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12/04

장자처럼 열심히 살기

  
어떤 동양철학 대학원생이 『장자』를 읽는다고 말하자, 그 사람의 후배는 왜 장자를 읽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 대학원생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게으르게 사는 것을 죄악시하는데 왜 그렇게 살아야 하나, 그렇게 사는 게 옳은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읽는다”고 답했다고 한다.
  
노자는 그냥 노인네가 아니라 주나라 왕실 서고의 사관이었고, 장자는 나비꿈이나 꾼 백수가 아니라 초나라 왕이 직접 초빙하려고 했던 사람이며, 완적은 하는 짓이 정신 나간 사람 같지만 명문가 자제였다. 그 사람들은 남들보고 헐렁하게 살라는 것처럼 써놨지만 그들은 모두 당대에 매우 잘 나갔던 사람들이었고 바쁘게 살았다. 강신주도 사람들보고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라고 강연하지만, 막상 강신주 본인은 7-8년 간 쉬지 않고 일하다가 등산 중에 위경련이 일어난 뒤 일을 줄였다고 한다.
  
  
(2014.01.11.)
  

'안녕들 하십니까'를 고까워하지 말자

어떤 후배가 “안녕들 하십니까”를 보니 씁쓸했다고 써놓은 글을 보고, 나는 그 마음이 이해가 갔다. 사람 마음이란 게 그렇다.

한몫을 잡겠다든지 취업에 도움이 된다든지 등등 공적 조직으로 사적 이익을 도모하는 놈들이 학생회 대표자나 집행부를 하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총학생회 선거를 보면서 느낀 건데 아무래도 못된 놈들은 타고나는 것 같다), 내가 본 사람들은 어쩌면 다들 그렇게 올바르고 궁상맞은지 모르겠다. 나는 학부 내내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 학교를 다녔다.

가시적인 사적 이익을 위해 학생회를 하는 것이 아니라면, 무엇이 그들을 버티게 할까. 나름대로의 신념이나 자존감 때문 아닐까? 어떤 정치적인 신념, 또는 약간 어정쩡한 신념+공동체에 대한 이타심, 또는 ‘그래도 나는 옆의 놈이 죽든 말든 아무렇지 않아하는 개돼지는 아니야’라고 하는 도덕적 우월감(?), 또는 ‘저 새끼들(학생회로 사적 이익들 도모하는 놈들)이 활개 치는 꼴을 볼 수 없어’라고 하는 적개심, 이런 게 아닐까? 어쨌거나 이런 게 아니라면 돈도 안 되고 열심히 활동할수록 가난해지며 그다지 재미도 없을뿐더러 취업에도 도움이 안 되는 그런 짓을 할 이유가 없을 것 같다.

학생회를 한다고 막상 학생들이 알아 주냐? 그것도 아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도와 주기라도 하느냐? 도와주는 사람은 정해져있다. 그런데 괜히 딴지나 걸고 불평이나 하는 사람, 학생회가 뭐하는지 모르겠네 하면서 뒤에서 욕하는 사람, 정치적이거나 사회적인 입장 좀 논의하려 하면 선동하지 말라하고 너네가 무슨 근거로 정치적인 입장을 내냐고 하는 사람, 말 좀 통하겠네 싶으면 계몽하려 하지 마라 가르치려 하지 마라 하는 사람, 이런 사람들은 도처에 널려 있다. 선거 좀 하려고 하면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냐는 표정으로 투표 안 하고 지나가는 사람, 애절한 목소리로 “학우님 투표 좀 하세요” 하면 안 한 거 뻔히 아는데 했다고 뻥치는 사람, 이런 사람도 숱하게 많다. 어떻게 가까스로 투표율 50%로 넘기면 앞에서 말한 것은 다시 반복된다. 그 와중에 몸은 고단하고 물질적으로도 가난하고 학점도 가난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내면적인 이유로 버티고 있던 어느 날, 갑자기 안녕하시냐면서 평상시에 아무 것도 안 하던 사람들이 원래부터 올곧고 의식 있고 양심 있고 이타적인 사람인양 나타난다. 그걸 보면 속이 쓰릴 수 있다. ‘언제부터 그렇게 깨어있는 학우님이셨담?’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나도 성인군자가 아니라 그런 마음 충분히 이해한다.

그런데 학생회에서 정치적인 쟁점이나 사회적인 문제를 논의하는 이유 중 하나가, 자기 일이나 하고 자기 앞길이나 사람들도 그러한 문제들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는 것이라면, 지금 일어나는 일은 충분히 바람직한 일 아닌가. 그리고 그들이 더욱 자신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음으로 양으로 돕는 게 낫지 않을까.

