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6/25

[한국 가요] 악동뮤지션 (AKMU)



악동뮤지션 - 작은별

( www.youtube.com/watch?v=fkvuORod0OM )

악동뮤지션 - 어떻게 이별까지 사랑하겠어, 널 사랑하는 거지

( www.youtube.com/watch?v=mZz9uYdj_v4 )

(2020.10.21.)


[강연] 장동선 (뇌과학 박사)

   
[세바시] 835회. 뇌는 어떻게 ‘변화’를 코딩하는가? | 장동선 뇌과학박사
  
[세바시] 766회. 뇌는 사람이 중요하다 | 장동선 뇌과학자
  
  
(2018.12.29.)
    

2020/06/24

[과학철학] Shapere (1971), “Review: The Paradigm Concept” 요약 정리

     

[ Dudley Shapere (1971), “Review: The Paradigm Concept”, Science 172: 706-9.
  더들리 셰피어, 「‘패러다임’에 대한 비판적 고찰」, 『쿤의 주제들』, 조인래 옮김 (이화여대출판부, 1997), 104-116쪽. ]
  
  
■ [p. 706, 104-105쪽]
- 1962년에 출간된 토마스 쿤의 『과학 혁명의 구조』
- 초판의 논제는 “정상 과학”이라고 불리는 “일관성 있는 과학적 연구 전통들”이 “패러다임들”에 의해 통합되고 그로부터 생겨난다는 것.
• 패러다임은 “과학자들의 공동체에 모범적인 문제와 해답을 제공하는, 보편적으로 인정되는 과학적 업적들”.
• 패러다임은 일단의 이론과 동일시될 수 없는, 더 “전면적”(global)인 그리고 완전한 공식화가 일반적으로 불가능한 것.
• “법칙, 이론, 적용, 기구의 사용을 함께” 포함하며 “개념적, 이론적, 기구적, 방법론적”, 심지어는 “준-형이상학적 공약들(commitments)의 강력한 네트워크”
• “정상과학”은 패러다임 내에서 작업하고, “패러다임 그 자체를 더욱 정교화하는 일들”로 이루어짐.
• 과학혁명은 “하나의 패러다임과 그와 양립 가능하지 않은 새로운 패러다임에 의해 전적으로 또는 부분적으로 교체되는 비축적적인 발전의 일화들”
 
■ [pp. 706-707, 106-108쪽]
- 셰피어는 쿤의 견해가 과학의 본성에 대한 논의를 과학사에 대한 최근의 연구와 더 부합되게 만들어 건전한 영향을 끼쳤음을 인정함.
- 그러나 『과학 혁명의 구조』 초판에 나타난 쿤의 견해는 심각한 비판에 직면함.
- 비판 유형(1): “패러다임”이라는 개념의 애매성
• 패러다임이 과학자가 행하는 모든 것을 포함하는 듯 보이면서, 과학적 전통이 패러다임의 지배를 받는다는 주장이 동어반복(tautology)처럼 되고, 쿤의 풍부한 역사적 분석은 무관하게 됨.
• 개별적인 사례들에서 패러다임을 확인하기 어려움.(쿤은 패러다임이 말로 완전히 표현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표현될 수도 없다고 함.)
• 용어가 애매하여 정상 과학과 혁명적 과학의 구분이 정도의 문제처럼 보이게 됨.
- 비판 유형(2): 상대주의 문제
• 배경 패러다임의 결정적인 역할의 강조는, 객관적인 근거를 토대로 패러다임을 선택하는 합리적 판단 가능성을 부정하는 것으로 보임.
• ‘좋은 이유’라는 개념 자체가 패러다임 의존적인 것이 되었으므로, 새 패러다임을 받아들일 좋은 이유가 있을 수 없음.
• “패러다임의 경쟁은 증명에 의해 판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개종의 경험과 같다.”
• 과학에 대한 객관성과 진보가 거부됨.
• 쿤은 두 패러다임을 통해 보여지는 세계는 너무 다르기 때문에 그들을 비교할 어떤 방안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함.
 
