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8/22

왜 개소리에 대응하기 어려운가? - 한남충 보이루 논문 사태를 중심으로



윤지선 박사가 유튜버 보겸에게 명예훼손으로 5천만 원을 배상해야 한다는 1심 판결이 나왔다. 죄목이 철학을 욕보인 죄나 페미니즘을 더럽힌 죄가 아니라 명예훼손이라는 점이 아쉽기는 하지만, 어쨌든 쌤통이다. 그러나 윤지선 박사는 이번 판결로 인해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이를 계기로 더 활발하게 활동할 것이다. 아마도 윤지선 박사는 학문적 자유가 탄압받고 여성의 권리가 침해받고 있다며 트위터 부흥회를 열 것이고, 보겸에게 배상해야 한다면서 호구들에게서 돈을 뜯어낼 것이다.

윤지선 박사의 관음충 논문 사태가 보여준 것은, 그러한 미친 논문이 일단 학술지에 게재되기만 하면 이후에 학계에서 정상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한 분야에 미친 박사가 네 명만 있으면, 미친 논문의 게재는 그리 어렵지 않게 된다. 한 명은 투고하고 나머지 세 명이 심사위원을 하면 되기 때문이다. 네 명도 필요 없다. 세 명만 있어도 된다. 한 명은 투고하고 나머지 두 명이 심사위원을 하면, 게재가 둘에 게재불가 하나를 받아 심사를 통과할 것이다.

한국연구재단이 올해 3월 관음충 논문의 게재 철회를 지시한 것도 연구 윤리를 위반했다는 이유에서였지 연구가 아니라는 이유에서가 아니었다. 대놓고 표절을 하거나 왜곡・날조하지 않는 이상 게재된 논문을 게재 철회할 방법은 사실상 없다. 만일 윤지선 박사가 그 논문에서 조금만 덜 까불었다면, 온갖 미친 소리를 늘어놓더라도 특정인만 언급하지 않았다면, 아무런 공적인 제재를 받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그의 언니인 윤김지영 박사가 국립창원대 교수가 된 것처럼, 윤지선 박사도 정식 교수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학계에서는 미친 논문에 대응하기 힘든 것은, 정상적인 논문에 대응하는 것이 정규전이라면 미친 논문에 대응하는 것은 게릴라전과 같기 때문이다. 어떤 절차를 거쳤든 미친 논문이 일단 학술지에 게재되기만 하면, 그렇게 게릴라들에게 근거지를 내어준다면, 그 다음에 할 수 있는 것은 게릴라전밖에 없다. 철학 정규군이 얼마나 철학 실력이 뛰어나든, 얼마나 좋은 학술지에 논문을 게재했든, 어디에서 누구에게 학위를 받았든, 게릴라전에서는 모두 무용지물이다.

내가 알기로, 관음충 논문에 대한 철학자들의 정식 대응은, <교수신문>에서 벌어진 논쟁과 이준효 선생님의 논문인 「페미니즘과 테러리즘」 정도이다. 그러한 대응을 살펴보면, 윤지선 박사의 논문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정규군과 비슷한 반면, 윤지선 박사는 산 같은 데 숨었다가 갑자기 튀어나와서 소총 몇 방 쏘고 다시 산으로 달아나는 게릴라와 같음을 알 수 있다.

2021년에 벌어진 <교수신문>에서의 논쟁은 쟁점 정리 두 편을 포함하여 총 열한 편으로 구성된다. 너무 길기 때문에 다음과 같이 짧게 줄여서 보는 것이 좋겠다.

(1) 이충진: 논의가 타당할 뿐 아니라 건전하려면 소전제가 참이어야 하는데, 이걸 입증하지 못하니까 그냥 혐오 표현 쓴 것 같은데?

(2) 윤지선: 내 연구의 목적은 성착취 범죄 시스템을 저지하는 것이고, 우리 모두 디지털 성 착취 시스템에 비판적으로 개입해야 함. 그리고 나는 혐오 안 했음.

(3) 이충진: 그래, 유와 종 개념으로 따져보자. ‘남자’는 유개념이고 ‘한국 남자’가 종 개념이잖아? 그러면 당신 주장이 맞으려면 디지털 성 착취는 한국남자에게서 발견되면서 동시에 모든/대부분 비-한국 남자에서 발견되지 않아야 하잖아? 그런데 그런 연구 했어? 안 했잖아?

(4) 윤지선: 한국 사회에서 디지털 성 착취 시스템은 일상화된 거 몰라? 해외 언론에서도 보도했잖아. 내 논문 비판하는 건 반-지성주의 파시즘이야. 몇몇 분석용어 논란으로 전체 내용을 폄하하지 말고 내 논문 서론 첫 줄을 꼼꼼히 읽어라.

