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4/28

[강연] 최광희 (영화평론가)



[세바시] 150회. 영화 흥행을 통해 본 3.5차원의 상상력 | 최광희 영화평론가

( www.youtube.com/watch?v=gqYXOp7IKd8 )

(2019.06.25.)


2019/04/26

이단과 사이비의 차이

   
‘이단’(異端)과 ‘사이비’(似而非)를 구분 없이 쓰는 경우가 많다. 사회에 해악을 끼치는 신흥 종교는 대부분은 이단이거나 사이비라서 “이단 사이비”라고 묶어서 불러도 대충은 맞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이 둘은 다른 개념이다. 이단은 처음에는 정통 교리와 같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정통 교리에서 벗어나게 된 것을 가리킨다. 사이비는 정통 교리의 이름을 빌렸지만 아예 정통 교리와 관계없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어떤 유학자가 자신의 사상적 근원이 공자라고 믿지만 정통에서 많이 벗어났다면 그 사람은 이단이고, 유학자도 아닌 사람이 유학자인 척을 한다면 그 사람은 사이비다.
  
이단이라고 해서 꼭 사회에 해악을 끼치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을 현혹하기 위해 일부러 이단이 되는 경우도 있겠지만, 순수하게 교리 해석이나 철학의 차이로 이단이 되는 것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반면, 사이비는 대체로 사회에 해악을 끼친다. 정통 교리의 이름을 빌릴 필요가 없는데도 굳이 정통으로 위장한다는 것은 숨기고 싶은 검은 속내가 있다는 것이다.
  
- 이단의 사례: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합시다. 왼뺨을 맞으면 오른뺨을 내밀고 겉옷을 빼앗기면 속옷까지 내어줍시다. 이게 모두 인성 없이 신성만 존재하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 사이비의 사례: “이 성도가 내 성도가 됐는지 알아보려면 두 가지 방법이 있어. 옛날에 쓰던 방법 중 하나는 젊은 여집사에게 빤스 내려라, 한번 자고 싶다, 이렇게 해보고 그대로 하면 내 성도요, 거절하면 똥이야. [...] 만약에 이번 대선에서 이명박 안 찍는 사람은 내가 생명책에서 지워버릴 거야. 생명책에서 안 지움을 당하려면 무조건 이명박 찍어. 알았지?”
  
  
(2019.02.26.)
    

2019/04/24

나는 과학적 실재론자인가 반-실재론자인가



어떤 대학원생이 석사 논문 작성을 앞두고 학회 대학원생 분과에 발표 신청을 했다. 발표자는 과학적 실재론을 비판하는 반-실재론자 레이의 주장을 실재론자들이 반박할 수 있다는 글을 썼다. 논평자인 나는 발표자의 주장을 반-실재론자들이 어떻게 반박할 수 있을지 썼다. 사실, 실재론이 맞는지 반-실재론이 맞는지 잘 모르겠다. 논평은 발표문에 대한 일종의 스트레스 테스트와 비슷한 것이라서 그렇게 쓴 것이다.

발표 전날, 발표자와 같이 버스를 타고 학교에서 전철역으로 나가면서 내가 석사 논문 쓰던 이야기를 했다. 나는 반-실재론을 옹호하는 입장으로 석사 논문을 썼다. 반-실재론을 옹호하는 입장을 취하면 논문을 더 쉽게 쓸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렇게 논문을 쓰기 시작했는데, 쓰면서 계속 생각하니까 실재론이 더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되돌릴 수 없었다. 실재론을 옹호하는 내용으로 논문을 쓰려면 졸업하는 데 최소한 한 학기는 더 걸릴 것이었고, 이미 나는 석사 과정을 꽤 오래 다녀서 그 학기에 졸업하지 않으면 파국을 맞을 수도 있었다. 그렇게 나는 반-실재론을 옹호하는 논문을 써서 졸업했다.

사람이 사는데 실재론자냐 반-실재론자는 거의 안 중요하다. 그러나 학사냐 석사냐는 매우 중요할 수 있다. 대가들 중에 실재론자도 있고 반-실재론자도 있지만 석사 학위도 없는 사람은 크립키 빼고 없다. 과학적 실재론에 관하여, 나는 실재론자도 아니고 반-실재론자도 아니고 흑묘백묘론자인 것 같다.