■ [pp. 707-708, 108-111쪽]
- 쿤은 2판에 「후기」를 덧붙이고, 초판에 대한 비판들에 답하려고 시도함.
- 쿤은 패러다임의 의미를 두 가지로 구별함.
• 넓은 의미의 패러다임: 전문분야 행렬(disciplinary matrix)
• 전문분야 행렬의 요소: 기호적 일반화, 형이상학적 패러다임, 가치, 범례
• 이러한 요소들은 초판에서 구분되지 않았지만, “더 이상 하나인 것처럼 다루어지면 안 된다”고 함.
- 비평가들은 ‘패러다임’의 1차적인 의미가 ‘구체적인 퍼즐 풀이’와 관련됨을 알았으므로, 이러한 쿤의 구분은 패러다임 개념이 애매하다고 한 사람들에게 도움이 안 됨.
- 문제점은, 쿤이 ‘‘패러다임’이라는 용어에 의해 망라되는 다른 요소들이 범례들과 어떤 관계를 가짐으로서 더 넓은 의미의 패러다임이 범례들을 통해 학생들에게 전수되는지에 대한 여부를 적절하게 해명하지 않는다는 것.
• 범례들을 통해 더 넓은 의미의 패러다임이 과학적 연구와 판단을 결정하는 방식을 해명하지 않았다는 것.
- 쿤의 원래 주장은 어떤 통일된 관점, 하나의 지배적인 세계관이 존재하며 이것이 과학자들이 무엇을 정당한 문제, 증거, 좋은 이유, 받아들일만한 해답 등으로 간주할지를 결정한다는 것.
- 쿤의 새로운 견해가 전문분야 행렬의 요소들 사이의 구분을 강조하는 것이라면, 초기에 강력하게 주장했던 패러다임의 통합적 성격과 지배적인 위상을 약화시키는 것.
  
■ [p. 708, 111-112쪽]
- 쿤은 상대주의를 초래한다는 비난에 대처하려다 그의 원래 입장을 후퇴시킴.
• “정상 과학의 수수깨끼들 중 대부분은 직접적으로 자연에 의해 제출되며, 나머지 수수께끼들에도 자연이 간접적으로 관련된다.”
• 패러다임 독립적인 객관적 세계(자연)가 존재하며, 그 세계는 패러다임이 해결해야 할 문제들을 제출함.
• 무엇이 과학적 문제로 간주되는가는 적어도 패러다임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고 함.
• “중립적인 관찰자가 가장 최근의 이론과 그 이전의 이론을 구분할 수 있도록 해주는 기준들의 목록을 작성하는 것은 용이하다. 그 중 가장 유용한 기준들은 예측, 특히 양적인 예측의 정확성, [...] 해결된 문제들의 수 등이다. 그 목록은 아직 완전하지 않지만, 완성될 수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리고 그 목록이 완성될 수 있다면 [...] 단일 방향으로의 비-가역적 과정이다. [...] 이는 상대주의적 입장이 아니며 내가 과학적 진보를 확신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 물론 이러한 쿤의 주장은 상대주의의 입장이 아님.
- 그러나 쿤은 초판에서 지식이 영속적으로 증가하는 단선적 과정으로 보는 견해를 비판했으며 과학 혁명에서 일어나는 일을 “표준의 상향 조정이나 하향 조정이 아니라 새 패러다임의 채택과 더불어 일어나는 변화”로 보았음.

  
■ [p. 708, 112-113쪽]
- 쿤은 과학적 탐구를 안내하는 개념적 요소들이 기능면에서 더 다양하고 복잡하며, 개념적 요소들로부터 독립적이면서 그것들을 통제하는 객관적인 요소들의 존재를 믿는 것으로 보임.
• 그러나 쿤이 자기의 옛 견해들 중 다수를 고수하면서 이렇게 온건한 입장을 취하는 것은 일관성이 없음.
• “[...] 그러한 이유들은 가치로서 작용하며 [...] 개인적으로 또는 집단적으로 달리 적용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두 사람이 이론의 상대적 다산성(fruitfulness)에 대해 의견을 달리하거나, 또는 그것에 대해서는 의견을 같이한다 해도 다산성과는 다른, 가령 적용범위의 중요성에 대해 의견을 달리한다면, 어느 쪽도 이론 선택에서 그릇된 것으로 비판 될 수 없다. 어느 쪽도 비과학적이지는 않다.”
- 그러나, 쿤이 여기저기서 제안한 대로, 가치들에 대해 어떠한 제약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결국 두 패러다임 사이에 판단에 대한 이유를 말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 될 것.
• 새 패러다임을 받아들일 ‘좋은 이유들’에 대해 말할 때, 어떤 사람이 ‘가치’의 이름으로 주장할 수 있는 것들을 허용하기 때문.
 
