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8/03

[형이상학] Gilson (1949), Ch 5 “Being and Existence” 요약 정리 (미완성)

     

[ Etienne Gilson (1949), Being and Some Philosophers (Toronto: The Pontifical Institute of Mediaeval Studies), pp. 154-189.
  E. 질송 지음, 「제5장. 존재와 실존」, 『존재란 무엇인가: 존재론의 쟁점과 그 전개과정』, 정은해 옮김 (서광사, 1992), 267-324쪽. ]
  
   
 
형이상학의 세 가지 주제의 통일성 여부
 
267-
토마스 아퀴나스의 요점을 파악하기 위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관념이 겪은 본질적인 변형을 먼저 고찰해야만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은 존재로서의 존재가 되는 학이었다. 그런데 존재 자체를 아는 것은 다소 상이한 세 가지 것들을 의미한다. 첫째는 그 자체로서도 파악되면서 그의 고유한 특성들(자기 동일성이나 모순의 배제 등)과 더불어 파악되는 추상적 관념으로서의 존재다. 둘째는 형이상학이 참으로 있다고 말해질 수 있는 존재들을 다룰 수 있다는 것이다. 셋째는 형이상학이 하나의 학인 한에서, 자신의 주제를 그의 원인을 통해 알아야만 하며, 존재가 모든 주제들 중 최초의 것이기 때문에 제1원인을 통해서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의 문제는 형이상학의 주제에 관련된 다양한 규정들이 통일성으로 환원될 수 있는지의 여부이다.
  
문제를 단순화하기 위해 하나의 가능적 형이상학의 “형상적 대상”으로서의 존재 일반에 관한 고찰을 보류하면, 문제는 두 가지의 가능한 관점에 직면한다. 하나는 최고의 존재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존재의 제1원인에 관한 것이다. 최고의 존재가 존재의 제1 원인이라면 아무 문제가 없겠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은 그렇지 않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은 제1원인들의 학이다. 그런데 그 원인들은 4중적인 방식으로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인 중에서 적어도 질료적 원인만은 있어야 하는 데, 이것은 다른 3가지 원인으로 환원될 수 없다. “형상적” 원인이라는 것도 “궁극적” 원인일 수 있고, “궁극 적” 원인으로서의 그 능력은 “움직이게 하는” 원인으로 간주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그 런 원인인 동시에 질료일 수 없다. 질료적 실체들의 구조에 그들의 환원 불가능한 구성 요 소들 중의 하나로 들어서기 때문에, 질료 자체는 그 자신의 방식에 있어서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의 제1원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신은 모든 것들의 원인들 중의 하나이고, 원리들 중의 하나일 뿐, 모든 것들의 유일한 원인도 유일한 원리도 아니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 영역 속에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설명하지 않는 질료가 남아 있게 된다. 이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은 무제약적인 통일성으로 환원될 수 없다.



토마스의 제1원인: 질료의 원인
 
271-
토마스 아퀴나스의 교설 내에서 신은 질료를 포함한, 있는 모든 것들의 원인이다. 창조론이 제1원인을 존재의 영역 속으로 끌어들인다는 점에서, 이는 형이상학 자체의 관념을 수정하지 않을 수 없다. 완전한 지식이라는 것이 원인들을 통한 지식이라는 것은 여전히 참이지만, 형이상학적 지식은 더 이상 존재의 제1원인들을 통한 존재의 학이라는 것만으로는 충분하게 정의되지 않기 때문이다. 참으로 형이상학인 것은 제1원인을 통한 존재의 학이다.
  
우리가 우리의 궁극적 목적으로 신을 알고자 하는 이유는, 실재를 실재의 제1원인을 통해 알기 원하는 한, 신이 그러한 제1원인이기 때문이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교설 내에서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의 관념을 변경시킨 것은, 자연 신학 이상의 고차적인 신학의 현존이었다. 계시 신학이 그 자체로 신에 관한 하나의 지식이라는 사실은, 형이상학을 복수로 정의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한다. 그래서 형이상학은 필연적으로 그 자체의 있어서의, 그리고 그 제1원인에 있어서의 존재의 학이 된다. 형이상학의 이러한 내적인 재정돈은 형이상학의 다양한 측면들에 하나의 유기적 통일성을 준다. 존재로서의 존재의 학은 제1원인들의 학에로 이행되는데, 이것 자체는 제1원인의 학에로 다시 이행한다. 신은 제1원인이면서도 존재로서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실체로서의 존재: 하나·사물·우시아
  