아기가 걸음마를 걸을 때 부모들은 잘한다 잘한다 하면서 아기가 자꾸 걷도록 한다. 아기가 정말 잘 걸어서 잘한다고 하는 게 아니다. 잘 걸으라고 잘한다고 하는 거다. 태어나서 처음 대자보를 쓰는 사람들한테 잘한다 잘한다 하는 것이 그렇게 힘들거나 부당한 일은 아닐 것 같다.

어쨌거나 아무나 대인배가 되는 건 아닌 것 같다. (물증이 없어서 그렇지, 사실 나는 대인배도 타고나는 것 같다는 심증을 갖고 있다.)

KTX 민영화니 밀양 송전탑이니 그런 건 잘 모르겠다. 나는 기말보고서 때문에 안녕하지 않다. 기말보고서나 마저 써야겠다.



(2013.12.16)

철학이 쉬워야 한다는 요구는 무엇을 보여주는가

   
철학을 비롯한 인문학 일반에 부당한 요구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철학이 쉬워야 하고 대중이 접할 수 있도록 대중의 언어로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문학의 위기는 대중에게서 고립되어 나타난 당연한 귀결이고 그래서 대중의 언어로 인문학을 해야 한다고 말하며, 인문학의 위기라고 부르는 것이 사실은 인문학자의 위기라고 말하기도 한다. 논의 대상을 바꾸면 이게 얼마나 틀려먹은 소리인지 쉽게 알 수 있다. “이론물리학은 쉬워야 하고 대중이 접할 수 있도록 대중의 언어로 해야 한다. 이공계의 위기는 자연과학이나 공학이 대중에게서 고립되어 나타난 당연한 귀결이고 그래서 대중의 언어로 자연과학이나 공학을 해야 한다. 이공계의 위기는 자연과학자나 공학자의 위기다.” 자, 이게 말이 되는가?
  
이론물리학을 일반인들이 친숙하게 접하도록 하는 시도는 정말 가치 있는 것이지만, 그러한 시도와 별개로 이론물리학의 가치는 의심받지 않는다. 일반인들에게 친숙하지 않은 철학은 왜 그 가치를 의심받는가. 이론물리학이 어려운 것은 당연하게 여기면서, 철학을 비롯한 인문학에서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용어나 표현이 나오면 그 존재 가치를 의심하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물리학은 전문적인 학문이라고 보지만, 철학은 전문적인 학문으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전문적인 학문에서는 전문 용어를 쓰기 마련이다. 전문 용어를 쓰지 않으면 어떤 것을 설명하거나 표현할 때 굉장히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게 된다. 이 말이 의심스럽다면, 중학교 때 배우는 주어, 동사, to부정사, 정관사 같은 용어를 쓰지 말고 영어 문법을 설명해 보자.
  
대중의 언어로 과학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이공계의 위기의 본질을 벗어나는 것이라면, 인문학자들이 대중을 만나라는 것도 인문학의 위기의 본질을 벗어날 것이다. 결국 근본적인 대책은 정부 지원을 늘리는 것뿐이다. 민간 재단을 만드는 방법이 있겠지만 하늘에서 돈이 뚝 떨어지는 게 아니라 어쩔 수 없다. 인문학에 세금 지원하는 것에 대해 “자기들이 좋아서 하는 것에 왜 국가가 지원해야 하냐?”고 묻는 사람들은, 이공계 대학원생들 보고 “너희가 좋아서 하는 연구니까 각자 알아서 입자가속기 만들어서 연구해라”라고 하는 것이 말이 되는지부터 생각하고 그런 말을 했으면 좋겠다.
  
  
(2013.11.25.)
    

동작구 대방동에 있는 <대원관>



대방동에서 과외를 끝내고 기숙사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버스를 기다리느라 정류장에 서 있는 데 6차선 도로 맞은편에 있는 가게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대원관>이라고 써 있었다. 과외를 두 달 넘게 했으니까 열 번 이상은 이 길을 지난 것 같은데 오늘에야 그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작고 허름해 보이는 가게였다. 유동인구도 없는 외진 곳에 있는 가게였다. 얼마나 음식이 맛있으면 저렇게 외진 곳에서 가게가 낡도록 저렇게 오랫동안 장사를 한 것일까. 꼭 저 가게에서 짜장면을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멀리 횡단보도를 돌아서 그 가게로 갔다.

밖에서는 작아보였는데 들어오니 생각보다 넓었다. 내가 자리에 앉자 주인 할아버지가 나에게 다가와서 물을 따라주었다. 주인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꼭 중국 사람처럼 생겼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나에게 뭐 먹을 거냐고 묻던 그 할아버지는 옆에 있는 할머니에게 중국말로 뭐라고 말을 했다. 정말로 중국 사람이었다.