■ [p. 708, 113-114쪽]
- “패러다임 간 공약불가능성이 성립한다면 그들 사이의 경쟁이나 의사소통이 불가능하지 않느냐?”는 비판자들의 주장에 대한 쿤의 반박도 도움이 되지 않음.
• 이는 패러다임이 얼마나 의미와 관점을 결정할 수 있는지에 대해 쿤이 애매한 입장을 취했기 때문임.
- 애매성 때문에 번역에 대한 콰인의 견해나 문제의 어려움을 피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쿤의 제안도 효력을 상실함.
• 쿤의 초판에서의 견해(패러다임이 의미, 가설, 표준을 결정한다는 것)와 콰인의 견해가 정합적이라는 것은 명백하지 않기 때문.
- 신경 자극과 과정, 그리고 의미와 지식과 그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쿤의 이상한 견해는 상황을 더 혼란스럽게 만듦.
• “사람들이 자극을 보는 것은 아니며 그 자극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매우 이론적이며 추상적이다.”, “두 다른 패러다임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 주어지는 자극은 같다.”
• 우리가 자극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패러다임 독립적인지, 패러다임 상대적인지 분명하지 않음. 왜냐하면 쿤은 자극에 대한 우리의 지식을 이론적이라 부르기 때문임.
- 쿤은 패러다임들 간에 공약불가능성이 성립한다는 견해가 그들 사이의 경쟁이나 의사소통이 불가능함을 함축한다는 비판에도 대응하지만 역시 적절하지 못함.
• 쿤은 패러다임들 간의 의사소통과 비교를 허용하면서 초판적인 의미의 패러다임 공약불가능성을 어떻게 유지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데 실패함.
 
■ [pp. 708-709, 114-116쪽]
- 셰플러의 비판 요약
• 쿤에게서 가장 중요한 점들에서는 초기 입장에서 후퇴함.
• 많은 사람들이 문제삼을만한 점에서는 초기 입장을 유지함.
• 초기 입장에서 쿤이 고수한 견해와 달라진 견해 사이의 일관성에 문제가 제기됨.
• 쿤의 현재 견해가 실제로 무엇인지는 분명하지 않음.
- 쿤은 과학이 진보한다고 말하기를 원하는 것 같지만, 그 평가의 근거를 ‘가치들’에 둠으로써 여전히 상대주의에 시달리고, ‘공약 불가능성’과 ‘의사소통 가능성’ 사이에서 갈팡질팡함.
- ‘과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과학자 집단에 주목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고자 하는 쿤의 시도는 셰피어에게 만족스럽지 못함.
  
  
(2020.03.09.)
     

2020/06/23

화제의 명강의에 대한 감상



<교보문고> 홈페이지에 들어갈 때마다 “tvN 화제의 명강의” 어쩌구 하는 광고가 계속 뜬다. 어떤 독문학자가 쓴 책에 관한 광고다. 목차에 따르면, 그 책은 한국과 독일의 사회, 정치, 교육 등을 온갖 것을 다룬다고 한다. 독문학자가 그런 온갖 주제를 다루는데 어떻게 화제의 명강의가 될 수 있었는지 의아했다. 때마침, 아버지가 어떻게 알았는지 그 교수의 강의를 보라면서 식구들을 들볶았다. 나의 아버지처럼 안목 없는 분이 그런 강의에 꽂혔다는 것은 그 강의에 별 내용 없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유튜브에서 강의 몇 개를 찾아서 대충 보았고, 역시나 별 내용은 없었다. 어머니는 강의를 얼핏 보고 “참 한가한 소리나 하고 있다”고 말했다. 사람들이 명강의다, 감명 깊다고 하는 것은, 그들의 지식이 증가했다거나 더 나은 판단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일정 기간 기분이 좋아졌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최근에 한 어떤 인터뷰에서 화제의 명강의의 주인공은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독일도 우리와 비슷했지만 68운동 무렵에 바뀐 거예요. [...] 시키는 대로 외워서 그대로 암송하는 학생이야말로 파시즘적 교육의 이상이자 파시즘의 신민이에요. 한국인들의 모습이 바로 그거 아녜요? SKY로 대표되는 한국의 최우등생들이 대접받으면서 양성된 후 만들어나간 세상이 바로 지금의 지옥 같은 모습이에요. [...] 우병우, 조윤선, 김기춘 등, 소위 서울법대로 대표되는 한국 교육 제도의 최상품들이 한 짓거리를 봐요. 한국 교육이 실패했음을 보여주는 산증인들이에요. 이런 것을 개혁해야만 좋은 사회로 나아갈 수 있어요.”


이런 말은 다음과 같이 정반대로 이야기해도 동등한 설명력을 유지할 수 있다.


