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1/01

영화 <양자물리학>의 몇 안 되는 장점



나는 아직도 영화 제목이 왜 <양자물리학>인지 모르겠다. 영화 내내 주인공이 “양자물리학”을 들먹인다는 것 이외에는 영화가 양자물리학과 아무 관련 없고, 사실 주인공이 양자물리학을 언급하는 것도 극의 진행과 별로 상관없다. 왜 그런 제목을 지었을까. 제작 단계에서부터 영화가 망할 것을 알았기 때문에, 미친 놈이 지은 것 같은 제목으로 관객들을 낚자는 계산을 했던 것은 아닐까.

그래도 <양자물리학>의 몇 안 되는 장점이 있다면, 바로 김응수가 출연했다는 점일 것이다. 김응수가 출연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네이버 영화란에서 영화의 명대사로 곽철용의 대사를 패러디했다.












(2019.11.01.)


2019/12/30

학교는 무엇을 하는 곳인가?



<한겨레>에 실린 기사 중에 이런 글이 있다.

일부에서는 비교과 폐지 목소리까지 나온다. 하지만 폐지할 때 생기는 문제가 있다. “학교는 무엇을 하는 곳인가?”라는 질문에 답하기가 곤란해진다. 학교는 지식만 전달하고 평가하면 되는 곳인가. 교과 성적만 좋으면 훌륭한 학생인가. 교과 성적만 좋으면 훌륭한 학생인가. 이 질문에 답하기가 매우 힘들어진다.

“그렇다”고 답하는 순간, 학교와 학원의 경계가 한순간에 무너진다. 학교가 학원과 다른 것은 점수만 올려주는 곳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공부도 중요하지만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끊임없이 가르쳐야 하는 곳이 학교라는 공간이다.

“교과 성적만 좋으면 훌륭한 학생인가.” 다니엘 카네만의 심리학 실험에 나오는 문구 같다. 교과 성적으로 학생을 뽑는다는 것은 교과 성적이 좋은 학생을 뽑는다는 것이지 교과 성적 좋은 학생이 무슨 짓을 해도 용인한다는 말이 아니다.

반대로 물어보자. 교과 성적 말고 무엇이 좋아야 훌륭한 학생인가? 인성? 학생의 인성을 누가 어떤 기준으로 평가할 것인가. 비굴하지만 교사 앞에서는 웃는 얼굴로 시키는 대로 다 하는 학생과, 나름대로 도덕감이나 원칙이 있지만 교사가 수행평가로 헛짓거리를 시키는 것을 건성으로 하고 말 안 듣고 자기 주관대로 무언가를 하려는 학생이 있다고 하자. 어떤 학생이 좋은 평가를 받을 것 같은가? 교사한테 이렇게 물어보자. “당신은 ‘사람’입니까?” 아무도 자신 있게 말을 못하고 “그렇지만 그래도 학생들에게 사람이 되라고 말해야...”라고 쭈뼛거리며 말할 것이다. 인성 타령, 사람 타령은 딱 그 정도 수준의 이야기다.

기사에서는 말한다. “공부도 중요하지만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끊임없이 가르쳐야 하는 곳이 학교라는 공간이다.” 어디서는 학생보고 짐승이 되라고 하는가? 유튜브에서 입시 강사들의 인성 교육 영상을 찾아보자. 그 정도로 사람 되라고 하는 교사가 학교에 몇 명이나 있을지 의문이다.

사람 되라고 가르치는 곳이 학교라는데, 왜 학생들은 나쁜 짓을 학원에서 안 배우고 학교에서 배우는가? 왜 나쁜 일은 학원이 아니라 학교에서 일어나는가? 청소년 범죄를 은폐하는 곳은 왜 학원이 아니라 학교인가? 학생부종합전형으로 대학을 가는 상황에서, 성적우수자가 범죄를 저지르자 학생부를 관리하느라 학생의 범죄 사실을 은폐한 고등학교들의 사례는 있다. 교내 수상실적 몰아주기는 도처에 널려있다. 드러나지 않은 사례들은 얼마나 많을까?

한국식 인성 타령은 항상 문제의 본질을 가린다. “학교가 학원과 다른 것은 점수만 올려주는 곳이 아니라는 사실”이라고 하지만, 정작 왜 학교는 점수를 올려주지 못하는지는 설명하지 않는다. 학원은 시험 보는 요령만 가르쳐주고 학교는 원리부터 차근차근 가르치니까 사고력만 향상되고 성적이 안 오른다는 것인가? 인성 교육에 열중하느라 입시에 소홀해서 그런 것인가?

학교에서는 왜 성적을 못 올려줄까? 제도의 문제일 수도 있고, 지원이 부족해서일 수도 있고, 교사의 문제일 수도 있다. 변수가 여러 개지만 그 중 하나는 쉽게 고정할 수 있을 것 같다. 중등교사들에게 수능을 보게 하고 자기가 가르치는 과목에서 1등급을 받아 오라고 하면 된다. 그렇게 하면 적어도 교사가 능력이 없어서 학교에서 성적을 못 올려준다는 말은 안 나올 것이다. 하려고만 하면 간단하게 할 수 있다. 수능 답안지를 학생용과 교사용으로 구분해서 같은 고사장에서 풀게 하는 것이다. 매년 시험 볼 필요는 없고 5년에 한 번이든 7년에 한 번이든 갱신 기간 내에만 1등급 받아오게 하면 행정적인 비용도 크게 들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중등교사 중 자기 과목에서 1등급을 받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이런 와중에 학생부종합전형을 한다는 것이다. 이제 교사들은 평생 해보지도 않은 것에 대한 지식도 학생들에게 전달해야 한다. 내가 아는 어떤 대학원생은, 철학과에서 수리철학을 전공하기로 고등학교 때 마음먹었다고 한다. 그러자 그 학교의 교사는 그 학생에게 강신주의 강연을 보러갈 것을 제안했고, 실제로 강신주의 강연을 들은 그 학생은 철학에 대한 너무 심한 회의감이 들어서 하마터면 철학과에 안 갈 뻔했다. 교사 중에 자기 일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도 모르는데 이제는 자기 일도 아닌 일까지 해야 한다. 과연 이 제도가 정상적으로 운영될 수 있을까?

