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2/04

고양이와 산책하기



아침에 일어나서 대문 밖에 나서니 고양이들이 쫄래쫄래 따라 나왔다. 따라오라고 해서 고양이들이 따라오는 것은 아니다. 고양이들은 따라오고 싶을 때만 따라온다.

일단 고양이들이 따라오기 시작할 때 계속 따라오게 하려면 걷다가 중간중간 멈춰서 뒤를 쳐다보아야 한다. 고양이들은 그렇게 해야 따라온다. 뒤도 안 돌아보고 계속 걸으면 고양이는 안 따라온다. 고양이들도 다른 고양이보고 따라오라고 할 때 그렇게 한다. 몇 걸음 가다가 멈추어서 뒤를 돌아보고, 안 따라오거나 다른 곳으로 가면 따라오라고 부르고, 그렇게 해서 따라오면 다시 몇 걸음 앞서가서 또 뒤를 돌아본다.







내가 특별한 일이 있어서 대문 밖으로 나온 것은 아니었고 그냥 아침 먹기 전에 집 근처를 걸어 다닌 것이었다. 내가 정돈한 길을 따라 걸으면서 나무는 잘 있는지, 말뚝은 그대로 있는지 살펴본다. 당연히 잘 있다. 고양이들은 원래 일하지 않으니까 걔네들도 특별히 일이 있어서 나를 따라나온 것은 아니다.

길에 토끼풀이 많다. 토끼풀이 대기 중의 질소를 땅에 고정시킨다고는 하는데, 길에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에, 농부들은 농로에 제초제를 주어서 풀을 없애고 땅을 단단하게 만든다. 그래도 토끼풀은 생명력이 질겨서 다른 풀이 다 시들도록 시들지도 않는다. 농부들이 제초제를 안 주니 농로에 남은 풀만 남는다. 나는 예전에 제초제를 안 쓰고 토끼풀을 없앨 방법으로 토끼를 풀어놓는 것을 잠시 고려한 적이 있었는데, 토끼들이 토끼풀만 먹는다는 보장이 없어서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 번식력이 대단한 토끼들이 동네방네 퍼져나가서 농작물을 뜯어먹게 된다면, 아마도 우리 동네에서 토끼 키우는 아저씨가 토끼를 잘 관리하지 못했다고 뒤집어쓰게 될 것이었다.

하여간, 이런 사정을 알 리 없는 고양이들은 토끼풀을 밟는 촉감이 이상한지 폴짝폴짝 뛰듯이 걸었다. 나를 따라오던 화천이 새끼는 어느새 나보다 몇 걸음 앞서가서 뒤돌아보았고, 화천이는 천천히 내 뒤를 따라오다가 내가 뒤돌아보면 총총총 뛰어왔다. 따라오다가 내가 옮겨 심은 배나무를 발톱으로 긁기도 했다.






그렇게 나는 고양이들과 길 끝까지 같이 갔다. 내가 만든 안내문 근처에서 화천이 새끼는 이리저리 뛰어놀았고 화천이는 길 끄트머리에 앉아 주위를 여유롭게 둘러보았다.







내가 집에 돌아가려고 하자, 고양이들은 나보다 앞서 나가서 집으로 향했다. 내가 집에서 나올 때는 내가 어디로 갈지 고양이들은 몰랐겠지만, 내가 집으로 돌아갈 때 고양이들은 내가 어디로 갈지 알아서 그랬을 것이다.






(2021.12.04.)


2022/02/03

고인돌은 어떻게 옮겼을까?



코로나19 이후에 집에 있는 시간이 늘면서 집에서 잡다한 일을 점점 많이 하게 된다. 내가 대학원생인지 자연인인지 모르겠다.

구찌뽕 나무 근처에 있는 잡목을 정리하다가 향나무 가지치기를 했다. 언제부터 그 자리에 있었는지 모르는 오래된 향나무인데, 누가 심었는지, 왜 심었는지도 모른다. 남의 집에 있는 나무면 내가 손을 안 댈 텐데 경계선에 어중간하게 있는 나무라서 결국 내가 손을 댔다. 가지치기를 하고 어머니한테 보여드렸더니 “이제 나무 꼴이 됐네”라고 하셨다. 그 전에는 잔가지가 많아 밤송이처럼 보였다.