(5) 쟁점 정리: (i) ‘보이루’ 각주 수정한 철학연구회의 대처는 적절했나? (ii) ‘한국남성성’에 대한 논증 방식은 엄밀했나? (iii) 혐오 표현을 동원한 논의가 학문의 이름으로 허용될 수 있는가?

(6) 이동규: 아오, 내가 학부생이지만 도저히 못 보겠다! 네 논문 비판하면 파시스트냐? 학문의 자유가 마법의 주문이냐?

(7) 이충진: 그래, 사람들이 네 논문 보고 곤충학이 왜 들어갔냐, 왜 쓸데없이 철학자는 죄다 들먹이냐고 비판하던데 나는 그런 말 안 할게. 그런데 최소한의 내적 통일성도 없는 게 논문이냐?

(8) 가톨릭대: 윤지선의 논문은 연구부정행위 아니다.

(9) 최성호: 윤지선의 논문은 연구 부정이 없다는 거지 연구 가치가 있다는 게 아니잖아. 그런데 <철학연구회>는 제정신이냐? 이런 저질 잡문을 논문이라고 실어?

(10) 윤지선: 연구 가치가 없다고? 논문 인용구도 없고 논거 반박도 없이 ‘저질, 잡문, 학문적 수준결여’? 너 프랑스 철학 알아? 나 파리 8대학에서 들뢰즈 연구로 박사 받은 사람이야!

(11) 최성호: 학계 문제가 하루이틀 일도 아니고... 말을 해도 알아먹는 것도 아니고... 아오, 안 해!

소전제가 거짓이라는 비판에 대한 정상적인 대응은 소전제가 참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용어를 모호하게 사용했다는 비판에 대한 정상적인 대응은 용어가 정확히 어떤 뜻인지 정리하는 것이다. 윤지선 박사는 어떻게 대응하는가? 우리 모두 디지털 성 착취 시스템에 비판적으로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누가 그러지 말자고 했나? 누구는 디지털 성 착취를 해서 윤지선 논문을 비판하나?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말이 되든 안 되든 주저리주저리 답변만 하면 되는 것이다.

정규군은 수도가 점령되거나 주요 거점을 빼앗기면 항복하지만, 게릴라는 그러든가 말든가 산 속에서 튀어나와서 “내 총을 받아라. 두두두두!” 하고 도망간다. 보급도 걱정 없다. 개소리만 들으면 동공이 풀리는 개소리 매니아들이 지원해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개소리 게릴라는 실제 게릴라전에서와 달리 죽지 않으니까 철학 정규군과의 대결에서 조금도 밀리지 않고 맞대응할 수 있다. 아무 말이나 계속 이어서 지껄이면 적어도 겉보기로는 동등한 싸움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준효 선생님의 논문인 「페미니즘과 테러리즘」도 게릴라전에 대응하는 정규군의 고충을 보여준다. 해당 논문은 윤지선 박사 등이 전제로 하는 비-대칭성 논제(약자에 대한 혐오 표현은 정당하지 않지만 강자에 대한 혐오 표현은 정당하다)가 틀렸음을 보인 뒤 여성에 대한 혐오 표현뿐만 아니라 남성에 대한 혐오 표현도 무고한 사람에 대한 공격을 포함하므로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나는 해당 논문의 논변에 약간의 의구심이 있기는 한데, 하여간 해당 논변이 다 맞다고 해도 윤지선 박사의 논문에 대한 결정적 비판은 될 수 없다. 윤지선 박사의 논문에서 혐오 표현이 사용되었다는 것은 논문의 결함 중 극히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논쟁이 될만한 부분을 좁히고 좁혀서 겨우 찾은 것이 강자에 대한 혐오 표현 사용이 정당하냐는 것이다. 윤지선 박사의 논문이 똥이라는 학계의 광범위한 합의가 있다고 한들, 그런 내용으로 학술대회를 열 것인가, 논문을 써서 멀쩡한 학술지에 실을 것인가?

주요 거점을 타격하는 철학 정규군의 공격 방식은 개소리 게릴라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입히지 못한다. 애초에 게릴라들의 논문에는 뒤집힐 논변이 있는 것도 아니고 사실에 근거한 주장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아무리 신묘한 논변을 가져온다고 한들 간단하게 반박하기 힘들다. 어휘력 자랑과 실험적인 문장 생산의 결과물을 두고 무슨 논박을 벌일 것인가? 그래서 개소리 게릴라를 잡는 방법은 실제 게릴라를 잡는 방법과 비슷할 수밖에 없다. 온 산에 네이팜탄을 퍼붓듯이 한 문단씩 다 조져야 한다. 이는 실제로 어느 정도 효과가 있는 방법이다. 내가 개소리 매니아를 대상으로 몇 번 해본 적이 있는데, 전부는 아니더라도 한 문단씩 짚어가며 몇 문단을 조지면 풀린 동공이 다시 돌아오는 게 보였다.