지식 전달이 전부가 아니라고 하기 전에, 과연 지식을 잘 전달하기나 하는지 묻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왜 안 물을까? 도대체 학교는 무엇을 하는 곳인가?

* 링크: [한겨레] 논란의 학종, 어떻게 고쳐 쓸 것인가

( http://m.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913793.html )

(2019.10.30.)


2019/12/29

멕시코 어부 우화의 교훈



멕시코 어부와 하버드 MBA 출신 사업가에 관한 우화가 있다. 이 우화는 다양하게 변형되어 코스타리카 버전, 인도 버전, 자메이카 버전, 서아프리카 버전 등도 있으나, 이야기의 기본 뼈대는 거의 비슷하다.

멕시코에 놀러온 사업가가 바닷가에서 빈둥거리는 어부에게 괜히 시비를 건다. 왜 일을 더 안 하고 노느냐는 물음에 그러자 어부는 그날 잡을 고기를 다 잡았기 때문에 그런다고 답한다. 그 말에 사업가는 고기를 더 잡고 돈을 모으면 더 좋은 장비를 구입하고 결국은 큰 사업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데 왜 그렇게 하지 않느냐고 한다. 사업가의 잔소리를 한참 듣던 어부는 반격을 시작한다. “당신은 그렇게 돈을 벌어서 무엇을 할 겁니까?”, “바닷가에서 한가하게 낚시를 할 겁니다.”, “내가 지금 그러고 있소.”

이 이야기의 교훈은 ‘행복은 우리 가까이에 있다’, ‘먼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지 말자’ 같은 것이라고들 말한다. 별로 와 닿지 않는다.

사람들은 왜 이런 엉성한 우화를 듣고는 마치 이전에는 몰랐던 대단한 것을 깨달은 것 같은 반응을 보이는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우화 속 어부가 아니라 사업가에 감정 이입하기 때문이다. 쥐뿔도 없는 사람들이 왜 사업가한테 감정 이입하는지 모르겠지만, 하여간 그렇기 때문에 그런 교훈을 얻는다고 보는 것이 최선의 설명이다. 어부의 눈으로 우화를 보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바닷가에서 평생을 산 어부가 있다. 어쩌다 바다에 가야 좋은 것이지 평생 동안 허구헌날 바다만 보고 살았다고 하자. 정말 좋을까? 조선시대 유배지가 그런 곳이다. 어쨌든 어부는 사는 게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조용히 잘 살고 있는데, 어느 날 어떤 사업가 놈이 와서는, 좋게 구경이나 하고 가든지 물고기나 몇 마리 잡고 갈 일이지, 이러쿵저러쿵 잔소리를 늘어놓는다. 어부는 생각한다. ‘네가 하버드 MBA를 나왔으면 나왔지 나보고 어쩌라고?’

농사꾼이 하루에 몇 시간 더 일한다고 해서 서산농산을 인수하는 것이 아니고, 어부가 하루에 몇 시간 더 물고기를 잡는다고 해서 동원참치 같은 회사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증권회사 직원이 하루에 몇 시간 더 일한다고 해서 증권사를 인수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시골 사람들도 그 정도는 안다. 그런데 이 사업가 놈이, 하버드 MBA를 나왔으면 나왔지, 동네 꼴을 봐도 대번에 견적이 나오는데, 물고기 한 마리 더 잡아주는 것도 아니면서 옆에서 쫑알쫑알 떠들고 앉았다. 어부 입장에서 얼마나 짜증나겠는가. 우리 머릿속에 있는 억세고 무식한 시골 사람의 이미지라면 충분히 “야 이 새끼야, 그게 말이 되면 늬가 이 동네 와서 물고기 잡아서 원양어선 선단 만들어봐!”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어부는 점잖게 타이른다. “내가 그렇게 살고 있잖소”라고.

이 이야기에서 얻어야 할 교훈은 ‘행복은 우리 가까이에 있다’, ‘먼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지 말자’ 같은 허위의식이 아니다. 그런 교훈은 돈이 충분히 많지만 돈 욕심 많아 일을 더 하는 사람에게나 도움이 되지, 돈 없어서 시간을 쥐어짜내며 억지로 일을 더하는 사람에게는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처지가 달라서 그딴 교훈을 얻어 봐야 사는데 하나도 도움이 안 된다. 이 이야기에서 얻어야 할 것은 의연함이다. 시골 산다고 얕잡아보는 도시 사람이 잔소리를 늘어놓더라도, 많이 배웠다고 아는 체 하는 놈이 옆에서 날파리처럼 왱왱거리더라도, 화내지 않고 타이를 수 있는 어부의 의연함, 그런 여유를 배워야 할 것이다.

(2019.10.29.)


[프라임 LEET] 2026학년도 대비 LEET 전국모의고사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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