짜장면을 주문하고 나서 물을 몇 모금 마시니 아저씨 두 명이 들어왔다. 한 아저씨는 주인 할아버지한테, 지나가다가 가게가 정말 예뻐서 들어왔다고 했다. 그 아저씨는 주인 할아버지한테 이것저것 물어봤다.

- 아저씨: “사장님은 중국에서 오셨어요, 대만에서 오셨어요?”

- 주인 할아버지: “(화교 중에) 대만에서 온 사람이 어디 있어요? 다 중국에서 온 거지. 그때는 중국에서 왔다고 하면 간첩이라 그러고 잡아가고 그랬어요.”

- 아저씨: “이 가게는 얼마나 되었나요?”

- 주인 할머니: “2년만 더 있으면 딱 70년 돼요.”

- 주인 할아버지: “<신동아> 5월호에도 나왔어요.”

그 아저씨는 양파 접시 옆에 있는 춘장을 찍어먹더니 “아, 춘장맛이 다르네”라고 했다. 얼마 후 내가 시킨 짜장면이 나와서 먹었는데 솔직히 나는 뭐가 어떻게 다른 건지 몰랐다. 분명히 공대식당 짜장면보다는 맛있는데, 다른 가게와 어떻게 다른가 싶었다. ‘뭐지, 저 아저씨는 짜장 소믈리에인가?’ 싶었는데, 몇 입 더 먹어보니 다른 가게보다 덜 기름지고 더 담백한 것 같기도 했다. 정말 맛이 다른 건지 내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다.

서울은 매일 무언가가 바뀌는 곳이다. 멀쩡한 것을 부수고 새로 만들고 그걸 다시 부수고 다시 다른 걸 만든다. 내가 서울에서 산 지 10년 정도 되는데 거리며 건물이며 그대로 두는 곳이 별로 없는 것 같다. 꼭 포장도 안 뜯은 새 물건 같은 느낌이 들도록 하려고 그러는 것 같다. 그와 달리, <대원관>이라는 가게에는 꼭 사람의 손길과 시간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서울에 이런 가게가 많이 남았으면 좋겠다.

나중에 그 가게 한 구석에서 탕수육 한 접시에 고량주 한 병 마시는 것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2014.10.06.)


2014/12/03

축제 규제하는 숙명여대 총학은 꼰대인가?



이야기가 산으로 간다. <한겨레> 기자는 숙명여대 총학생회보고 꼰대라고 했다.

“먼저 숙대 축제의 의상 논란은 크게 3개의 다른 결이 있습니다. 바로 (i) 대학까지 스며든 선정성과 성상품화 등 천박한 자본주의 논란 (ii) 노출이 성폭력의 빌미를 제공한다는 남성 중심적 담론을 숙대 총학이 받아들였다는 퇴행적 결정 논란 (iii) 성인에게 복장 규정을 강제한다는 논란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겨레> 기자는 자신이 (iiI)에 대해서만 이야기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기사는 (iii) 뿐만 아니라 (ii)와 관련된 허점도 같이 보여준다. 그는 “남성들의 모멸감과 위협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옷을 단정하게 입어야 한다는 것도 꼰대의 논리”라고 주장한다. 숙대 총학의 규정안에는 그러한 논리가 없다. 굳이 따진다면 “안전하고 건전한 축제”라는 문구를 꼬투리 잡을 수 있겠지만 이 또한 그러한 논리의 근거는 아니다.

“어떠한 것을 조심하라”는 말은 “그것에 의해 피해를 입었을 경우 그 책임이 너에게 있다”는 뜻을 함축하지 않는다. “차 조심 하라”라는 말은 “어떤 차가 너를 치었을 경우 그 사고는 너의 책임이다”라는 말이 아니며, “돈을 너무 많이 가지고 다니지 마라”는 말은 “누군가 그 돈을 훔쳐가도 그 원인은 너에게 있다”는 말이 아니다.

노출이 성폭력의 빌미를 제공하지 않지만, 성폭력 가해자들은 노출을 성폭력의 빌미로 삼는다. 성폭력은 전적으로 가해자에게 책임이 있지만, 가해자에게 책임을 묻는다고 해서 피해자가 입은 피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축제기간 중 위험 요소를 최소화하는 게 총학생회의 역할이라고 한다면, 이걸 가지고 남성 중심적 담론이라고 할 수는 없다.