(2019.02.24.)


2019/04/23

[과학사] Eisenstein (2005), Ch 5 “The Permanent Renaissance: Mutation of a Classical Revival” 요약 정리 (미완성)

   
[ Elizabeth L. Eisenstein (2005/1983), The Printing Revolution in Early Modern Europe (New York: Cambridge University Press), pp. 123-163. ]
  
  
  1. 르네상스와 인쇄술
  
[p. 124, 114-115쪽]
교과 과정이나 논문 등에 나타나는 학술적 분류로는 중세 장인 기술이 막을 내리고 근대 초기 유럽의 전문 기술이 대두된 시기는 15세기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간단하지 않다. 많은 르네상스 연구자들은 인쇄술이 중세에서 근대로 이행하는 출발점이라고 간주하기에는 늦은 감이 있다고 한다. 근대로의 이행은 15세기 초 이미 진행되고 있었던 고전 부활과 함께 시작되고 있었고 이는 구텐베르크가 작업을 시작하기 전의 일이다. 주요한 문화적 변용은 이미 필사가를 중심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pp. 124-125, 114-115쪽]
정설은 재생(rinascita)이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것은 마인츠에서 인쇄술이 개발되기 전이라는 것이다. 호이징가가 1920년에 제기한 의문인 “우리가 르네상스라고 부르는 문화적 변용은 실제로 무엇이었으며, 어떠한 것으로 성립하게 되었으며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가”에 대한 명확한 해답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115-116쪽]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호이징가는 중세와 르네상스, 르네상스와 근대의 문화를 비교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하고, 퍼거슨은 중세와 근대의 본질적인 차이와 이행기에만 보이는 특징을 계통적으로 분석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아이젠슈타인은 “이행기에만 나타난 특징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고 한다. 이행기에 등장한 새로운 것 중에서 첫 번째로 꼽히는 것은 인쇄술이다.


  2. 인큐내뷸러: 인쇄술의 요람기

  
[116쪽]
‘근대’(modern)나 ‘중세’(medieval)라는 표기에 적절한 정의를 내리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그에 비해 필사본과 인쇄본의 차이를 비교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필사에서 인쇄로 전환된 것은 일련의 변화들을 일으켰고 이러한 변화는 비교적 단기간에 유럽 전역으로 파급되었다.
  
[117쪽]
1500년대에는 이미 필사의 시대가 끝나고 인쇄 시대가 시작되고 있었다. 새로운 제본술은 무식한 대중에게 의미가 없었고 피상적인 지식만을 갖춘 엘리트층에게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그 영향력이 두드러지지 않았다는 견해도 있으나, 이는 15세기의 문해력 보유자 비율에 대한 잘못된 데이터에 근거한 것이었다. 인쇄술의 등장이 인류의 문화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여겨지지만 시대를 구분할 때 인쇄술의 등장을 어디에 배치해야 하는지 알 수 없다는 패러독스를 이해하기 위해 인쇄술의 등장에 대한 양태를 상세히 규명해야 한다.
  
[118쪽]
인쇄술의 등장이 일으킨 변화는 필사 문화의 산물을 없애버려서 생긴 변화가 아니라 대량으로 재생해서 생긴 변화이다. 인쇄인은 처음 얼마 동안 새로운 작품을 판매한다기보다는 개별 독자들에게 더 많은 작품과 접할 기회를 제공하여 학문의 진흥에 기여했다. 산출(output)의 변화는 개인의 투입(input)의 성격을 바꾸었다. 읽을거리가 풍부해졌으며 지적 자극도 촉진되었다는 점에서 16세기 독자의 독서 메뉴는 14세기 독자와는 질적으로 달랐다.
  