273-
토마스가 말한 존재는 첫 번째 의미로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던 것, 곧 실체이다. 존재가 단순한 실체성 이상으로 어떤 것을 수반한다는 것 또한 참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해도, 존재가 실체라는 것은 여전히 참이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존재를 하나의 실체로 보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을 취하는 것이며, 그러한 경우에 있어 본질과 실존의 구분을 하지 않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 2장에서 존재라는 말의 의미를 탐구한다. 그에 따르면 존재 는 여러 가지 다른 방식으로 표현되나, 똑같은 기본적 실재에 준하여 말하는데 이것이 우시아이다. 그래서 우시아, 우시아의 원리들 및 우시아의 원인들을 포괄하는 실재가 존재의 학의 고유한 대상이다. “있다”와 “하나이다”는 하나이자 같은 것이기 때문에, 그 학은 존재를 다루기 위해 존재의 모든 측면들을 특히 “일자성”을 다루어야만 한다. 이것은 “우시아” (실재 또는 실체), 존재, 하나가 동치어라는 결론으로 우리를 유도한다. 그런 까닭에 “한 사람”, “사람임, 그리고 “사람” 등은 모두 같은 것이다. “각각의 사물의 실재(실체= 우시아)가 하나이고, 또 우연에 의해서 하나인 것이 아니므로, '하나'도 또한 어떠한 존재인 것이다. 형이상학은 그것이 “존재”를 다루듯이 “일자성”을 다루어야 하는데, 이는 일자성과 존재는 있으면서도 그 자신의 본래적인 권리로 하나인 그런 실재(우시아)를 위한 두 개의 다른 이름이기 때문이다.
  
먼저 이것이 “존재”“일자성”에 관해서 말하고 있는 바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관점에서 볼 때 참이다. “일자와 존재는 상이한 방식으로 알려진 바로서의 단일한 본성을 지시한다.” 또한 이 점은 실존 자체와 본질의 관계에서도 참이다. 왜냐하면 한 사람을 낳는 것은 실존 하는 한 사람을 낳은 것이며, 어떤 사람에게 있어서 죽는다는 것은 자신의 현실적 실존을 상실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생겨나거나 파괴되는 것들은 모두 하나이고, 그래서 본질은 그 자신의 실존과 하나이다. 동일한 실재는 그것이 하나의 무엇임(quiddity)이나 본질을 갖는다는 사실 때문에 하나의 “사물”이다. 자신이 갖는 본질이 사람의 본질이기 때문에 한 “사람”이고, 자신의 내적인 불가분성 때문에 “하나”이며, 자신이 그로 인해 실존하게 되는 그러한 현실 덕분에 그것은 하나의 “존재”이다. 결론적으로 사물, 존재, 하나라는 세 개의 용어는 상이한 관념들을 통해 절대적으로 동일한 것을 지시한다.


피조물로서의 존재: 실존자
 
276-
그러나 그러한 원문으로부터 토마스 아퀴나스가 아리스토텔레스를 언급하고 있는 동안에 본질과 실존간의 구분을 잊어버렸다고 추론하는 것은 심각한 오류가 될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체는 기독교적인 세계에 동시에 들어서는 한에서만 토마스 아퀴나스의 세계에도 들어설 수 있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체들은 자신들의 본래적인 권리로 실존하는데, 토마스 아퀴나스의 기독교 세계 속에서는 그렇지 않다. 실재의 절정이 실체이면서 또 실체 자체 속에서의 본질이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는 그 자신의 필연성과 하나이고, 도 무지 실존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반대로 토마스적 실체들의 창조된 세계는 근본적으로 그것들의 실존에 있어서 우연적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근본적으로 우연적일 뿐 아니라 전체적으로도 우연적이기 때문이다. 창조된 세계가 항상 실존하도록 운명 지어졌다는 것이 논증적으로 증명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여전히 영원히 우연적인 세계로 남을 수 있다. 그래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세계의 영원의 문제에 대해 철학적으로 무관심했다. 절대적으로 영원한 세계는 그것의 현실적 실존이 영원한 선물로 여전히 남게 되는 그러한 우연적인 한 세계로 영원히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세계의 실존적 우연성과 실체적 우연성
 
278-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학 대전』에서 이러한 근본적인 점에 대한 관점을 한 예로 표현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 내에서는 공기나 물과 같은 투명한 매체가 빛의 수용 주체들이었다. 빛은 그들 안에 있지만 그들에게 속하지는 않는다. 빛이 비추는 일이 중단되자마자 투명한 주체들은 어둠이라고 부르는 빛의 무에로 전락한다. 태양이 빛의 생성에 있어서가 아니라 빛의 존재에 있어서 원인인 것과 마찬가지로, 신도 사물들로 하여금 있을 능력이 있게끔 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있게 만드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체가 실체로서 실존하는 데 반하여, 실존은 결코 토마스의 창조된 세계 내에서 어떤 실체에게도 본질적인 것이 아니다.
  