또한 숙대 총학의 규제안에서 의상 규정은 일부분에 불과하다. 규제안의 대부분은 주점 운영과 관련된다. 규제안은 축제 기간 중 교내에서 축제를 즐기는 ‘개인의 옷차림’을 규제하는 것이 아니라 과나 동아리에 운영하는 주점에서 ‘단체로 맞추어 입는 옷’을 규제하는 것이다. 이를 두고 ‘개인이 자유롭게 입을 권리 vs. 총학의 규제’로 모는 것은 억지다. ‘주점의 선정적 운영 vs. 총학의 규제’로 보는 것이 맞다. 숙대 총학은 개인이 야한 옷을 입을 권리를 침해한 적이 없다. 그러니 숙대 총학을 꼰대라고 할 수 없다.

사실 이런 편향은 한겨레신문 기자 뿐 아니라 “쿨함”을 떠받드는 상당수의 남자들에게서 흔히 나타난다. 대표적으로 김어준을 들 수 있는데, 그는 <파파이스>에서, 마치 짠 것처럼 한겨레신문 기자가 기사로 쓴 것과 똑같은 내용의 말을 했다. 그들은 무지를 “쿨함”으로 포장한다.

여성의 노출에는 사회적 맥락이 있다. 그런데 이들 쿨한 남자들은 그런 맥락은 무시한 채 여성의 노출이 여성의 권리이며 여성의 노출을 제한하는 것은 여성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라는 엉성한 도식에 매몰되어 있다. 한겨레신문 기자가 축제 규정안의 의상 규정을 두고 “너무나 단정하게 입는 아랍의 경우 성범죄가 없을까요?”라고 묻는 것은 괜히 뜬금없는 소리를 한 것이 아니다.

빅토리아 시대의 여성들은 테니스를 칠 때도 땅에 질질 끌리는 치마를 입었다. 이들은 수많은 투쟁을 하고서야 겨우 반바지를 입을 수 있었다. 이 경우, 여성 노출의 증가는 여성의 권리 신장과 관련이다. 다른 말로 하면, 여성의 자기결정권이 확대된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여성 아이돌이 반쯤 입고 반쯤 벗은 채로 매체에 등장하는 것은 이전 시대보다 여성의 권리가 신장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여성 아이돌은 자유로운 대중예술인로서 스스로 의상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연예 사업의 경쟁이 치열해지는 와중에 기획사의 수익을 위해 의상을 강요받는다. 이 경우, 여성 아이돌 노출 규제를 주장하는 것을 무조건 엄숙주의나 꼰대짓이라고 할 수 없다.

(어떤 사람들은 이를 두고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 아니냐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의 표현의 자유는 그 사람의 자기결정권에 포함된다. 그러므로 자기결정권을 넘어서는 표현의 자유는 있을 수 없다. 상충되는 것은 ‘표현의 자유’와 ‘자기결정권’이 아니라, ‘기획사 사장의 표현의 자유’와 ‘아이돌의 자기결정권’이다.)

아시아나 항공에서 승무원의 복장을 규제하는 것이 빅토리아 시대의 규제와 비슷하다면, 숙대 총학의 규제는 아이돌에 대한 규제와 비슷하다. 아이돌이 기획사의 수익을 위해 선정적인 의상을 입듯, 대학 축제의 학생들은 주점 수익을 위해 선정적인 의상을 입었다. 한겨레신문 기자가 아시아나 항공의 복장 규제와 숙대 총학의 복장 규제를 같은 선상에 놓고 비교한 것은 그러한 사회적 맥락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노출=자유’, ‘노출 제한=억압’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중요한 건 주점에서 노출하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그 노출이 자기결정권에 의한 것이냐 아니냐다. <한겨레> 기자가 지적한 세 가지 논의 지점에서 (ii)와 (iii)은 허구적인 쟁점이며 생산적인 논의를 가로막는 걸림돌이다. (i)에만 초점을 맞춰도 될까 말까인데, 돌아가는 꼴을 보니 아무래도 이건 이미 망한 논의인 것 같다. 한겨레신문에서 해명 기사랍시고 이렇게 멍청한 소리나 늘어놓은 것을 보면 다른 언론은 볼 것도 없다. 다른 언론들은 대학 축제가 선정적이라고 하면서 적정 수준의 자극적인 사진이나 보여줄 테니 말이다.

* 링크: [한겨레] 그럼에도 불구하고 숙대 축제 ‘드레스코드’는 ‘꼰대스럽다’

( 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657557.html )

(2014.10.01.)


초등학교 셔틀버스의 전원주택 진입로 출입을 막다

전원주택 진입로에 깔린 콘크리트를 거의 다 제거했다. 제거하지 못한 부분은 예전에 도시가스관을 묻으면서 새로 포장한 부분인데, 이 부분은 다른 부분보다 몇 배 두꺼워서 뜯어내지 못했다. 그 부분을 빼고는 내 사유지에 깔린 콘크리트를 모두 제거했다. 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