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고등학교 교지편집부 학생을 대상으로 글쓰기 강의를 하기로 했는데, 다른 할 일도 많고 강사료를 그렇게 많이 받는 것도 아니라서 근로 의욕이 그렇게 샘솟지는 않았다. 그래서 특별히 다른 준비는 하지 않았고, 이전에 만들어놓은 것을 가지고 아르바이트를 했다. 이전에 만들어놓은 것이란, 글쓰기 강의조교 워크샵 자료집 등에서 추출한 것과 예전에 페이스북에 썼던 글이다.
아르바이트는 두 번에 걸쳐 진행되었다. 첫 번째 날에는 글쓰기에 대한 대강의 윤곽만 이야기했다. 아름다운 글을 쓰기 전에 정상적인 글을 쓸 것이며, 정상적인 글이란 의사소통과 정보전달에 문제가 없는 글이며, 정보전달에 문제가 있는 글은 글도 아니며, 글쓰기는 어디까지나 구조와 계산의 문제이며, 정서적인 측면을 고려하는 글쓰기도 그렇다는 것 등을 설명한 다음, 글 쓰는 요령이라고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글을 망치는 방법들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여기에 글의 구성에 대한 기초적인 부분을 덧붙였다.
첫 번째 날에 과제로 내준 것은 열 줄 논설문과 네 줄 수필 쓰기였다. 괜히 글을 길게 써봐야 쓰기도 힘들고 고치기도 힘드니까 쓸데없이 많이 쓰지 말라고 학생들에게 말했다. 글 못 쓰는 사람들은 이상한 것을 많이만 써놓고 괜히 뿌듯해하는 습성이 있는데, 글을 짧게 쓰면 구조가 망했음이 한눈에 드러나서 그런 뿌듯함을 못 느끼게 하는 효과도 있다. 정서적인 글도 마찬가지다. 네 줄에 기승전결을 다 담는 연습을 해보라고 했다.
열 줄 논설문과 네 줄 수필은 어디서 근본 있게 배워온 것은 아니고 그냥 내가 만들어본 것이다. 일본에서는 어린이들에게 바둑을 가르칠 때 19×19줄에서 대국하게 하기 전에 9×9줄에서 대국하게 한다는 이야기를 예전에 들은 적이 있다. 바둑 실력이 낮은 상태에서 19×19줄로 두라고 하면 판세를 파악하기 어렵고 복기도 어렵고 한 판을 끝까지 다 두기도 힘들어서 결국 기력이 잘 늘지 않기 때문이다. 아마도 글도 비슷할 것이다 싶어서 학생들에게 그런 과제를 내주었다.
열 줄 논설문의 주제는, 일반적으로 널리 논의되지 않으면서도 논의 수준이 낮은 것을 고르라고 했다. 일반적으로 널리 논의되는 주제를 가지고 글을 쓰라고 하면 기존의 입장을 반복하는 글을 쓸 것이므로 글을 구성하는 연습을 하는 데 별 도움이 안 된다. 그러면 어떤 주제를 선택할 것인가? 내가 제시한 주제는 남자는 ‘삼각팬티를 입어야 하는가, 사각팬티를 입어야 하는가?’였다. 그 학교는 남자 고등학교여서 그런 주제를 제시해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한 학생이 물었다. “그냥 각자 알아서 입으면 안 되나요?” 물론 각자 알아서 입으면 된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나는 논설문 주제로 적절하지 않은 주제를 제시한 것이 되고 체면이 깎이게 된다. 그래서 이런 가정을 추가했다.
“반에서 반-티셔츠가 아니라 반-팬티를 맞춘다고 해보자. 왜 그래야 하는지는 모르지만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 논리적으로 불가능하지는 않잖아? 그런 상황에서 나는 삼각팬티를 입어야겠는데 반 분위기가 사각팬티 쪽으로 쏠린다고 해보자. 나는 사각팬티가 싫은데. 그러면 어떤 논증을 펼쳐야 논의를 뒤집을 수 있을까?”
아까 그 학생이 다시 질문했다. “혹시 다른 주제로 글을 써도 될까요?” 나는 주제는 자유라고 답했다. 원래부터 주제는 자유였다. 내가 깜빡 잊고 주제가 자유라는 사실을 말하지 않고 곧바로 예시를 들자, 학생들 중 일부는 내가 제시한 주제로 글을 써야 하는 줄 알고 걱정했던 모양이다.