[118-119쪽]
아이젠슈타인은 과학 기술상의 변화와 문화적 변용의 관계를 동시에 일어난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별개의 시간대에 일어난 것으로 인정한 다음, 양자가 서로 어떻게 영향을 받았는지 검토하는 방식을 취하고자 한다. 이탈리아에서 문화 부흥이 진행되어 있었다고 하더라도 필사에서 인쇄로 전환한 것은 문화 부흥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가?
[119쪽]
미술사학자 어윈 파노프스키(Erwin Panofsky)은 “중세의 두 가지 부응은 한정된 것과 일시적인 것이지만 르네상스는 전적으로 영속적인 것”으로 구분한다. 인쇄술이 등장한 이후의 부흥은 인쇄술이 등장하기 이전의 부흥과 유사한 것이었으나 차츰 다른 길로 갔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전의 부흥보다 영속적인 것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영속성은 활판 인쇄술의 정착에 적용되지 못한다. 중세의 고전 부활이 15세기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것보다 왜 일시적이었는지에 대한 설명은 아직 없기 때문이다.


  3. 카롤링거 왕조 시대의 필사체

  
[120쪽]
파노프스키는 고대 양식에 대한 중세의 관점과 근대의 관점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고 주장한다. 중세의 학자들은 과거의 고전을 일정한 거리를 두고 보지 않았고 오늘날 우리처럼 역사학에 대한 수련도 쌓지 않았으나,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은 고전의 모형대로 부활하는 것과 고대 작품들의 재생, 수집, 조사에 열정을 기울이고 암흑 시대가 자신들을 고대로부터 분리했다고 믿었다는 것이다. 아이젠슈타인은 이러한 사고 방식에 대하여 논의할 여지가 있다고 본다.
[121-122쪽]
인쇄술이 등장한지 한 세기 이상 지나서야 자료 개정과 정리를 위한 통일된 체계를 정비할 수 있었고 그 이전에는 지식인이 공유하는 시간・공간적 표준 틀이 없었다. 중세 라틴어와 키케로 시대의 라틴어 등에 대한 시대 구분이 있었으나 현대의 구분과 달리 막연한 구분이었다. 16세기 호사가들이 기원 전 5세기 고대 아테네의 석주와 미켈란젤로의 조각을 구별할 수 없었다고 하니, 그리스-로마 시대의 어느 부분은 15세기가 지난 뒤에도 상당히 가깝게 느껴졌을 것이다. 그 당시 예술 작품이 고대 작품과 혼동되거나 기독교의 주제에 이교의 형식이 채용되거나, 중세 필사생의 서체가 고대 작품으로 잘못 인식되는 일도 있었다.


  4. 필사본의 확산
  
[123-124쪽]
고대 저술가의 책을 베끼고 주석을 다는 일은 고대와 당시 라틴어 문법의 차이 등을 알 수 있는 단서가 되었고, 르네상스의 필사를 접한 학자들 중 로렌초 발라(Lorenzo Valla) 같은 사람들은 문헌학적 접근을 통해 문서의 연대를 추정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의식은 기억술 훈련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긴 당시 상황에서는 크게 성장할 수 없었다. 아이젠슈타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고전에 대한 ‘전체를 조망하는 이성적인 전망’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인쇄술이 등장한 후 100년이 지난 뒤였다는 것이다.
  
[124-125쪽]
고전 양식이 항상 우리와 함께 있게 된 것은 르네상스 이후가 아니라 인쇄술과 목판 교정쇄가 등장한 이후의 일이다. 파노프스키는 우리가 사용하는 필기체와 활자체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글자체의 흐름을 담고 있으며, 이 글자체는 카롤링거 왕조나 12세기 활자체의 모형을 취한 것이며 12세기 글자체와 카롤링거 왕조의 글자체는 고전 시대의 것에서 발전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고딕 초서체는 중세 문예부흥의 일시성을 상징하며 현대의 활자체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영속성을 증명한다는 것이다.
  
