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2/16

미래 인문학



나는 과학도 모르고 철학도 모르면서 과학철학을 전공하겠다고 대학원을 왔다. 과학철학 하겠다고 대학원 오는 사람은 대체로 철학을 잘 몰라도 과학을 잘 알든가, 과학을 잘 몰라도 철학을 잘 알든가, 둘 다 잘 안다. 아무 것도 모르면서 대학원에 오는 미친놈은 나 말고는 못 봤다. 나는 왜 그랬나? 여기에는 가슴 아픈 사연이 있다.

대학원 와서 불벼락을 맞고 회심하여 지금은 새 삶을 살고 있지만(이를 두고 “아카데미즘의 승리”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대학교 때만 해도 나는 진중권처럼 이상한 놈들이나 대충 욕하면서 편하게 먹고 살면 좋겠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개나 소가 욕을 해서는 아무도 들을 체를 안 해준다. 똑같은 말이라도 권위가 실리면 사람들은 멋도 모르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권위는 어디에서 오는가? 권위는 학위에서 온다. 그렇게 대학원에 가기로 마음먹었다. 항상 그렇듯이 재앙은 어리석음에서 비롯된다.

대학원에 지원하려면 자기소개서를 써내야 했는데 자기소개서 항목 중에 대학원에서 무엇을 전공할지 밝히라는 부분이 있었다. 대학원에서 다 가르쳐주는 게 아니었다니, 나는 학부 때 배운 것도 없고 공부한 것도 없는데 대학원 들어갈 때 전공을 정해야 한다니. 어떻게 하면 좋을지 학부 동기한테 물어보았다. 내 상황이 하도 막장이라 답이 안 나왔다.

답이 안 나오자 나는 여느 때처럼 동기한테 실없는 소리나 하며 시간을 보냈다. 나는 그 날도 미친놈들 흉내를 냈다. 그 날 한 것은 눈에 보이는 모든 사물에 ‘철학’을 붙이는 놀이였다. 개도 철학, 소도 철학, 다 철학, 그러면서 놀고 있었는데, 왜 그랬는지 내가 ‘경제 철학’이라는 말을 내뱉었다. 그러자 그 동기는 이렇게 말했다. “듣자 듣자 하니 못 들어주겠네. 미친놈아, 경제 철학이 어디 있어?” 사실, 나도 별다른 생각 없이 막 지껄인 것이었다. 그런데 네이버에서 찾아보니 경제 철학이라는 것이 정말 있었고 과학철학의 한 분과라고 했다. 그 때 나는 결심했다. “그래, 경제 철학이다.” 동기가 옆에서 말렸다. “미친놈아 적당히 좀 해. 네가 교수면 경제 철학 한다고 하는 놈을 받아주겠냐? 딱 봐도 정신 나간 소리인 것 같은데?”, “그래? 그러면 그냥 과학철학 한다고 하지 뭐.” 그렇게 나는 과학철학 전공자가 되었다. 그리고 석사 논문을 경제학에서의 과학적 실재론에 관련해서 썼다. 사례로 국제경제학의 중력 모형도 나온다.

얼마 전에 내가 다녔던 학부에서 ‘미래 인문학’이라고 하는 것이 다룬다는 소식을 들었다. 미래 인문학? 그러면 역사학은 과거 인문학인가? 무슨 말을 하는지 궁금해서 찾아보았다. 홍보자료를 보니 아무 사물에나 ‘철학’을 붙이면서 미친놈들 흉내 내던 학부 때가 기억나서 나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저 사람들은 여전히 재미있게 사는구나 싶었다.








(2016.12.16.)


2017/02/15

재승박덕



동료 대학원생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내가 “재승박덕”이라는 단어를 썼다. 동료 대학원생이 물었다.

- 대학원생: “그런데 재승박덕이 무슨 말이죠?”

- 나: “재주가 뛰어나지만 덕이 없다는 말입니다.”

- 대학원생: “덕이 무슨 뜻이죠? 탁월함 같은 건가요?”