이런 세계 안에서는 결코 어떠한 본질도 그 자신의 실존함의 현실일수가 없다. 피조물들 은 그들 자체에 있어서 파멸될 수 없는 존재이며 동시에 신과 그들의 관계 속에서 전적으로 우연적인 존재인 것으로 파악하도록 유도되었기 때문이다. 피조물들의 세계를 그 실존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실존은 피조물 안에 있는데, 이것은 빛이 정오에 공기 안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세계의 실존은 결코 세계 스스로의 실존이 아니다. 반면에 이러한 실존하는 세계를 그 실체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한, 그러한 관점에 부합하는 면들도 세계 안에 있고 또 그렇지 않는 다른 면들도 있다. 이 세계는 이전의 것과 같은 것은 아닐지라도 적어도 전과 같이, 지금도, 앞으로도 하나의 영원한 세계일 것이기 때문이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세계는 실체적으로는 영원하고 실존적으로는 우연적인 세계이다.

 
파손 가능성과 파멸 가능성의 구분
  
280-
파손 가능성은 시간적 존재들의 본질에 관한 것이 아니라 실체적으로 복합적인 존재들의 본질에 관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복합이 해체의 가능성을 수반하고, 그래서 그들을 파손되게 만들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식물, 동물, 인간은 질료와 현상의 조합이다. 그러나 구성 요소 자체는 단순하고, 그 결과 그 요소들은 파손 불가능하다. 한 사람이 죽을 때 “신체”는 소멸하지만, 질료는 소멸하지 않는다. 하나의 제1원리로서 질료는 단순하고 파손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토마스 철학 내에서 인간 영혼의 불멸성이 하나의 직접적인 명증인 가의 이유이다. 인간 영혼이 순수한 형상인 한 그것은 자신의 본래적 권리로 있다. 신이 한 영혼을 창조한다면, 그는 한 “존재”를 창조하는 것이며 그것이 단순한 정신적 형상이기 때문에 그것 안에 끼어들 만한 어떠한 해체의 이유도 없다. 영혼이 신체에서 분리될 수 있으므로 인간은 자신을 죽일 수 있으나, 죽일 수 없는 두 가지가 있는 바 그것은 그의 신체의 질료와 그의 영혼이다. 토마스는 『이교도의 논박』에서 “실체와 실존의 복합이 질료와 형상 의 복합과 같지 않다”는 것을 증명한 후에, “지성적 실체들은 파손 불가능하다”는 것을 증 명해간다. 단순한 실체들 자체는 실존적으로 파멸될 수 있으나 그들은 실체적으로 파손될 수는 없다.

질료를 더욱 완전하게 현실화시키기 위해서 형상들은 시간 안에서 기능하고 변화하고 지속한다. 형상들이 지속하기 위해서는 많은 지구력이 필요하고 더 이상 지구력을 갖지 못할 때는 죽는다. 인간이 영속적이지 않은 것은 견디어내는 것이기 때문인데, 인간의 신체의 질료와 그의 영혼은 견뎌내지 않고 있기 때문에 영속한다. 참된 실체의 존재는 전체적이고 이는 본성적으로 그런 것이므로 매순간마다 새로워질 필요가 없는 선물이다.
  
실체들 자체를 또는 적어도 단순한 실체들을 바라본다면, 그들 안에는 그들이 소멸해야만 하는 아무런 이유가 없고, 반대로 계속해서 실존하도록 함에 있어서도 신 쪽에서의 어떤 특별한 행위가 요구되지 않는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현실적으로 있는 그대로의 단순한 실체들이 지속하도록 만들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는 실체에 있어서 비-존재로의 잠세가 없음과 같기 때문이다.
하나의 복합적 실체는 정확히 그것이 복합적인 만큼 파손 가능하다. 이는 스스로의 해체 가능성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존재는 자신의 본성상 형상에 속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피조물의 두 측면, 즉 피조물의 능동인의 측면인 신과 피조물의 형상인 또는 질료인의 측면인 형상이나 질료를 함께 끌어들이는 것이다.
“파손 가능한”과 “파손 불가능한”은 본질적인 술어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형상적인 원 리나 질료적인 원리로서 취해진 본질 자체에 뒤따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점은 토마스의 세계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세계와 같이 파손 불가능하면서도, 절대적으로 말할 때는 왜 신의 의지에 의해 파멸될 수 있는가에 대한 이유가 된다. 결론적으로 “신의 유입을 전제하는 한에서만 ‘있다'는 그 자신에 의해 피조물들의 형상들에 속한다. 그런 까닭에 비-존재로서의 잠세(실족하지 않을 가능성)는 정신적 피조물들은 물론 천체들에 있어서도 피조물들의 형상이나 질료보다는, 자신들의 유입을 줄일 수 있는 그런 신에게 달려 있다.”