활판 인쇄술은 15세기 필사생 서체에 영향을 미쳤는데, 르네상스의 활자체가 소멸되지 않고 발자취를 남긴 것은 특별히 어느 하나의 자체를 사용했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이 손으로 쓴 글씨가 아니라 활자로 인쇄한 것이기 때문이다. 인쇄술이 등장하기까지 고전의 부활은 그 규모가 작았고 영향도 일시적인 것이었다. 필사본의 주요 중심지가 확산된 것은 학문의 부활의 시작이었다. 그런데 그리스어 필사본의 주요한 중심지인 콘스탄티노플이 이방인에게 넘어간 뒤에도 그리스 연구가 왕성하게 행해졌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5. 근대 저널리즘의 아버지 아레티노
  
서구에서 헬레니즘 문화 연구가 계속 된 것은 활판 인쇄술이 학계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음을 나타내는 것 중 하나이다. 고대 언어의 부활은 고대 텍스트의 부활과 똑같은 길을 갔다. 어떠한 발견이 인쇄 기록으로 영구 보존될 수 있으면 그로 인해 끊이지 않은 발견의 연속과 연구 방법의 체계적인 발전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로베르토 와이스(Roberto Weiss)는 고고학은 르네상스에서 고대 유물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가 가능했기 때문에 탄생했다고 말한다. 상실된 텍스트나 사어가 된 언어에 대한 발견이 늘어나고 있었던 점은 15세기 이탈리아에 형성된 특별한 에토스 때문이 아니라 새로운 과학 기술이 광범위하게 파급되었기 때문이다.


  6. 표제지에 인쇄된 저자의 얼굴
  
인쇄술은 개인의 업적에 대한 평가 상승에 깊은 관계가 있었다. 출판인들이 저자를 선전하거나 저자가 자기 자신을 선전하는 일도 생겼다. 필사 문화에서는 발명 특허나 문학 작품의 판권을 보호하는 것이 불가능했으며 지적재산권이라는 사고도 통용되지 않았다. 개성의 흔적을 보존한다든가 개인의 의견을 공표한다든가 하는 자아 의식은 필사 문화에서 그다지 받아들이지 않았던 셈이다. 인쇄술이 등자하기 이전에도 개인 예술가나 저명한 시민이 특출한 칭찬을 받았으나 필사 문화에서는 개성의 예찬은 종종 그 토대가 흔들렸다. 개성이 힘을 얻게 된 것은 인쇄술의 등장 이후이다.
  
15세기 이전에는 화가들의 자화상에서도 개성이 빠져 있었고 이는 저자들의 초상화에도 적용된다. 반복해서 필사를 하면서 어느 저자의 얼굴이 다른 저자의 텍스트에 삽입되거나 단순히 저자를 나타내는 몰개성적인 모습이 되었다. 이러한 몰개성적인 상징은 인쇄술이 필사를 대신하게 된 후에도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표준화되어 목판이나 동판 교정쇄로 대량으로 인쇄되었다. 그러나 표준화가 진행되면서 개성에 대한 평가도 높아졌고 점차 분명한 얼굴에 분명한 이름이 고착된다. 그래서 16세기 에라스무스, 루터 등의 초상화가 수많은 역사책에서 복제되면서도 식별 가능하게 되었다.


  7. 신성한 기술
  
모든 필사본은 개인의 업적이지만 개성의 흔적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서로 다른 개성이 동료나 집단에서 분리되어 남을 수 있었던 것은 규격화된 판권장이 개인의 서명을 대신한 이후의 일이다.
  
르네상스 시기에 다양한 집단들에서 육체 노동과 정신 노동을 연결시키려고 시도했는데 이러한 연계가 완성된 것은 인쇄술의 등장 이후이다. 이는 예술뿐만 아니라 해부학까지 직업의식의 변화를 일으켰다. 인쇄술은 학자와 장인, 이론과 실천 사이의 새로운 연계를 설명할 수 있다. 인쇄술은 장인들이 서적을 가까이 하게 만들었고 학자들이 실천적인 안내서와 친해지게 했고 예술가나 기술 전문가들이 학술 논문을 발표하는 것을 촉진시켰다. 새로운 서적 생산 방식은 장인과 철학자가 상대방에 작업에 관심을 가지게 했을 뿐만 아니라 학자와 기계공들이 같은 작업장에서 일하는 동료로 만들기도 했다. 인쇄술의 아버지들은 서적 편집, 지적 집단 형성, 화가나 저작자들의 선언, 새로운 형태의 자료 수집이나 다양한 학문 분야에서의 연구를 추진했고 기계 조작이나 서적 판매에도 정통한 인물들을 배출했다. 16세기 이름을 떨친 인쇄회사는 지적이며 실천적인 다채로운 활약상을 펼쳤다.


