무엇을 전공하든 상관할 바가 아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취업하든 사업하든 프리랜서를 하든 자기 손으로 돈을 벌어야 한다. 대학 구조조정은 이와 관련된 이야기인데, 다들 엉뚱한 소리나 하고 있다.

대학 구조조정은 어떻게든 할 수밖에 없다. 한국의 대학 진학률은 유럽의 두 배이고 일본의 1.5배인데, 이건 한국의 산업구조가 유럽이나 일본보다 고도화되어서 그런 게 아니라 수요 예측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유럽이나 일본에서는 고등학교만 나와도 할 수 있는 일을 한국에서는 대학을 나와도 못한다. 이 때문에 발생하는 사회적 비용만 해도 상당할 것이고, 이것이 한국 대학의 물적 기반을 위협한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게 대학 구조조정이다.

대학 구조조정의 진짜 문제는, 자본의 논리가 개입한다는 게 아니라 자본의 논리조차 부합하지 않는 너무 엉성한 구조조정이라는 데 있다. 구조조정의 대표적인 사례로 드는 게 IBM과 GE의 구조조정이다. IBM은 회사가 어려워지자 자발적인 퇴직자를 모집했다. 그러자 나가야 할 사람은 남고 남아야 할 사람이 나갔다. IBM은 이런 짓을 7년이나 계속했고 7년 동안 역-선택이 일어났다. GE은 필요한 인력만 남기고 화끈하게 구조조정을 한 뒤 회사를 안정시켰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한국의 대학 구조조정은 구조조정 중 최악의 형태다. 정부는 부실 대학들 보고 시간을 준 뒤 알아서 대책을 마련하라고 한다. 그러면 대학들은 살아남기 위해 인문학을 포함한 기초 학문을 줄이거나 없앤다. 정리될 대학이 이런 식으로 구조조정해서 퇴출을 피하면 그 대학보다 사정이 조금 나았던 대학이 퇴출될 것이다. 그러니 연쇄적인 구조조정이 일어나고 결국 서울 시내에 있는 비교적 멀쩡한 대학들까지 인문학을 정리하게 된다.

만일 누군가 책임을 지고 화끈하게 대학 구조조정을 했다면 이런 연쇄적인 구조조정은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과를 정리하는 게 아니라 대학을 정리하는 방식으로, 절반이든 3분의 1이든 화끈하게 정리했어야 했다. 찔끔찔끔 구조조정해서 기초 학문이 다 죽는 것보다는 대학 절반만 없애고 기초 학문이 다 사는 편을 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하지만 그런 악당짓을 해서 두고두고 악명을 남기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며, 정치인이든 관료든 자신에게 손해되는 짓을 할 사람은 없다. 따지고 보면 그런 짓을 할 강력한 권한이 있는 사람도 아마도 없을 것이다.

대학 교수나 언론인이 대놓고 이런 말을 하면 나쁜 놈이 되니까 사석에서만 하지 공식적으로는 하지 않는다. 게다가 이상한 놈들은 항상 목소리가 크다. 그렇게 지금 같은 상황이 벌어지게 되었다.

* 링크(1): [동아일보] 청춘이여, 인문학 힐링 전도사에게 속지 마라 / 김인규

( http://news.donga.com/Column/3/all/20150228/69852847/1 )

* 링크(2): [동아일보] 청춘이여, 미래는 인문학에 있다 / 김희원

( http://news.donga.com/List/Column/3/04/20150303/69911821/1 )

* 링크(3): [성균관대 문과대학] 식민화하는 대학, 대항하는 인문학

( www.skku.edu/new_home/campus/skk_comm/notice_view.jsp?boardNum=28212 )

(2015.03.05.)


2015/04/28

Readings on Laws of Nature (2004) by John W. Carroll (ed.)


John W. Carroll (ed.) (2004), Readings on Laws of Nature
: 자연법칙에 관한 선집


University of Pittsburgh Press
August 2004


Introduction / John W. Carroll 

1. Laws of Nature / Fred I. Dretske
(from Philosophy of Science 44 (1977): 248-68.) 

 2. The Nature of Laws / Michael Tooley
(from Canadian Journal of Philosophy 7 (1977): 667-98.)

3. Do the Laws of Physics State the Facts? / Nancy Cartwright
(from Pacific Philosophical Quarterly 61 (1980): 75-84.)

4. Confirmation and the Nomological / Frank Jackson and Robert Pargetter
(from Canadian Journal of Philosophy 10 (1980): 415-28.)

