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재 박사의 칼럼의 고질적인 문제는, 욕하고 싶은 대상들을 이유 없이 나열하고 글의 주제와 무관한 이야기를 하다가 정작 원래 욕하려고 했던 대상에 대해서는 아무런 타격도 입히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한 고질적인 문제는 <한겨레>에 실린 칼럼 “목수정의 반계몽주의”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이번 칼럼은 다른 칼럼보다도 글의 상태가 좋지 않다. 칼럼 한 편에서 남겨도 될 부분은 다음의 세 문장뿐이며 나머지는 모두 글의 논지와 무관하다.
며칠 전 목수정은 영국의 백신 접종 사후관리 시스템인 ‘옐로카드’의 문건을 근거로, 영국의 백신 부작용 신고가 4만 건이 넘는다는 제목의 글을 썼다. 이 글은 마치 기자가 사실만을 나열한 것처럼 작성되어 있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목수정은 사실을 취사선택하고 자신의 신념에 맞지 않는 근거는 빼는 방식으로 백신에 대한 음모론을 만들어 퍼뜨리고 있다.
도대체 김우재 박사의 칼럼이 어떻기에 세 문장 빼고 모두 지워야 한단 말인가? 칼럼은 다음과 같이 구성된다.
- 문단(1): 근대민주주의는 프랑스 계몽사상에서 나왔다.
- 문단(2): 프랑스 계몽사상의 철학적 기틀은 근대과학으로부터 왔다.
- 문단(3): 홍세화가 프랑스의 정치사상을 한국에 널리 알린 이후, 한국 철학계는 프랑스의 현학적인 포스트모더니즘에 잠식되었다.
- 문단(4): 볼테르의 계몽사상에서 유래된 똘레랑스는 근대과학적 맥락에서 사유되어야 하는데, 홍세화는 프랑스 계몽사상의 핵심인 근대과학을 쏙 빼고 똘레랑스를 수입했다.
- 문단(5): 프랑스 유행이 시들해가던 무렵 프랑스를 다시 한국에 수입한 목수정은 그림자 정부론에 가까운 음모론을 퍼뜨리고 있다.
- 문단(6): 과학이라는 상식적 세계관에서 멀어진 좌파는 극우보다 위험할 수 있으며 목수정이 여기에 해당한다.
애초부터 칼럼을 위와 같이 구성하려고 했다면 칼럼 제목은 “목수정 반계몽주의의 계보” 정도로 했어야 했다. “목수정의 반계몽주의”라는 제목에 걸맞은 글을 쓰려면 문단(5)를 글의 맨 앞에 넣고 목수정의 반계몽주의가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 기술한 다음 그게 왜 문제인지 밝혀야 했다. 그러려면 글의 대부분을 지우고 거의 다시 써야 한다. 그래서 칼럼에서 남는 건 위에서 언급한 세 문장뿐이다.
그런데 애초에 칼럼을 “목수정의 반계몽주의”가 아니라 “목수정 반계몽주의의 계보”로 쓰려고 했더라도 글은 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목수정으로 이어지는 반-계몽주의의 계보를 만드는데도 실패하기 때문이다.
문단(1)에서 프랑스 계몽사상가로 꼽는 두 사람은 볼테르와 루소다. 계몽사상가들 중 볼테르와 루소만이 프랑스대혁명 이후에 사망한 위인들만 안장되는 프랑스의 팡테옹에 예외적으로 안장되었다고 한다. 김우재 박사에 따르면 볼테르는 좋은 사상가이고 루소는 나쁜 사상가인데, 왜 그러하냐 하면 볼테르는 “뉴턴이 완성한 근대과학의 방법론적 틀에서 계몽사상의 강력한 근거를 발견했”고 루소는 “과학과 문명에 대한 비상식적 주장”을 했기 때문이다. 나는 볼테르도 잘 모르고 루소도 잘 모르니까 두 사람이 어떤 사상가인지에 대한 판단은 유보하겠다. 그런데 김우재 박사의 판단을 100% 믿는다고 해도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그래서 그러한 계몽사상가들이 목수정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볼테르는 동인이고 루소는 서인이고 목수정은 노론쯤 된단 말인가?
최대한 좋게 해석해서, 김우재 박사가 볼테르는 계몽주의자의 범례로 제시하고 루소를 반계몽주의자의 범례로 제시하려고 했다고 치자. 그래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볼테르의 계몽주의가 무엇이고 루소의 반계몽주의가 무엇인지 칼럼에 전혀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칼럼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과학에 근거한 주장을 하는 사상가는 좋은 사상가이고 그렇지 않은 사상가는 나쁜 사상가라고 김우재 박사가 믿고 있다는 것뿐이다. 이렇게 쓸 것이면 칼럼에 프랑스 계몽사상가가 나올 필요가 없다. 목수정하고 아무 관계없고 목수정을 비판하는 데도 아무 도움이 안 되는 프랑스 계몽사상가 이야기를 왜 한정된 지면에 굳이 써야 하는가?
문단(3)에 나오는 홍세화 이야기도 뜬금없기는 마찬가지다. 계몽사상가들과 홍세화가 연결되는 지점은 똘레랑스 하나뿐이고 홍세화와 목수정이 이어지는 지점은 프랑스 소식을 전했다는 점뿐이다. 김우재 박사에 따르면 “한때 한국의 지식생태계는 홍세화가 수입한 똘레랑스에 대한 글과 논문으로 가득했”고 “한국 철학계는 프랑스의 현학적인 포스트모더니즘에 잠식되었다”고 하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김우재 박사가 접할 정도의 수준의 글에서는 그랬을지는 모르겠으나, 학위논문만 검색해 봐도 한국 철학계에서 프랑스 철학의 비율이 그다지 높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다.
문단(4)에서 소칼의 과학전쟁을 언급하면서 홍세화가 “프랑스 계몽사상의 핵심인 근대과학을 쏙 빼고 똘레랑스를 수입했”음을 지적하는 부분도 말이 안 된다. 홍세화가 반-과학적인 면모를 드러낸 적이 없는데 근대과학을 쏙 빼고 똘레랑스를 수입했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홍세화는 개화기의 조선인이 아니다. 홍세화가 프랑스 파리에서 돌아올 때는 이미 한국에 근대과학이 있는데, 왜 홍세화가 근대과학까지 수입해야 하는가? 홍세화가 유럽해서 택시 운전을 하지 말고 이학박사 학위라도 땄어야 했단 말인가?
이런 식으로 불필요하거나 틀리거나 말이 안 되는 부분을 날리면,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칼럼에서는 딱 세 문장 남는다.
김우재 박사의 칼럼은 한국 이공계 학부생들의 글쓰기 교육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나름대로의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번 백신 관련 사안에서는 약간 다르다. 김우재 박사가 글을 너무 못 쓰는 바람에 목수정의 반박문을 훨씬 논리적으로 보이게 만들어서 오히려 백신반대론자에게 도움이 된다.
이렇게 본다면, 글 못 쓰는 과학자는 보통 수준의 글을 쓰는 백신반대론자보다 위험할 수 있다. 김우재 박사가 그렇다.
* 링크: [한겨레] 목수정의 반계몽주의 / 김우재
( www.hani.co.kr/arti/opinion/column/984996.html )
(2021.03.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