자연학과 형이상학의 과제
 
286-
아리스토텔레스의 세계는 실재가 실체인 한에서 토마스의 세계 내에서 온전하다. 그 세계는 실존에 관련된 어떠한 문제도 필요하지 않은 세계이다. 토마스의, 자연 과학의 직접적인 “자연적” 세계는 그 안에서 “본성들”(자연물들)이 필연적으로 그들 자신의 실존을 수반한다. 그 본성들이 신들도 또는 최고의 신으로 나타나도 그들은 여전히 본성들이다. 여기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형이상학적 전체를 전적으로 새로운 지평으로 이동시킨다. 토마스 아퀴나스 의 형이상학은 자신의 본래적인 권리로 실존적이다.
  
그러나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은 전혀 실존주의가 아니다. 키에르케고르가 염려한 결정적인 문제(사람 안에서 실존이 영원과 나란히 보여질 수 있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는 적어도 이 문제를 해결에로 유도할 수 있는 유일한 원리를 만나고 있다. 키에르케고르의 오류는 시간상의 실존을 실존 자체로 잘못 간주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시간 안에 지속한다는 것이 사실상 실존한다는 것이며, 시간적 실존이 우리에게 있어서는 매우 명백한 실존의 양상이지만, 사람은 시간상에서만 실존하지 않고 적어도 그가 바로 지금 그 자신의 영원성과 교섭하고 있는 한 시간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영원이 아니라 시간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시간이 인간 자신의 영원성을 끊임없이 방해하기 때문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전도서』 3장 14절 “나는 하느님이 만드신 모든 작품들이 영원히 존속 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를 인용했다. 만약 신의 모든 작품들이 저기에 머물러 있는 것이 참이라면, 우리들 각자는 우리들만큼 영원한 존재들에 의해 모든 측면에서 둘러싸인 채 이 미 각자의 영원성 한가운데에 있는 것이다.


토마스 형이상학의 의의: 능동인과 형상인의 관계
  
289-
형이상학에 대한 토마스의 개혁이 갖는 기술적 결과는 이중적인 것이다. 첫째는 능동인과의 특수한 본성에 관한 명확한 이해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본 보편적 운동은 존재로부터 존재로 계속적으로 이어지고, 그래서 각각의 개별적 본성(자연물)은 개별적 운동들의 출발점이 되는데, 그 운동들은 다시 다른 개별적 존재들을 결과로 낳는다. 반면 토마스 아퀴나스의 원인론 속에서 참으로 운동한다는 것은 자신의 결과가 운동이 되는 하나의 능동인과를 발휘 하는 것이다. 둘째는 형상인과와 능동인과라는 두 계열 사이에 정돈된 구분을 도입한 것이다. 형상인과는 사물들로 하여금 그들인 바의 무엇이 되게 만드는 것이고 그들을 어떤 한 방식으로 있게끔 만드는 것이다. 이에 반해 능동인과는 존재들이 무엇이 되게끔 하는 것이 아니고 그들로 하여금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구별되는 두 유형의 인과성의 관계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 그들은 서로에게서 연역될 수가 없다. 하나의 사물이 있다는 사실로부터는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어떠한 결론도 내릴 수 없고, 이에 대한 역에서도 어떠한 결론을 내릴 수 없다. 둘째로 토마스 아퀴나스는 상이한 인과성의 계열에 속하는 원인들이 호혜적인 인과성을 발휘할 수 있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원리를 주장한다. 형상들은 그들이 실존할 수 있는 실체들의 형성에 기여하고 있는 만큼 실존의 “형상적” 원인이다.
  
어떠한 실존도 없는 한, 실존을 수용할 어떠한 그릇도 없다. 실체는 실존하는 “그 것”이고, 그것은 그의 형상의 덕분에 “있는 그것”이다. 그래서 형상은 실체성의 계열에 있어서 궁극 적인 현실이다. 다시 말해 형상의 형상은 없다. 형상은 자신이 그 안에 있는 그 실체에 대하여 참으로 “존재의 원인”이다. 그래서 형상은 다른 형상을 통해서 자신의 존재를 갖는 것이 아니다. 본질과 실존의 복합을 정립시키는 이유를 발견한다면, 이는 그 자체로 하나의 형상은 아닌 어떤 현실과 존속하는 한 존재의 형상과의 결합이 되어야만 할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실존이 형상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실존이 실존하는 사물 내에 있는 모든 것에 대하여 “형상적”이라고 말했다. 이는 실존과 형상의 관계가 형상 자체와 질료의 관계와 같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 관계는 “수용된 자와 수용하는 자”의 관계이다. 그러므로 실존은 본질에 대해 질료적으로가 아니라 형상적으로 행세한다고 말하는 것은 참이다. 실존은 실존하는 실체의 현실성 전체를 독점하지 않는다. 만약 실존적 현실성이 형상적 현실성보다 상위에 있다면, 그 이유는 실체의 핵심이 실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존이 “형상적”이라고 말해짐은 당연하나 실존이 하나의 형상인 것은 아니다. 사실상 각각의 모든 실존자 속에 본질이 있다고 해도 실존이라는 본질은 전혀 없기 때문이다.
 

