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에 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교통이 불편하고 교육이 열악하다는 것 말고도 문제는 많다. 그 중에서도 결정적인 위협 요인은, 바로 이웃이다. 이웃이 위협이 된다고 하면, 사정이 생겨서 젊은 여자 혼자 시골에서 살게 되니 온갖 중장년 남성들이 몰려와서 뭔 짓거리를 하려고 한다더라 하는, 괴담 같은 실화가 떠오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정상적인 생활을 하고 정상적인 가족을 꾸린 사람도 충분히 위협적일 수 있다. 특히나 야심이 많은 이웃은 더더욱 위험하다.
옆집 아저씨의 밭과 건너편 집 아저씨의 집은 인접해 있다. 작년에 옆집 아저씨가 건너편 집 아저씨의 집과 붙어 있는 자기 밭에 흙을 조금 쌓겠다고 했다. 건너편 집 아저씨가 그러라고 하자, 옆집 아저씨는 자기 밭에 사람 키만큼 흙을 쌓아서 건너편 집의 시야를 완전히 가려버렸다. 밭농사를 지으려고 그런 식으로 흙을 쌓지는 않는다. 밭을 택지로 바꾸기 위한 중간 작업이었던 것이다. 건너편 집에서는 난리가 났지만 뾰족한 수를 찾지 못해서 결국 이사를 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는 와중에 야심가인 옆집 아저씨는 자기 논에 성토 작업을 하기로 했다. 말로는 밭농사를 짓겠다고 하지만 보나마나 개뻥이고 택지로 만들어서 시세 차익을 노리려는 것이 분명했다. 시골마을에는 공도(公道)가 아니라 사유지에 길을 낸 곳이 많다. 그래서 일반 차량이 아닌 덤프트럭이 통과하려면 사유지 주인에게 양해를 구해야 한다(공도라도 하더라도 농로에 덤프트럭이 다니는 것은 과적행위다). 우리집과 건너편 집만 사유지 사용을 허락하지 않으면 옆집 아저씨 논으로 가는 진입로가 확보되지 않아 덤프트럭을 이용한 성토작업을 할 수 없다. 지난번에 건너편 집을 파묻어버리는 것은 보았기 때문에 우리집은 사유지 사용을 불허했다. 그런데 집이 파묻힌 건너편 집은 밭에 쌓아놓은 흙을 깎아주고 2년 뒤에 1억 7천만 원에 집을 매입해주는 것을 조건으로 도로 사용을 허락했다.
도로 사용을 허락받자마자 덤프트럭이 농로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옆집은 밭에 쌓아놓은 흙을 깎아냈는가? 아니다. 사유지 사용 허락을 받고 옆집 아저씨가 맨 처음 가져온 것은 조경용 석재였다. 조경용 석재를 밭 위에 쏟아놓은 뒤 논에 흙을 차곡차곡 메워넣기 시작했다. 흙이 깎인 것이 아니라 돌덩이가 쌓였으니 건너편 집으로서는 황당한 노릇인데, 더 황당하게도 옆집 아저씨는 그러고도 밭에 흙을 더 쌓았다. 왜 흙을 더 쌓았는가? 밭에서 물이 올라와서 그랬다는 것이다. 물론 거짓말이다. 물이 올라오는 것이 아니라 날씨가 따뜻해져서 흙이 녹은 것뿐이다. 성토작업 전에도 그 밭에는 물이 올라오지 않았다.
옆집 아저씨와 건너편 집 아저씨는 계약서를 쓰지 않고 구두로만 합의했다. 그러니 흙을 깎아내겠다고 하고는 돌덩이를 가져오고 흙을 더 쌓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2년 뒤에 건너편 집을 1억 7천만 원에 사줄까? 보나마나 옆집 아저씨는 가격을 후려칠 것이고 건너편 집에서는 울며 겨자먹기로 헐값에 집을 팔 것이다. 이제 곧 농작물을 심는다고 하면서 나무를 심을 것이다. 2년 뒤에는 나무까지 울창해져서 건너편 집값은 더 떨어질 것이다.
이게 2020년 말에서 2021년 초에 일어난 일이다. 『정감록』에 나오는 십승지 같은 외진 곳에서 일어난 일도 아니고 서울에서 광역버스로 한 시간 반 정도만 가면 되는 곳에서 벌어진 일이다. 한두 세대 전이었다면 도대체 얼마나 황당한 일이 많을 것인가?
실제로 한두 세대 전, 옆집 아저씨의 아버지는 어떤 호구를 후려쳐서 절대농지도 아닌 일반 농지를 절대농지 값으로 매입했다. 당시 평당 5만 원에 산 것이었는데 이는 당시 시세의 절반 값도 안 되는 것이었다. 지금 그 땅은 평당 50만 원이 넘는다. 옆집 아저씨의 아버지가 그 호구 아저씨를 오밤중에 불러내어서 어디 데려가서 계약을 맺었다는데 정확히 어떤 방법으로 계약을 맺었는지까지는 모른다. 이제는 그 아들이 남의 집값을 후려치려고 하고 있다.
소규모 공동체에 대한 터무니없는 환상을 가진 사람들도 가끔씩 있는 모양이다. 작가나 기자 중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어서 마치 거대한 도시와 문명에 살면 인간이 인간 본연의 어떤 순수한 것을 잃어버리는 것처럼 글을 써서 호구들을 현혹하는 일도 있다고 알고 있다. 그런데 소규모 공동체에서 발현되는 인간 본연의 어떤 것이란 보통은 아름다운 것보다는 추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아름다운 것의 영향은 한두 집을 못 넘어가는데 추한 것의 영향은 온 동네에 다 미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설사 공동체 사람들이 죄다 다 착하고 심성이 곱다고 해도, 일을 저지르는 한두 놈을 제어할 능력이 공동체에 없으면 그 공동체가 해를 입는 것은 일도 아니다. 그런데 소규모 공동체가 그럴 능력을 갖추는 것이 쉽겠는가?
작정하고 덤벼드는 나쁜 놈들에게 나쁜 짓은 너무 쉬운 일이거나 일삼아 하는 것이거나 준-직업인 것이다. 반면, 그들에게 피해 입는 사람들이 그러한 피해를 입지 않기 위해서는 자기 생활의 상당 부분을 한동안 포기해야 한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을 전문적으로 도와주는 사람이 있지 않으면, 보통 상황에서 여간해서는 나쁜 놈을 막을 수 없다. 소규모 공동체는 규모가 작고 분업 수준이 낮기 때문에 그런 피해 방지를 도맡아하는 전문가가 부족하고, 그런 전문가가 있다고 해도 활용하기 힘들다. 그러니 소규모 공동체가 겉으로나 평화롭고 한산해보이지만 실상은 일이 터졌을 때 제대로 수습되는 경우가 드문 것이다.
상황이 이런데도, 일부 작가나 기자는 인구밀도가 낮고 집이 드문드문 있다는 것만 보고 소규모 공동체나 퍽이나 사람 살맛나는 곳인 줄 아는 모양이다. 도시나 문명 같은 소리나 늘어놓는 작가나 기자를 싹 잡아다 시골로 몇 년 쯤 하방을 보내서 시골의 쓴맛, 소규모 공동체의 매운 맛을 보게 하면, 그들 중 일부는 자신의 편협하고 피상적인 견해를 되돌아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하방을 보내야, 공동체가 단절되는 것을 막고 이웃과 동네가 살아나게 하기 위해 35층짜리 고층 아파트를 짓지 말고 프랑스처럼 7층짜리 아파트를 짓자는 똥 싸는 소리를 시사주간지에서 보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2021.0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