5. Induction, Explanation, and Natural Necessity / John Foster
(from Proceedings of the Aristotelian Society 83 (1982-83): 87-101.)

6. Armstrong on Laws and Probabilities / Bas C. Van Fraassen
(from Australasian Journal of Philosophy 65, 3 (1987): 243-60.)

7. Confirmation and Law-likeness / Elliott Sober
(from Philosophical Review 97 (1988): 93-98.) 

8. The World as One of a Kind: Natural Necessity and Laws of Nature 
/ John Bigelow, Brian Ellis, and Caroline Lierse
(from British Journal for the Philosophy of Science 43, 3 (1992): 371-88.)

9. Natural Laws and the Problem of Provisos / Marc Lange
(from Erkenntnis 38 (1993): 233-48.)

10. Humean Supervenience / Barry Loewer
(from Philosophical Topic 24 (1996): 101-27.)

11. Ceteris Paribus, There Is No Problem of Provisos
/ John Earman and John Roberts
(from Synthese 118 (1999): 439-78.)

12. The Non-Governing Conception of Laws of Nature / Helen Beebee
(from Philosophy and Phenomenological Research 61 (2000): 571-94.) 


(2015.04.27.)


 


 


2015/04/25

나는 왜 페미니스트가 아닌가

작년 말에 우연히 사회운동단체 활동가와 술자리를 같이 한 적이 있었다. 나보다 나이가 열 살 정도 많은 분이었다. 그 분이 나에게 여러 가지 사안에 대한 견해를 물어서 나는 평소 생각대로 말했는데, 그 분은 내가 대답을 할 때마다 강한 영남 억양으로 “캬, 정확하네!”라고 하셨다. 마치 영화 <범죄와의 전쟁>에 나오는 “살아있네!”와 같은 억양이었다. 그렇게 그 자리에서 그 분에게 “정확하네!”라는 말을 스무 번쯤 들은 것 같다.

그 분은 내가 마음에 들었는지 “◯◯◯씨는 본인이 맑시스트라고 생각합니까?”라고 물었다. 그 분은 내가 내 입으로 스스로 맑시스트임을 인정했으면 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아니요”라고 답했다. 그러자 그 분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며 왜 그렇게 생각하냐고 물었다.

나는 “-주의자”나 “-ist”라고 불리는 사람은 어떤 이념을 웬만큼은 제대로 알고 그에 상응하는 실천을 하는 사람이라고 알고 있다. 가령, 기회주의자는 기회주의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아니라 기회주의적으로 사는 사람이다. 책 몇 권 읽었다고 ◯◯주의자가 저절로 되는 게 아니다. 나는 마르크스주의도 잘 모를 뿐 아니라 실천은커녕 그냥 대학원에서 찌질이로 활동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다.

그 분은 나보고 “그래도 맑스주의에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으냐”고 물었고 나는 “관심이 있고 나중에 여력이 되면 관련 문헌을 찾아보겠지만, 아직은 맑시스트라고 할 수는 없다”고 했다. 여러 번 실랑이를 했다. 그 분은 어떻게든 내가 맑시스트라고 실토했으면 했고 나는 끝까지 맑시스트가 아직 아니라고 했다. 그분은 뭔가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페이스북을 보니, 여성 차별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나는페미니스트입니다”라고 헤시태그를 달아놓는 모양이다. 나는 이걸 매우 좋게 보지만 막상 내가 하려니 남사스럽다. 나는 페미니즘에 대해서도 잘 모르며 실천은커녕 여전히 대학원에서 찌질이로 살고 있기 때문이다.

나에게 적합한 문구는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는 아니고 “나는 나는 무럭무럭 자라서 페미니스트가 될 겁니다” 정도인 것 같다. 언젠가 “#‎나는페미니스트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날이 올 거라 믿고 있다.

(2015.02.28.)

2015/04/24

고양이들의 자율 배식

몇 주 동안 고양이들이 이상했다. 예전에는 아침마다 고양이들이 현관 앞에 모여서 밥 달라고 울었는데, 요새는 고양이들이 얌전히 있었다. 예전에는 고양이 소리가 나서 현관문을 열면 화천이가 집안으로 뛰어 들어와서 곧바로 사료 포대에 머리를 박았는데(다른 고양이들은 어머니를 무서워해서 현관에 못 들어온다), 요즈음에는 고양이들이 사람을 봐도 멀뚱히 누워있다.