본질과 실존의 실재적 복합의 의미
 
294-
“어떻게 종의 본질이 그 자체로는 하나이면서도 다수의 개별자들에 있어서 다수일 수 있는가?” 이 물음에 토마스 아퀴나스는 실존의 계열 속에서 대답을 찾았다. 실존하는 개별자들은 그들 자신의 실존함 때문에 “존재들”이다. 각각의 존재는 첫째로 동일한 종에 속하는 어떤 다른 존재와 구별된다. 그 다음으로 그것은 그 자신이 무엇임과 구별되는데, 그 자신의 존재는 오직 그 자체에만 속하는 반면, 그의 무엇임은 동일한 종의 모든 구성원들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복합은 그 복합의 결과가 하나의 사물이므로 “실재적”이고, 현실적으로 실재적인 하나의 “존재”가 되게끔 하기 때문에 구별도 또한 “실재적”이다. “실재적” 복합이나 구별이 의미함직한 것은, 존속하는 한 존재가 그 자신의 “있다”를 힘입고 있는 그런 실존적 현실성은 실체 자체 속에서 실체로 하여금 “그러한 한 사물”이 되도록 만드는 어떤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이다.

“있다”라는 것이 하나의 본질을 “하나의 존재”가 되도록 만드는 것이고, 본질 자체는 그것 이 있기 위해서 “있다”를 수용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본질은 실존은 구별된다. 본질은 바로 자신의 실존함의 현실의 덕분으로 그 자신의 실존과 참으로 다르다. 왜냐하면 본질의 실존함의 현실은 본질로 하여금 하나의 형상인으로서 행세할 수 있게 하며, 현실적 존재를 하나의 존재가 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토미즘에서 이러한 근본적인 논제에 대한 공통적인 오류는 능동인과와 형상인과의 호혜적 성격을 간과하는 데서 기인한다. 본질과 실존의 실재성은 그들의 복합, 즉 사물의 현실적 실재성을 전제한다. 실존은 다른 존재로부터 한 존재가 구별되듯이 본질과 구별되지 않지만, 실체성의 계열 내에서 하나의 어떠한 존재로 정의 가 능하게 되는 바의 것과는 참으로 “다르다”.

만약에 각각의 모든 존재 내에서 본질과 실존간의 구별이 있다면, 그때는 어떠한 존재라 도 자신을 “하나의 존재”가 되도록 하는 복합으로 인하여 신과 구별되는 것이다. 실체가 순 수한 형상이 되는 순수하게 정신적인 실체에 있어서는 형상과 실존의 복합이 하나의 현실적 존재를 형성하기에 충분하지만, 하나의 구체적 실체에 있어서는 질료와 형상의 복합이 이렇 게 구성된 실체와 이 실체의 실존함이 현실과의 복합에 대해 하나의 형이상학적인(비시간적인) 우위성을 갖는다. 하나의 구체적 존재가 그것의 질료나 형상의 덕으로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복합의 상이한 두 계열을 기술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실체가 실존하게 되는 현실은 실체의 질료도 실체의 형상도 아니다. 그러나 그 현실은 실체에 의해서 이 실체의 형상을 통해서 수용된다.


복합의 상이한 두 계열

297-
복합의 두 계열이 지니는 각각의 본성을 살펴본다면, 이들은 모두 잠세와 현실의 복합이다. 한편으로는 형상과 질료의 관계가 현실과 잠세의 관계와 같으며, 또 다른 한편으로 “있다” 와 실체의 관계는 현실과 잠세의 관계와 같다. 우리는 이미 두 복합이 동일한 계열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토마스 아퀴나스 스스로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질료와 형상의 복합은 실체와 실존의 복합과 같은 성격을 갖지는 않는다. 이들 모두가 잠세와 현실의 복합이라고 할지라도 마찬가지이다.” 그 차이를 아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그들 모두가 하나의 존재'를 귀결시키기 때문이다. 즉, 한 실체의 형상이 그 자신의 계열에 있어서 실존의 한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형상은 자신의 실존함의 현실을 수용하는 실체의 형상인 한에서 현실적 실존의 원인이다. 이 점은 '있다'가 형상을 뒤따르는 이유인데, 사실상 아무런 형상도 없는 곳에서는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실존이 그의 형상 안에서, 그리고 그의 형상을 통해 실체에 이른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형상들은 “존재들”이 되기 위해 실존을 수용해야만 한다.
  
