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의 평생교육원을 통해서 고등학교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다. 고등학생들과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을 읽는 일이었다. 고등학생이 뭐 하러 『국부론』을 읽는가? 느낌이 왔다. 분명히 담당 교사가 무언가 단단히 잘못 생각하고 프로그램을 짰을 것이다. 학생들이 경제학의 기초적인 내용을 알기 위해 『국부론』을 읽었다고 생활기록부에 적으려고 했을 것이고, 사실 교사도 『국부론』을 읽어보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론 그렇게 놀랄 일은 아니다. 철학과를 지망하는 학생에게 강신주 강연회를 권한 교사도 있었으니까. 나보고 프로그램을 짜라고 했다면 그렇게는 안 짰을 텐데, 고등학교에서 프로그램을 짜고 학교에 담당 강사를 요청하는 식이라서 내가 손을 쓸 수 없었다.
담당 교사와 통화했다. 담당 교사는 후회하고 있었다. 『국부론』을 읽으려고 시도했는데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니라는 것을 뒤늦게 알았는데 이미 <국부론 읽기>로 결재를 받았기 때문에 프로그램을 되돌릴 수도 없다면서 걱정했다. 나는 큰 문제 없이 진행될 수 있다고 담당 교사를 안심시켰다. 수업은 두 시간씩 총 네 번으로 구성된다. 네 번의 수업 중 두 번은 『국부론』을 강의하고 나머지 두 번은 기초적인 경제학 내용을 소개하기로 했다. 학생들에게는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 대신 에이먼 버틀러의 『축약된 국부론』을 읽으라고 하면 그럭저럭 될 것이었다. 그렇게 안심을 시키고 나서 나는 『국부론』을 읽기 시작했다. 사실, 나도 『국부론』을 읽은 적이 없었다.
『국부론』은 영어로만 1천 쪽 가까이 되고 한국어 번역서로도 1200쪽 가까이 된다. 그렇게 많은 분량을 꼼꼼히 읽기에는 내가 받는 돈이 너무 적었다. 인터넷에 있는 『국부론』 요약 자료를 모두 모은 다음 국부론을 띄엄띄엄 읽기 시작했다. 띄엄띄엄 읽기에도 『국부론』은 분량이 너무 많았다.
띄엄띄엄 읽기는 했지만 『국부론』에는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내용이 많았다. 아담 스미스는 ‘수요-공급’이나 ‘보이지 않는 손’이나 말한 소박한 아저씨가 아니었다. 『국부론』에는 경제학과 관련된 온갖 이야기가 다 들어있다. 분업, 화폐의 기원, 노동 임금, 자본 이윤, 토지 지대를 다루는 것은 기본이고, 중상주의와 중농주의가 왜 틀렸는지, 식민지에 대표 없이 과세만 하면 왜 큰일나는지(공교롭게도 1776년 3월에 『국부론』이 출간되고 같은 해 7월에 미국 독립선언이 나온다), 통상조약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심지어 청년들 교육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까지 다룬다. 마르크스 정치경제학과 비슷해 보이는 부분도 군데군데에 보였는데, 가령, 로마제국 몰락 이후 농업 생산성 저하를 토지 상속제도의 문제로 보는 부분은 마르크스가 말한 생산력과 생산 관계의 모순과 비슷해 보인다.
노동의 수요와 공급과 관련해서도 아담 스미스가 보이는 모습은 통상적으로 알려진 것과 다르다. 아담 스미스는 자본가들도 단합하고 노동자들도 단합하는데 자본가들이 단합하는 것이 안 보이는 이유는 그것이 자연적인 상태이기 때문이고 그러한 사실을 모른다면 세상물정을 모르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국부론』을 읽으면, 경제신문 논설위원들이 그렇게 추앙하는 아담 스미스는 절대로 그런 분이 아니며, 그러한 논설위원들이야말로 보이지 않는 손에 처맞아야 한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이 경제학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가? 전혀 도움이 안 된다. 경제학의 기초 내용을 알기 위해 『국부론』을 읽는다는 것은 물리학의 기초 내용을 알기 위해 『프린키피아』를 읽는 것과 비슷하다. 물리학을 배우기 위해 『프린키피아』를 읽을 필요가 없듯이, 경제학을 배우기 위해 『국부론』을 읽을 필요가 없다. 수많은 사람들이 노동력을 투입해서 교재를 만든 것은 『국부론』이나 『프린키피아』를 안 읽고도 과학을 배우게 하기 위해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고전을 읽어야 하는 줄 안다.