두 번째 날에는 과제를 확인한 후, 어떤 글을 어떤 자세로 읽어야 하는지 말했다. 아는 대학생 형이나 누나가 있으면 <RISS>에 들어가서 논문을 읽어도 좋으나, 논문은 해당 분야 관련자가 도와주어야 도움이 된다는 한계가 있다. 신문 사설은 대체로 근거 없이 사측 주장을 나열하기 때문에 신문사의 입장을 확인하는 용도로 쓸 수는 있으나 글쓰기에 참고하면 안 된다. 신문 칼럼은 고등학생도 읽고 내용을 이해할 수 있으므로 글 쓰는 데 참고할 수는 있겠으나 망한 칼럼이 많기 때문에 섣불리 글쓰기에 참고하면 안 된다. 똥을 본받으면 똥이 될 뿐이다. 그러므로, 신문 칼럼은 ‘이 칼럼은 어떤 식으로 망했나?’ 하고 의심하면서 읽어야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나는 학생들과 무난한 칼럼과 망한 칼럼을 구분하여 읽고 분석했다. 무난한 칼럼의 예시로 제시한 것은, 경제분석가 신현호가 쓴 “기본소득의 역설”(서울신문)이다. 명문이라고 떠받들 정도는 아니어도 주장과 근거가 분명하고 서론, 본론, 결론이 명확히 구분되어 있어서 참고하면 글 쓰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망한 칼럼은 필자의 이름을 지우고 나서 학생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글이 어떻게 망했는지만 보면 되지 굳이 필자의 인격이나 명예까지 실추시키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했다.
망한 칼럼으로 준비해 간 것은 (1) 문장 수준에서 망한 칼럼, (2) 문장+구조 수준에서 망한 칼럼, (3) 문장은 멀쩡하지만 구조가 망한 칼럼, (4) 문장과 구조는 멀쩡하지만 내용이 망한 칼럼, 이렇게 네 편이다. 수업 시작 전에 칼럼 출력본을 학생들에게 나누어주었고, 학생들의 칼럼 비평이 끝난 후에 내가 나름대로 칼럼을 분석한 것을 한 부씩 나누어주었다.
망한 칼럼을 읽고 비평해보라고 하자, 학생들의 눈이 갑자기 빛나기 시작했다. 어떤 학생은 칼럼을 읽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고, 또 다른 학생은 한숨을 연이어 쉬며 칼럼을 읽었다. 첫 날에는 내내 꾸벅꾸벅 졸던 학생이 칼럼 비평 시간에는 문장마다 빨간 줄을 계속 그으며 혀를 차기도 했다.
첫 번째 칼럼을 학생들 나름대로 비평하게 한 다음, 내용을 그대로 보존하면서 모든 문장을 뜯어고친 일종의 번역문을 학생들에게 보여주었다. 한 학생은 원래의 칼럼과 일종의 번역문을 같이 놓고 보며 이렇게 말했다. “원래의 글을 읽으면 고통이 눈을 통해서 뇌까지 전달되는 것 같은데 고친 글을 읽으면 눈만 아파요.” 표현력이 좋은 학생이었다.
나는 칼럼 네 편이면 한 시간은 때울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는데, 실제로 해보니 한 시간 동안 칼럼 두 편밖에 못 끝냈다. 학생들이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격렬하게 칼럼을 비판했기 때문이다. 나는 망한 칼럼 비판을 화생방 훈련에서 하는 CS탄 체험처럼 일종의 경각심 고취용으로 활용하려고 했는데, 예상했던 것보다 학생들의 반응이 훨씬 좋았다. 다음 번 아르바이트 때 참고해야겠다.
* 뱀발
내가 만든 네 줄 수필은 다음과 같다. 그렇게 아름답지는 않지만 어쨌든 기승전결을 네 문장에 다 담기는 했다고 생각한다.
평생교육원에서 전화가 왔다.
“선생님, 다음 주 수요일에 고등학교에서 글쓰기 강의가 있는데 혹시 가능하실까요?”
아니, 지금이 금요일 오후인데 다음 주에 수요일에 글쓰기 강의가 있다니, 탁 치면 뭐가 툭 나오는 줄 아나?
응, 나온다.
(2021.1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