그러나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 대해 하나의 혁명에 가까운 결단 을 행하지 않고서는 실존을 스스로의 형상에 의해 현실화된 실체 자체의 현실로서 정립할 수가 없었다. 그는 바로 형상과 현실이라는 두 관념을 분리시켜야만 했다. 형상은 다른 현실인 실존에 대해 아직도 잠세 속에 남아 있는 현실일 뿐이다. 자신의 있다를 수용하기 위해서 형상은 있다에 대해 잠세적으로 있어야만 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있다”는 형상으로서가 아니라 존재로서 형상의 현실이다. 이 점은 있다” 또는 실존한다는 것이 있는 모든 것 들의 최고의 현실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다른 어떤 실체로 되기 이전에 어떠한 실 체라도 있거나 하나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있다'는 모든 것에 의해 분유될 수 있는 그러나 그 자신은 아무것도 분유할 수 없는 궁극적 현실이다. 그러므로 만약 신이 자존적인 '있다'와 같은 것이 있다면 그것 또한 아무것도 분유하지 않는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존속하는 다른 형상들은 신과 같지 않은데, 그들은 실존 자체를 분유해야만 하고 그 결과 현실에 대한 잠세로서 실존에 관계되어져야만 한 다. 따라서 어떤 방식으로는 그들이 잠세적이기 때문에 그들은 어떤 다른 것을 분유할 수가 있다. “각각의 모든 창조된 존재들은 실존의 본성을 분유한다." 신은 각각의 모든 존재가 분유하는 실존의 본성임을 의미한다.


본질주의자의 실존관의 오류

301-
토마스 아퀴나스의 존재 형이상학에 대한 반대자들은 '실존과 독립된 본질이 그 자체로서 무라면 어떻게 본질이 실존과의 복합에 이를 수 있는가'를 지속적으로 묻는다. 그러나 토마스 아퀴나스 자신은 있지 않는 한 본질을 사물이 아닌 한 실존과 복합시키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실존을 하나의 본질로 간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대자들의 논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i) 실재적인 것은 모두 본질인데 실존은 본질이 아니고 그런 까닭에 실존은 무이다. 
ii) 각각의 모든 본질은 개념과 정의의 대상이기 때문에, 실존 자체에 대한 어떤 개념도 없다는 사실은 실존 자체가 무라는 것에 대한 확실한 징표가 된다. 
iii) 본질에 대립되는 것인 한에서 실존은 공허한 논리적 형식으로 남는 한편, 유일한 현실 적 실존은 개별적이고 지각 또는 파악 가능한 실재의 실존일 뿐이다.
 
본질주의가 대담하게 말하는 것은, 유한한 실존이 자신이 현실화시키는 것과 자신을 참으로 동일화하지 않는 한 신은 유한한 실존을 생각할 수가 없고, 이점에서 유한한 실존은 단지 “자신이 그로부터 유래되어 나오는 그런 원인에 대한 관계”일 뿐이라는 것이다.
사실 문제되는 것은 실존의 계열의 자율적 성격에 대한 형이상학적 이해이다. ‘있다가 여떤 부가나 규정에 대해 절대적으로 순수하게 되는 유일한 예는, 또한 존재가 나머지 모든 것들과 절대적으로 구별되는 유일한 예이기도 하다. '있다'는 그 자체로부터 하나의 현실이 아니라 가장 공허한 보편자이기 때문에 참으로 현실일 수가 없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순수한 '있다'는 그 자체로 최고의 그리고 절대적인 현실이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의 보편자일 수가 없다고 말해야만 한다. 만약 이 점이 신에 대해 참이라면 또한 유한 한 존재들에게 있어서도 참이다. 사물들에 있어 '있다'는 그것에 의해 사물들이 현실적 존재들, 곧 자신의 본질들이 개념적 추상화를 통해 보편자들로서 파악될 수 있는 그런 현실적 존재들로 있게 되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질료는 그 형상을 떠나서는 비존재이며 형상 자체는 그 자신의 있다는 떠나서는 비존재이다. 그러나 실체들은 무가 아니라 현실들이다. 그들은 실존함이라는 궁극적 현실을 분유하고 있는 형상들인 것이다.


우연적이고 파멸 불가능한 존재
  
304-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이해된 바와 같이, 존재는 본질과 실존의 복합으로 인해 철저하게 우연적이면서도 문자 그대로 파멸 불가능한 것으로 나타난다. 실존함의 순수 현실인 신 자신을 제외하고는 다른 어떤 사물도 자신이 최초에 수용하지 않는 한 스스로는 가질 수 없는 어떤 현실에 의존하기 때문에 철저하게 우연적이다. 실재성의 가장 낮은 수준에 질료가 있는데 그것은 그 스스로 직접적으로 실존을 수용할 수는 없고, 형상과 더불어서만 구체화 될 수 있다. 따라서 실존은 '형상과 더불어 구체화되는 질료를 통해서만 질료에 도달한다.
  