고전의 효과와 효능을 과장하는 놈들이 너무 많다. 고전을 읽으면 새로운 관점이 생기고 창의성이 생기고 지혜를 얻고 두뇌가 천재로 바뀌고 난리도 아니라고들 말한다. 이러다가는 고전이 발기부전이나 전립선 비대증에도 효과가 있다고 할 판이다. 노벨상을 받으려면 고전을 읽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노벨상 수상자들의 독서 이력이라도 조사해보고 그런 주장을 하는 것인가?
조금만 들여다봐도 고전이라고 불리는 것이 다 같은 고전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문학 작품도 고전이고, 역사서도 고전이고, 철학서도 고전이다. 고전 읽기를 시작하는 많은 사람들은 문학 작품으로 시작해서 역사서로 넘어가다가 대부분이 탈락하고 일부가 철학서를 피상적으로 읽거나 오독하다가 고전 읽기를 포기한다. 과학의 시초가 되는 고전을 손대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읽을 수도 없고 읽어봤자 해당 분야를 이해하는 데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한국의 대표적인 고전 목록인 <서울대 선정 고전 100선>만 봐도 그러한 경향이 뚜렷하게 보인다. 100권 중 절반 가까운 마흔여덟 권은 문학 서적이다. 자연과학 쪽 서적은 열 권 뿐이며 그 중에서도 과학사 서적 빼고, 과학철학 서적 빼고, 과학 에세이 빼면, 과학 고전이라고 할 수 있는 책은 『과학고전선집』과 『종의 기원』 뿐이다. 과학을 사회과학으로 넓게 잡더라도 『국부론』 포함해서 세 권이다. 100권 중 세 권인 것이다.
상황이 이러한데, 고등학생들이 진로를 탐색하려면 고전을 읽어야 한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가? 대학생도 마찬가지다. 문학 전공도 아닌 학생들이 <서울대 선정 고전 100선> 같은 것을 읽는 게 공부에 무슨 도움이 되는가? 물론, 학생들이 알아서 고전을 찾아서 읽으려고 한다면 적극적으로 도와주어야 할 것이다. 고전에 대한 접근성을 높여주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렇지만 고전을 일삼아 읽으라고 강요한다면 세상에 그런 비-효율적인 일이 없을 것이다. 학과마다 필요에 따라 고전이 된 논문을 학부생들이 읽도록 하는 것은 괜찮은 것 같은데(실제로 그렇게 하는 경제학과도 있다), 대부분의 고전 타령은 그런 것과도 거리가 멀다.
온갖 인문학 약장수들이 고전 타령하는 것은 그러려니 해도, 자기 분야에서 멀쩡하게 활동하는 전문가들까지도 고전 타령하는 것을 보면 이해가 안 간다. 그 사람들은 고전을 읽고 어떤 영감을 얻었길래 고전 안 읽으면 큰일이 날 것처럼 호들갑을 떠는가? 인문학 쪽 종사자들에게는 고전이 사실상 교재나 마찬가지인 경우가 많으니까 그렇다고 치자. 과학 쪽 종사자가 고전에 길이 있다고 말한다면 고전에서 어떤 도움을 받았던 경험이 있으니까 그런 말을 하는 것일 텐데, 그러면 어떤 책을 읽었고 어떤 경험이 있었는지 일화 하나라도 소개하는 사람은 극히 드문 것 같다. 왜 그럴까?
* 뱀발
과학의 고전을 읽었다가 뜻하지 않게 인생의 방향이 뒤바뀌는 사람이 있기는 있다. 대표적인 사람이 토마스 쿤이다. 물리학 박사과정이던 쿤은 하버드대 교양교육 교재를 만드는 작업을 하기 위해 자연과학의 고전을 읽다가 틀린 이론이라고 알고 있던 옛날 과학이 예상보다 너무 그럴듯하다는 것에 놀라서 결국 과학철학자가 된다.
어떤 사람은 이런 사례를 악용하여 “봐라, 쿤이 고전을 읽어서 과학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가진 게 아니냐?”며 고전을 읽는 게 이렇게 유용하다고 주장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다른 설명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본다. 물리학 박사과정생인 쿤이 아니라 물리학 학부생인 쿤이 과학 고전을 읽었다면 결과는 달랐을 수 있다. 바빠 죽겠는데 총장이 미쳐서 이상한 책을 읽으라고 한다고 뒤에서 욕했을 수도 있고, 과학사 전공자 앞에서 잘난 척이나 하는 물리학과 교수가 되었을 수도 있다.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라서 박사과정생에게 보일 법한 것이 학부생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을 수도 있다. 쿤이 고전을 읽어서 과학철학자가 된 것인지, 고전을 읽을 때가 마침 물리학 박사학위 취득 직전이어서 더 유효했던 것인지는 따져볼 필요가 있다.
(2020.1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