한문을 잘 모르더라도 한국어가 모국어인 사람들은 ‘덕’이라는 말을 들으면 대강 어떠한 이미지가 떠오르기 마련이다. 하지만 동료 대학원생은 중세철학 전공자다. 고대철학이나 중세철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은 어느 시점부터 덕을 德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arete의 번역어로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 나: “여기서 덕은 arete가 아니고 동아시아적 맥락의 덕이죠.”

- 대학원생: “아, 도덕적 탁월성이네요!”

고대철학 선생님이나 중세철학 선생님들 중에는 한국어를 사용하기는 하는데 어순만 한국어인 분들이 있다고 한다. 그 선생님들이 사용하는 단어는 한국어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고대 그리스어나 라틴어의 번역어라는 것이다. 일종의 파일 덮어쓰기와 비슷하다.

이러한 덮어쓰기 때문에 수업 중에 학부생들이 혼란에 빠지는 일도 있다. 선생님들은 나름대로 쉽게 설명하려고 덕, 지혜, 사랑, 용기 같은 단어가 일상생활에서 어떠한 뜻으로 사용되는지 예를 들어 설명한다. 그런데도 학생들이 혼란에 빠지는 이유는, 그 일상생활이 21세기 한국인의 일상생활이 아니라 기원전 5세기 그리스인의 일상생활이기 때문이다.

(2016.12.15.)


2017/02/14

화천이도 어미가 되니



화천이한테 밥을 주면 화천이 새끼들이 빼앗아 먹는다. 고양이 마릿수만큼 밥그릇을 놓았고 똑같은 사료를 똑같은 양으로 주는데도 화천이 새끼들은 화천이 밥을 빼앗아 먹는다.

눈노란놈과 눈파란놈은 자기 밥그릇에서 자기 밥을 몇 입 먹다가 다 먹지도 않고 화천이 밥그릇에 머리를 들이민다. 화천이는 눈노란놈과 눈파란놈이 자기 밥을 빼앗아 먹는 것을 멀건이 보기만 한다. 어차피 밥그릇은 세 개니까 화천이 새끼들이 화천이 밥을 먹는 동안 화천이가 새끼들 밥을 먹으면 되는데, 화천이는 그렇게 하지 않고 자기 밥을 먹는 새끼들을 보기만 한다. 화천이 새끼들은 화천이 밥을 다 먹고 나서 자기 밥그릇에 있는 사료를 마저 먹는다. 새끼들이 하도 화천이 밥을 빼앗아 먹으니까, 어머니는 고양이 밥을 줄 때 화천이 옆에 붙어서 화천이 새끼들이 화천이 밥을 못 먹게 지킨다.

화천이는 어려서 어른 고양이들이 있거나 말거나 제 마음대로였다. 이제는 화천이가 새끼들 눈치를 본다. 크게 울지도 않는다. 현관문을 열면 화천이의 두 새끼들이 “아-아앙 우아-앙” 하고 시끄럽게 울면 화천이는 구석에서 “에-에옹” 하고 조용히 운다. 화천이도 어미가 되어서 그런 것인가?

지난 주말에도 화천이는 새끼들이 자기 밥을 빼앗아 먹는 것을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었다. 한참 가만히 있다가 대문 밖으로 나갔다. 그러고는 검은 털에 반질반질 윤기가 흐르는 두더지 한 마리를 잡아왔다.

(2016.12.14.)


2017/02/13

저작 구상 - 과학 입문서, 철학 입문서



한국에서 과학 교양서적이라고 하면 수박 겉핥기식으로 하는 것이 대부분이라서, 과학에 관심이 있지만 공부할 엄두를 못 내는 문과생들에게 별다른 도움이 안 된다. 고등학교 문과 수준에서 시작해서 하나씩 읽고 소화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연대 학부생 1, 2학년 수준에 도달할 수 있게 하는 책이 있었으면 좋겠다. 내가 그런 책을 쓰게 된다면 책 제목을 『과학의 쓴맛』이라고 붙일 것이다.

이과생을 위한 철학책이 있어도 좋을 것 같다. 이과생들이 하는 작업에서 시작해서 철학적 논의로 자연스럽게 넘어가는 책이다. 내가 그런 책을 쓰게 된다면 책 제목을 『철학의 쓴맛』이라고 붙일 것이다.

(2016.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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