실재가 본질이 아니라 존재임을 우리가 기억하는 한, 사물들은 매우 다르게 나타날 것이다. 본질 자체는 일차적으로 형상이며, 실존은 이 형상을 하나의 존재로 되게끔 해주는 것이며, 이 존재는 질료를 갖는 한 그 질료로 하여금 있게 해주는 것이다. 실존의 우연성이 의미하는 것은 모든 현실적 존재들이 그들의 원인에 대해 우연적이라는 것이다.
최초의 피조물은 현실적 존재라는 정식은, 토마스적 의미에 있어서 실존함의 순수현실의 최초의 결과는 그것이 원인 짓는 어떤 것의 실존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즉, 그들 원인의 최초의 결과는 그들을 있게 만드는 것이며, 이것은 다른 모든 것들에 의해 전제되는 결과이면서도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전제하지 않는 결과이다.
우리는 차라리 존재 전체가 자신의 있다에 관련되어 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하면 “있다 자체는 (그것이 다른 모든 것에 의해 전제되고 있기 때문에) 모든 결과들 중 가장 공통된것, 최초의 결과, 그리고 모든 결과들 중 가장 내적인 것”이다.
  
'존재'라는 단어는 어떤 한 존재인 바의 사물과 이것을 하나의 존재가 되게끔 하는 실존 적 현실을 함께 의미하지 않고서는 결코 사용될 수가 없다. 실존적 존재는 그 덕분에 자신이 현실적으로 있게 된 그런 현실에 의해서 전체적으로 혼합되어져 있는 것이다. 존재과 실존간의 고전적인 이율배반이 여기서는 단적으로 사라진다.


생성으로서의 실존
  
307-
존재는 그 자신의 본질이고 그래서 그것은 본질적인 자체성과 본질적인 불변성이 되는 본 질의 여러 성격들을 드러내야만 한다. 다른 한편으로 현실적 실존은 영원한 다름(otherness)인데, 왜냐하면 그것이 영원한 생성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항상 본질과 생성이 양립 불가능 하다는 가정에 의거해 있지만, 사실은 그 역이 참이다. 즉, 본질은 결코 생성과 양립 불가능 하지 않고 오히려 생성의 궁극 원인이며 생성 가능성의 형상적 조건인 것이다.
  
자신의 본질이 자신의 실존과 한가적인 신의 경우와 같이 오직 실존만이 있는 곳에는 생 성이 없다. 반면, 본질이 나타나자마자 본질을 본질의 가능적 실존으로부터 구분짓는 어떤 다름이 생성의 가능성과 함께 등장한다. 이 점은 현대의 실존주의에 대해 거의 독점적인 관심을 기울이거나 어느정도의 주된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의 경우에 있어서 특히 분명하다.
인간 영혼의 본질은 신체와의 관계를 수반하기 때문에(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하나의 영 혼이 아니라 하나의 순수한 정신일 것이다.) 그 자체로부터 인간영혼과 같은 형상은 그 이 상의 어떤 현실화를 필요로 한다. 한 영혼에 있어서 실존적인 문제는 결코 그것인 바의 무엇(what it is, 형상)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인 바의 것으로 되는 것(to become that which it is)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질료에 관계된 어떤 형상도 홀로 있을 수 없다는 점이 나타난다. 여기서 '있다'는 것은 생성된다는 것이며 그의 '존재'는 '생성'이다. 현실성의 결여 (실체에 있어서의 결여)를 채우기 위해서 그 자신의 존재를 성취해야만 하는 것은 운동하는 것이고, 변화하는 것이며, 있음에 다가서는 것, 즉 점진적으로 그 자신의 존재에 도달하는 것이다. 질료를 필요로 하는 것은 형상에 있어서 존재의 어떤 결여를 지적하는 것이므로 질료가 있는 곳은 어디에서나 더욱 완전한 실존적 현실화에로의 잠세가 그 형상 내에 있다. 그런 까닭에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 요구되는 운동이나 변화가 있게 된다.


본질주의자의 본질관의 오류

309-
본질에 대한 현대의 관념을 제거하는 일은 여기서 하나의 절대적인 필요성이다. 그렇게 하지 않는 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존재 형이상학과 같은 것은 전혀 이해될 수 없다. 본질들은 보통 추상적 기체들로 파악되는데, 이것들은 자신들의 본성이 자신들인 바의 무엇으로 있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변화도 감당할 수 없다.
  