개소리 게릴라들에게는 매우 간단하게 말할 것도 온갖 쓸데없는 것들을 덧붙여서 길게 말하는 버릇이 있는데, 이러한 버릇은 공격을 회피하는 기능을 가지는 것으로 보인다. 정당한 비판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그러한 기술을 연마한 것은 아닐 것이고, 수많은 개소리 게릴라전을 거치며 자연스럽게 습득한 기술일 것이다. 한정된 지면에서 승부를 보는 철학 정규군들로서는 이러한 회피 기술을 돌파하기 힘들다.

<교수신문> 논쟁에서 윤지선 박사가 보여준 대응 방식은 전형적인 개소리 게릴라들의 방어 전략을 따른다. 용어를 잘못 사용했다고 지적하면 전체 내용을 모르니까 그런 소리 한다고 하면 되고, 내적 일관성이 없다고 지적해도 초록 한 줄만 읽어봐도 알 텐데 왜 그러냐고 하면서 설명 안 하면 되고, 논리 비약이 있다고 지적해도 전후 맥락을 모르니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것이라고 하면 되고, 논문이 별 내용도 없으면서 쓸데없이 길기만 하다고 불평해도 그만큼 내용이 충실하니까 꼼꼼히 다 읽어보라고 하면 되고, 논문이 너무 긴데 도대체 핵심 내용이 뭐냐고 물어봐도 내 논문은 한국 사회의 디지털 성 착취를 신-물질주의(신-유물론)의 관점에서 해석한 획기적인 연구라고 하면 된다. 도대체 어떤 점에서 획기적인 연구인가? 일단 논문부터 다 읽고 오라고 하면 된다.

윤지선 박사가 관음충 논문에서 동원한 신-유물론은 거의 전략 물자라고 볼 수 있다. 일단 신-유물론이 무엇인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매우 드물기 때문에, 누가 논문에 대해 정당한 비판을 하더라도 “나는 신-유물론을 알지만 너는 모르니 설명해봐야 알아듣지 못한다”면서 설명을 개떡같이 하면서 우라지게 길게만 말하면 된다. 설사 신-유물론에 정통한 사람이 윤지선 박사를 비판한다고 한들, 그리고 내용 면에서 윤지선 박사가 일방적으로 밀린다고 한들, 윤지선 박사가 말이 되든 안 되든 쉬지 않고 주절주절 지껄이기만 한다면, 문외한들에게는 두 사람이 대등한 논쟁을 벌이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래서 개소리 게릴라전은 쉽게 끝나지 않는다.

윤지선 박사의 관음충 논문에 걸맞는 대응은 제한된 지면에 압축적으로 논문의 결함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한 문단 한 문단씩 조지는 것이어야 했다. 무엇이 철학이고 무엇이 철학이 아닌지도 분간 못하는 주제에 존재론, 형이상학, 인식론 같은 단어나 들먹이는 사람들이 땡깡을 부린다고 해도, 한 문단씩 조져서 보여주면 무력화 할 수 있다. 굳이 전문 연구자가 시간을 들일 필요도 없고 정상적인 학부생이 여가활동으로 했어도 되는 일이다.

그런데 누가 한 문단씩 조지고 있겠는가? 연구 실적으로 인정받는 것도 아니고 돈을 받는 것도 아니고, 시간만 우라지게 들고 명예롭지도 않은 일을 누가 하겠는가? 똥이 왜 똥인지 설명해야 하는 일을 누가 일삼아 하겠는가? 정상적인 교수라면 그러고 있을 시간이 없을 것이고, 정상적인 판단 능력이 있더라도 학위가 없는 사람이라면 학위도 없는 게 프랑스 철학 박사한테 까분다고 욕이나 먹을 것이다. 현역 군인이 휴식시간에 해도 되는 일이기는 하겠지만, 아무리 멀쩡한 소리를 해봐야 개소리 매니아들에게 학부 졸업이나 하라고 욕이나 먹을 것이다. 그러니 개소리 게릴라들이 서로 연관도 없고 따로 떼어보아도 말이 안 되는 이야기를 쉬지 않고 덧붙이며 주둥이나 삐쭉거리는 것을 쉽게 제압할 수 없는 것이다.

* 링크: [연합뉴스] ‘보이루 논란’ 교수, 보겸에 5천만원 배상 판결

( www.yna.co.kr/view/AKR20220621106500004 )

(2022.06.22.)


2022/08/21

매실나무 구상



작년에 심은 매실나무에서 열매가 열렸다. 매실나무를 받을 때 신품종이라서 계란 초란만 한 매실이 열린다는 말을 듣고는 반신반의했는데, 초란까지는 아니더라도 기존에 있던 매실나무의 열매보다는 훨씬 큰 열매가 열렸다. 작년에 밭과 농로의 경계에 심은 매실나무가 서른 그루 약간 안 되는데, 장기적으로는 밭 둘레 삼면을 매실나무로 둘러싸고 밭에는 체리나무를 심을 생각을 하고 있다.