“맞고 틀리고는 중요하지 않게 생각하고 아무렇게나 내뱉어도 존중해주는 교육 풍토야말로 도덕적 무정부상태를 조장하고 사회적 가치를 불신하게 만드는 거예요. 오늘날 한국 학생들의 모습이 바로 그런 거 아니에요? 일베나 하고 여성을 비하하고 5.18이 폭동이라고 하는 거 보세요. n번방 박사 조주빈은 창의성, 다양성 타령이나 하던 한국 교육이 실패했음을 보여주는 산증인이에요. 김근태, 박종철, 이한열이 어떤 교육을 받았는지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내가 바꾸어 말한 것이 개소리인 것 같은가? 어차피 원래의 인터뷰 내용도 아무 근거 없이 주장하고 싶은 내용을 주장했을 뿐이다. 근거 없이 아무 말이나 하는 것은 둘 다 다르지 않다.

독문학자가 독일의 사회, 정치, 교육 등 전공과 무관한 분야에 대해 말하면서 어쩌면 그렇게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 있게 단정적으로 말하는지 신기했다. 남몰래 사회과학을 공부했을 가능성을 열어둔다고 하더라도 어쩌면 저렇게 근거는 하나도 없이 주장만 하는 것인가. 사실, 독문학자가 독일 정치에 대해 무슨 강연을 한다는 것부터가 이상한 일이다. 국문학자가 한국 정치나 사회나 교육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한다고 생각해보자. 그 말을 얼마나 믿을 수 있는가? 그런데 이미 그러고 있었다.

내가 신문을 따로 찾아 읽는 것은 아니지만, 어쩌다 보게 되는 칼럼 중에서 문학 쪽 종사자들이 쓰는 칼럼 중 상당수는 문제가 있는 글이었다. 아무 내용 없이 하나마나한 소리나 하거나, 간장 선생처럼 무슨 사안이든 똑같은 이야기나 하거나, 근거 없이 아무 말이나 한다. 꼭 『삼국지연의』에 심취한 아저씨들이 전쟁에 관하여 논하는 것 같다. 나본과 모본의 차이점을 알든 말든, 『삼국지평화』가 연의의 성립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알든 말든, 그래서 그들이 전쟁에 대해 뭘 아느냐는 말이다. 그런 소설을 많이 읽다 보면 뭔가 고대 중국 전쟁에 대한 지식이 생긴 것 같은 착각이 들 수도 있다. 그래봤자 실제 전쟁은 그런 식으로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 아저씨들이 전쟁에 대해 말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들이 전략을 아는가, 전술을 아는가, 전투를 아는가, 보급을 아는가?

(물론, 조선 후기 문학을 전공한 선생님이 조선 후기 역사도 연구하다가 유사-역사학자를 이겨버린 일도 있다. 청대 소품문 연구하다가 고증학에도 손대다가 논어 주석서를 낸 선생님도 있다. 그런데 그런 분들은 인접 분야에 한 말씀하셔도 되는데 말씀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차라리 <간장 한 종지>처럼 약간의 문학성이라도 있으면 모르겠다. <간장 한 종지>에는 찌질한 중년 남성의 내면을 엿볼 수라도 있지 않은가. 그런데 문학 종사자들이 무분별하게 쓰는 칼럼들에는 그러한 문학성도 없다. 살림도 어려운 신문사들이 왜 그런 글에 지면을 할애하는지 모르겠다.

한국 문학이 어렵다고 한다. 그러면 문학 걱정이나 할 일이지 왜 알지도 못하는 분야에 에너지를 투입하는가? 그것이 그들의 선량한 마음 때문이라면, 우리는 그들이 아무 것에나 아무 말이나 해서 사회적 비용을 높이지 않게끔, 그리고 그들이 본의 아니게 그들과 관련 분야의 사회적 위신을 떨어뜨리지 않게끔 도와주어야 할 것이다. 실력 있는 사회과학자들의 적극적인 사회 참여가 필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 자신의 전문성을 살려서 칼럼도 쓰고 전문가 인터뷰도 하고 자문도 해서, 대중들에게 많이 노출되어야 한다.

사회과학자들의 적극적인 활동을 통해 비-전문가들의 어쭙잖은 의견을 비판하고 물리치자는 것이 아니다. 아예 처음부터 비-전문가들이 어쭙잖은 의견을 내세우고자 하는 생각조차 들지 않게끔 하자는 것이다. 의욕이 꺾이면 우울감이 오지만 아예 처음부터 생각 자체가 안 들면 마음의 평온함을 유지할 수 있다. 마음씨 좋은 사람들이 불필요한 번뇌에 시달리지 않고 평온한 마음으로 연구에 열중할 수 있게끔, 사회적인 관심과 지원이 필요하다.

(2020.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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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하게 해주세요. 교수되게 해주세요. 결혼하게 해주세요. ​ ​ ​ ​ ​ * 링크: [알라딘] 흰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소설 ( 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43220344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