창고에서 못 쓰는 각목을 정리했다. 각목이 멀쩡한 상태로 있으면 정리하기 편할 텐데 비닐하우스 같은 데 쓰려고 했던 것인지 못으로 여러 각목을 붙여놓거나 긴 각목에 토막 난 각목을 붙여놓은 것이 창고에 가득 있었다. 도끼로 각목을 쳐서 긴 각목에 붙은 토막 난 각목을 떼어내고 부스러기만 불에 태웠는데도, 하도 많아서 하루종일 태웠다. 나중에 가래를 뱉었더니 검은 가래가 나왔다. 그제서야 공업용 마스크를 쓰고 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일 하고도 전체 각목 중 3분의 1밖에 정리하지 못했다. 아마 캠프파이어를 두세 번쯤 할 수 있는 양일 것이다.

경계석도 옮겼다. 원래는 아버지가 심은 것이었는데 측량을 해보니 아버지가 경계석을 잘못 심었음을 알게 되었다. 결국 내가 1미터 정도 옮겨서 다시 심었다. 아버지는 아마도 포크레인으로 경계석을 심었을 것 같은데, 나는 그냥 삽으로 파서 옮겨 심었다. 내가 삽으로 땅을 파고 있으니까 지나가던 할머니가 나보고 “포크레인으로 하지 왜 삽으로 파느냐?”고 물었다. 나는 삽으로 파서 될 일이라고 생각해서 삽으로 팠는데 할머니가 보기에는 포크레인으로 할 일로 보였나 보다.

나는 경계석을 옮기는 김에 위아래를 바꾸어서 심으려고 했다. 경계석 위쪽에는 흠집이 약간 있으니 경계석의 위아래를 바꾸면 흠집이 없는 경계석 아래쪽이 위로 올라올 것이었다. 돌이 꽤나 무거워서 번쩍 들어올릴 수는 없었지만 돌을 눕히거나 한쪽을 들어올리는 것은 가능했다. 그래서 땅을 적당히 파고는 돌을 눕혔다 굴렸다 엎었다 다시 들었다를 반복해서 돌의 위아래를 바꾸어 심었다.





나는 경계석 옮긴 사진을 동료 대학원생에게 보여주고 어떻게 일을 했을 것 같으냐고 물었다. 동료 대학원생은 고인돌을 옮기는 것처럼 통나무를 밑에 깔고 옮겼을 것 같다고 답했다. 동료 대학원생의 말을 듣고 어렸을 때 학습 만화 같은 데서 보았던 그림이 떠올랐다. 고인돌을 만들 때 밑에 통나무를 깔고 굴려서 고인돌의 윗돌을 옮겼을 것이라는 그림이다. 그런데 그렇게 했을 리가 없다. 어렸을 때는 모르니까 학습 만화를 보고 그런가 보다 했는데, 내가 집에서 일하다 보니 그런 식으로 돌을 옮길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식으로 일을 하려면 몇 가지 조건이 맞아떨어져야 한다. 우선, 통나무를 일정한 크기의 원기둥 형태로 깎아야 하고, 그렇게 만든 통나무가 돌의 하중을 견뎌야 하고, 통나무가 굴러가도록 바닥이 평평해야 한다. 이 세 가지를 모두 만족시키기는 어렵다. 하다 못해 시골에서 일할 때는 바닥이 평평하지 않기 때문에 외발수레로 일하는 것보다 두발수레로 일하는 것이 훨씬 힘든데, 두발수레도 아니고 통나무를 굴려서 바위를 옮길 수 있을까?

연구실 근처를 지나가던 사학과 출신 대학원생한테 혹시 고인돌 제작 방법에 대해 배운 적이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그 대학원생은 사학과에서 그런 것을 연구하는 사람이 있기는 있지만 거의 고고학 쪽에서 하기 때문에 배운 적이 없다고 답했다. 고고학 전공자 중에 아는 사람이 없으므로 RISS에 검색했는데 고인돌 제작 방식에 관한 한국어 논문을 찾지 못했다. 하여간 통나무를 굴려서 바위를 옮기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나중에 고고학 하는 사람을 만나면 물어보아야겠다.

(2021.12.03.)