2년 전에 아버지가 직장 동료와 함께 밭에 체리나무 115그루를 심었는데, 그 중 열 그루 정도만 남고 모두 죽었다. 나무가 약한 것인가, 심기를 잘못 심은 것인가? 10년 전에는 아버지가 어떤 침엽수 종류를 밭에 50그루 심었다가 두 그루만 살고 다 죽은 일이 있으니 아무래도 아버지와 동료가 체리나무를 잘못 심은 것 같기는 하다. 그래도 체리나무를 키워보니 그렇게 강한 나무가 아니라는 것은 알겠다. 왜 체리가 비싼지 알 것 같다. 체리나무가 아로니아나무나 블루베리나무처럼 잘 자랐으면 진작에 체리 가격이 10분의 1로 떨어졌을 것이다. 나는 아버지처럼 100그루씩 심지는 않을 것이고, 남은 열 그루를 키우다가 잘 자라면 나무 수를 늘릴 생각이다.

내가 농부가 되려고 나무 심을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고, 부모님 노후 대비와 관련되어 구상하는 것이다. 어머니는 현재 요양보호사를 하고 있는데, 1959년생인 어머니가 언제까지고 요양보호사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몇 년 안에 다른 일을 해야 할 것이다. 그냥 노시라고 하면 좋겠으나 집에 돈도 없고, 웬만큼 늙더라도 어차피 100세 시대라서 더 일해도 된다. 자식이 부모를 믿고 놀면 약해지는 것처럼, 부모도 자식을 믿고 놀면 약해진다. 지나친 효도는 부모를 약하게 만든다.

그렇다고 어머니께 중노동을 시킬 수는 없고 건강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농장 관리를 하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 전문적으로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작게 하는 것이면 괜찮을 수도 있다. 적어도 어머니가 밭농사를 짓는다고 하면서 얼마 되지도 않는 소출을 얻으려고 호미를 들고 죽네 사네 하는 것보다는 건강에 낫지 않겠는가 생각하고 있다.

아버지께는 나무에 손 대지 말고 그냥 노시라고 할 생각이다.

(2022.06.21.)


2022/08/20

[한국 가요] 서지원 (Seo Ji Won)

서지원 - 내 눈물 모아

( www.youtube.com/watch?v=E_NLPqhbOLQ )

(2022.10.01.)

나무 옮겨심기

집 안에 축대를 다시 쌓아야 하는 상황이다. 축대를 다시 쌓으려면 흙을 파내야 하고, 흙을 파내면 나무를 일부 건드려야 한다. 아버지가 무분별하게 나무를 심어서 몇 그루 옮기기는 옮겨야겠다고 예전부터 생각은 하기는 했는데, 지금은 여름이다. 여름은 나무를 옮겨심기 어려운 계절이다. 여름에는 묘목도 팔지 않는다. 그런데 장마가 오기 전에 축대를 다시 쌓아야 한다. 일단 한 그루만 옮겨 심어보기로 했다.

방법은 간단하다. 뿌리가 드러나지 않도록 통째로 파내면 된다. 통째로 옮기면 여름이어도 나무는 살 수 있다. 통째로 옮기는 것이 어려워서 날씨가 약간 쌀쌀할 때 나무를 심는 것이다.

삽으로 구덩이를 팠다. 나무 주위를 돌면서 계속 흙을 파내다 보면 뿌리를 통째로 떠낼 수 있다. 나무를 옮기면서 뿌리 주위에 붙은 흙이 떨어지면 나무가 말라 죽을 수 있으므로, 비료 포대 두 개를 가위로 잘라서 넓게 펴서 흙덩어리를 둘러싸고 고무줄로 빙빙 감았다. 그걸 외발수레에 싣고 옮겨서 다른 장소에 심는 것이다.

어떤 식물이든 땅에서 뽑으면 이후에 죽들 살든 일단은 시들시들해지기 마련이다. 내가 옮겨심은 나무는 통째로 옮겼기 때문에 내내 잎에 힘이 있었다. 나는 나무를 옮겨심느라 죽네 사네 하며 힘을 다 뺐지만, 다행히 나뭇잎에는 힘이 있었다.

(2022.06.20.)

화천이와 연동이의 빈자리

여름에 연동이가 집을 나간 뒤 몇 달 간 우리집에는 고양이가 없었다. 고양이가 없으니 금방 빈자리가 드러났다. ​ 창고에서는 쥐가 페트병에 담긴 쌀을 먹으려고 페트병을 쏠았다. 페트병에 구멍이 뚫려서 쌀이 줄줄 샜다. 땅콩을 캐서 창고 구석에 두었더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