고양이들이 왜 그러는지 여러 가지 추측을 해보았다. 어머니는 화천이가 새끼를 배서 그런 것 같다고 하셨다. 고양이는 새끼를 배면 사료를 더 먹는다. 나는 계절이 바뀌어서 그러나 했다. 그런데 고양이들이 계절 타는 건 본 적이 없다.

오늘에야 고양이가 달라진 이유를 알았다. 고양이들이 창고에서 뛰어노는 것이 이상해서 창고 2층에 올라가 살펴보니, 2층에 둔 고양이 사료 포대 한 구석이 터져있었다. 고양이들은 포대에 구멍을 뚫고 심심할 때마다 사료를 먹고 있었던 것이다. 자율 배식을 하고 있었다.

(2015.02.19.)

2015/04/22

여백이 있는 글쓰기 - 영화 <역린>은 왜 구린가

글쓰기 교육 전문가 이강룡은 여백이 있는 글을 쓰라고 말한다. 여백이 있는 글은 엉성한 글이 아니라 군더더기를 모두 없애서 꼭 필요한 말만 하는 글이다. 그러한 글을 쓰려면 주장을 줄이고 근거를 늘려야 하고 감정을 직접 표현하는 대신 그러한 감정을 느낄 여지를 보여주어야 한다고 한다.

이강룡은 다음과 같은 사례를 들었다. 어떤 초등학교에서 민속촌으로 현장체험학습을 갔다. 교사는 학생들에게 유인물을 나눠주고 과제를 하게 했다. 어떤 학생이 한눈을 파는 사이, 지나가던 말이 그 학생이 손에 쥐고 있던 유인물을 뜯어먹기 시작했다. 놀란 학생은 자신의 인쇄물을 말에게 빼앗기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다른 애들은 모두 그걸 보며 웃었고 그날 학생들의 일기 내용은 모두 똑같았다. “오늘 민속촌에 소풍 갔는데 말이 ◯◯의 종이를 뜯어먹었다. 참 재미있었다.” 그런데 자신의 유인물을 말에게 빼앗기지 않으려고 애쓴 그 학생이 쓴 일기는 달랐다. “나는 말에게 종이를 빼앗기지 않느라 고생했다. 왜냐하면 종이 끝에 스템플러가 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이강룡은 그 학생의 일기 같은 글이 여백이 있는 글이라고 말한다. 동물을 보호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하는 것이나 자신이 동물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역설하는 것보다 그러한 여백이 더 강한 힘을 가지며 그 학생의 따뜻한 마음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게 생각만큼 잘 안 된다는 것이다. 글로 먹고사는 사람 중에도 이런 걸 잘 못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이들은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첫 번째 유형은 여백이 뭔지 아예 모르는 부류다. 이들은 대놓고 감정 상태를 기술한다. 그런 글을 쓰는 저자는 혼자 감동받지만 그런 글을 읽는 독자는 차분해진다. 가령 이런 식이다.

강유는 몹시 제갈량을 안타까워했다. ‘불쌍한 분...’

작가는 제갈량이 안 됐다는 것을 강유의 입으로 표현하려고 한다. 그런데 이렇게 해놓으니까 독자 입장에서는 제갈량이 불쌍하다는 것이 와닿지 않는다. 출판한 권수로만 놓고 보면 중견작가 축에 끼는 사람 중에도 이런 식으로 글을 쓰는 사람이 종종 있다.

두 번째 유형은 여백을 억지로 쥐어 짜내는 경우다. 이들은 심심하면 말 줄임표를 붙여서, 무형의 여백을 만드는 대신 문장 안에 물리적인 공간을 만들어낸다.

얼마 전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영화 <역린>의 각본을 소설화한 책을 훑어보았다. 놀랍게도, 소설에 있는 거의 모든 대화마다 말 줄임표가 있었다. 큰따옴표 안에 말 줄임표가 반드시 하나 이상 있었다. 이런 식이다.

“상선은... 어디 있느냐.”, “나는 편전이... 이러이러해서... 좋구나”

나는 <역린>을 보고 현빈이 몸만 좋지 연기를 못한다고, 저게 무슨 목우유마 같은 연기냐고 욕했었는데, 그건 내가 오해한 것이었다. 현빈은 각본대로 연기를 충실하게 했을 뿐이다. 어쩌면 현빈 또한 그러한 각본의 피해자였는지도 모른다.

(2015.02.10.)

한강 작가 노벨문학상 수상 예언한 알라딘 독자 구매평 성지순례

졸업하게 해주세요. 교수되게 해주세요. 결혼하게 해주세요. ​ ​ ​ ​ ​ * 링크: [알라딘] 흰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소설 ( 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43220344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