2022/02/01

MZ세대 같은 세대 분류의 이점

어떤 단어나 개념을 만들면 해당 단어나 개념이 없었을 때보다 나아지는 점이 있어야 할 것이다. 가령, 특정 집단을 부르기 위한 용어를 고안할 경우, 해당 집단은 특정 집단으로 묶어서 부를 정도로 다른 집단과 차이가 나야 하고, 그러한 차이가 설명되어야 할 필요가 있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훈구파’나 ‘사림파’로 분류하는 것은 무언가 유의미한 분류인 것 같은데, ‘임진왜란 세대’나 ‘병자호란 세대’ 같은 것으로 분류하는 것은 전혀 쓸모없는 짓을 한 것으로 보인다. ‘훈구파’나 ‘사림파’ 같은 경우는, 권력 분배나 권력 이동이나 배경세력 등을 설명할 때 도움이 된다. 반면, 전란을 겪은 백성들을 ‘임진왜란 세대’로 묶든 ‘병자호란 세대’로 묶든, 그걸 세분화해서 ‘정묘호란 세대’와 ‘병자호란 세대’로 구분하든, 그것을 가지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오늘날 청년들을 무슨 무슨 세대로 나누면 그렇게 하지 않는 것보다 어떤 이점이 있는가? 몇 년도부터 몇 년도 사이에 태어난 사람들이라고 하지 않고 굳이 고유명사처럼 세대명을 붙였을 때의 이점은 무엇일까? 거의 없는 것 같다. 사회과학적 모형의 설명력이 증가하는가? 아니다. 예측력이 증가하는가? 아니다. 기존에 통제하거나 조절하지 못했던 변수들이 통제 가능하게 되는가? 아니다. 그러면 뭐가 좋은가? 굳이 따지면, 크게 두 가지 이점을 꼽을 수 있다.

하나는 맞든 틀리든 어떻게든 떠들어야 먹고 살 수 있는 사람들이 일을 쉽게 할 수 있게 된다는 점이다. 방송 작가라면 아무 이야기나 주워온 다음에 MZ세대 같은 소리나 붙이면 그 날 필요한 대본 분량을 대충 때울 수 있다. 정당의 선거 본부라면 출세하고 싶어 안달 난 젊은 사람을 아무나 데려온 다음에 MZ세대 같은 소리나 붙이면 손쉽게 영입 명분을 만들고 언론에 홍보할 수 있다. 기업 홍보팀에서도 광고 문구가 적절하지 않을 때 MZ세대 같은 소리나 붙이면 된다. 언론사에서도 아무거나 막 긁어온 다음에 MZ세대 같은 소리나 붙이면 기사를 뚝딱뚝딱 만들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세계나 사회에 대한 아무런 유의미한 견해도 없는 사람도 마치 자기가 시대 흐름을 파악하거나 느끼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들게 만들어 삶을 만족감을 높여줄 수 있다는 점이다. 마치 어린 아이가 어디서 ‘똥꼬’라는 단어를 주워듣고는 아무 데나 똥꼬, 똥꼬 하며 즐거워하는 것과 비슷하다. 언론이든 매체든 아무 말이나 해놓고 MZ세대 같은 소리나 하면 그걸 주워듣고 와서는 주변 사람들과 말도 안 되는 대화를 하면서 “그게 MZ세대랴~” 하면서 좋아하는 것이다. 자기 정신도 모르는 사람들도 어디서 주워들었는지 시대 정신 같은 소리를 읊조리는 것도 이와 비슷한 것이겠다.

‘X세대’든 ‘Y세대’든 ‘MZ세대’든, 먹고 살려고 가치 없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어차피 가치 없는 일 하는 거 쉽게 하려고 하는 과정에서 자연발생적으로 만들어진 단어겠지만, 그 중에서도 ‘MZ세대’는 제일 질이 나쁜 것 같다. 그 이전에 만든 것도 아무짝에 쓸모없는 구분이었지만 그래도 자연스러운 구분인 것처럼 보이게 만들려는 성의라도 보였는데, ‘MZ세대’는 그런 노력조차도 보이지 않는다. 연예기획사에서 데뷔시켜야 하는 연습생들 몽땅 때려넣어 그룹을 만들고는 ‘고객들 취향이 어떠하든 이 중에 한 명에게 꽂히겠지’ 하는 것처럼, 스무 살 차이나는 사람들을 몽땅 때려묶고는 MZ세대라고 우기는 것이다. 그렇게 때려묶으면 아무 이야기나 해도 20대 초반이든 30대 후반이든 걸려들 테니까 개소리하기는 수월해진다는 이점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게 먹히겠는가? 내가 대학원을 같이 다니는 열 살 어린 대학원생한테, 훈계도 아니고 평범한 경험담을 말해도, 그 대학원생은 마치 나를 격동의 현대사의 풍파를 온몸으로 겪은 사람처럼 쳐다보는 판이다. 그런데 20년을 다 때려넣고 “MZ세대요~”라고 하면 그게 정상인가?

(2021.12.01.)

한강 작가 노벨문학상 수상 예언한 알라딘 독자 구매평 성지순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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