  8. 필사문화의 불연속성
  
아이젠슈타인은 필사 문화에 내재한 불연속성에 주목했다. 전달 경로가 제각각이었던 것은 정보가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달될 때 희미해지거나 손상되는 것을 방지하는 역할을 했다. 필사 문화의 시대에서는 여러 가지 지식이 비밀리에 전해질 수밖에 없었다. 수집된 기록도 흩어지거나 손상되기도 했는데 수세기에 걸친 시행착오에서 배운 기술을 전수하는 데는 오염을 피하여 은밀히 보호되어야만 전승될 수 있었고 기술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기술뿐 아니라 신비까지도 전달되었다. 특별한 상징, 의식 등은 자료의 정리, 기술 보존 등의 역할을 수행했다.


  9. 신성한 비밀의 활자 조각 
  
필사의 시대에 마술과 기계 기술을 결합하는 것은 특정 사람들에게만 한정된 것은 아니었다. 직업상의 기술이 선발된 사람들의 폐쇄적인 집단 안에서만 전수되는 한, 기록으로 남지 않은 비법은 그것을 전수받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비밀로 남겨졌다. 인쇄물은 과학 기술에 대한 인쇄물뿐만 아니라 동시에 여러 마술적인 기술이나 비법들을 전수하게 되었는데 과학 기술과 마술을 구분할 수 있는 독자들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으며 적어도 한 세기 반 동안 혼란이 계속되었다. 넌센스 박물지(natural history of nonsense)라고 일컫는 책이 많이 쏟아졌고. 현자의 돌이나 만병통치법을 아는 자나 기적을 행하는 자들은 출판업에 등장했다.
  
장인들 사이에는 직업별 길드가 쇠퇴한 뒤에도 중세의 비밀주의적 태도가 계속 전승되었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이후 200년 후에도 활자 새기는 일은 손끝으로 하는 것이어서 세공들이 공개하지 않고 비밀리에 전수했다.
  
인쇄술 등장 이후 검열에 대한 우려가 전문가나 학자들 사이에 다양한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인쇄술 등장 이후 이전보다 이솝 언어(노골적이지 않은 풍자나 수수께끼 같은 말)이 더 널리 쓰였다.


  10. 인쇄술에 힘입은 르네상스
  
초기 이탈리아의 인문주의자들이 ‘새로운 시대에 속했다는 생각’을 부채질한 것은 맞다. 아이젠슈타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러한 생각이 생겨난 이후 근본적인 방향이 바뀌었으며 이 때문에 현대의 연구자들이 그 미래의 상황을 알기 위해서는 엄청난 상상력의 비약을 필요로 했다는 점이다. 
  
르네상스라는 용어는 인쇄술에 의해 일어난 여러 가지 변화는 나타내지 못한다. 인쇄술의 보존력은 복원의 과정을 연장시키며 중요한 영감의 요소를 복고적인 데서 빼앗는다는 점에서 오히려 마이너스이다. 그러나 초기 인문주의자들이 문화 추진자로서 평가받는 것은 인쇄술이 일으킨 정보 산업 덕분이다. 인쇄술이 연속성과 점증적인 변화를 일으켰기 때문에 인쇄술은 초기 인문주의자들을 과거의 학자들과 달리 학문의 창시자로 불리게 했다. 또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르네상스 문화의 융성은 초기 인쇄인들, 특히 베네치아 인쇄인들에게 힘입은 바가 컸다는 점이다.
  
  
(2018.05.29.)
   

[KOCW] 경제학 - 파생상품론

■ 강의 영상+자료 ​ 파생금융상품론 / 이시영 (동국대, 2014년 1학기) ( www.kocw.net/home/cview.do?cid=dad6dbf28a4e66d0 ) ​ ​ ■ 강의 자료 ​ 파생상품론 / 윤평식 (충남대, 2011년 2학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