본질주의자들과 실존주의자들의 공통된 오류는, 생성에 예속되는 한 존재의 영원한 본질이 그의 생성의 원인으로서의 현실적 실존에 관한 지식을 포함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점이다.
  
본질들은 스스로의 실재성이 스스로의 가능성 자체와 일치하는 가능적 존재들로 종종 파악된다. 그러나 우리는 본질적 가능성과 실존적 가능성을 구분하는 일에 대해 주의해야 한다. 
사실상 그들이 두 개의 구분되는 형이상학적 계열에 속하기 때문이다. 하나의 본질은 그 것을 규정하는 모든 술어들이 공동 가능적(compossible)일 때 본질로서 가능적이다. 만약 그 들이 있다면 상응하는 존재의 실존은 가능적이지만, 그들이 있지 않다면 실존은 가능적이지 않다. 
그러나 이 점은 본질적 가능성의 계열 안에서만 참이며 실존적 가능성의 계열 안에서는 전혀 참이 아니다. 많은 형이상학자들은 본질이 자신의 모든 규정을 받지 않는 한 실존 할 수 없다고, 그리고 본질이 자신의 모든 규정들을 받게 되자마자 그것이 갑자기 실존하거나 최소한 실존을 수용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이러한 환영은 다음과 같은 이중적인 오류에 기인한다.
 i) 본질성의 계열 내에서 충실하게 완성된다는 것은 본질을 조금도 현실적 실존으로 끌어오지 못한다는 점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ii) 어떤 가능적인 존재의 본질은 이 본질이 오직 그것만을 통하여 자신의 본질적 규정을 성취할 수 있는 그런 가능적 실존을 필연적으로 포함한다는 것을 잊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 실존은 바로 본질적 가능성들의 충족이다. 이 점은 시간을 초월하는 인식 이 영원히 본질들을 이미 충족된 것으로 봄에도 불구하고 왜 본질들은 시간상에서 현실적으로 생성되는가의 이유가 된다. 현실적이고 개별적인 본질들은 따라서 정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그들 자신의 생성이 바로 그들의 정의에 의해 전제되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신은 그 자신에 대해 그 자신의 본질이고 그래서 그 자신의 '지금'이 한결 같이 그 자신의 있음(is)이 된다. 따라서 신에게는 어떠한 시간도 없으며 그러므로 그분은 영원인 것이다.

 
시간적 실존의 역동성 : 영원과 존재의 점진적 성취
  
312-
그러므로 본질이나 최고의 본질성을 최고 단계의 실재로 정립하는 것은 모든 형이상학적 오류 중 가장 비참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본질로 모든 존재의 궁극적 근거로서의 있다를 대체하기 때문이다. 본질이 자신의 '있다'에 의해 충실히 정립되었기 때문에, 본질은 여기서 한계도 규정도 수반하지 않는다. 반면, 유한한 본질들은 항상 한계와 규정을 수반한다. 왜냐하면 그들 각각은 한 가능적 존재의 형상적 한정이기 때문이다.
  
사물의 실존함의 현실은 사물의 통일성을 보장하는 것이다. 질료, 형상, 실체, 우연자들 그리고 사물안의 모든 것들이 직·간접적으로 똑같은 실존함의 현실을 분유한다. 그리고 이점은 사물이 존재인 동시에 하나가 되는 이유이다. 실존은 요소들을 분리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동일한 존재의 구성 요소들로 혼합하는 것이다. 같은 이유로, 시간적 실존은 끊임없는 영원의 해체도 아니고 끊임없는 존재의 분할도 아니다. 오히려 생성을 통한 그들의 점진적인 성취인 것이다. 그래서 있다를 통한 생성은 충실히 규정된 존재에 이르는 길이며, 이와 마찬가지로 시간은 영원에 이르는 길이다. 인간은 모든 참된 정신적 실체들과 같이 본래적인 권리로 영원하지만, 그가 더욱 충실하게 있기 위해서 생성되어야만 한다면, 시간 안에서 자기를 성취하면서 자기를 영원화 하는 존재가 되는 일이 그에게 있어서 본질적인 것이다.
  
추상적 본질이 정적인 반면 실존은 동적이기 때문에 그러한 존재 형이상학은 역동적인 것이어야만 할 필요가 있다. 실존적 현실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있다'라는 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실존적 현실이고, 그것은 결과인 동시에 또한 원인이다. 존재의 본성 자체가 문제되고 있는 시점에서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도출된 것은 “있고 그래서 행위한다가 아니라 있다 는 것이 행위 한다”라는 점이다. 그리고 있다가 행하는 최초의 일은 그 자신의 본질로 하여금 있게끔 만드는 것, 즉 하나의 존재가 되도록 하는 것이며 이것은 단번에 완전하게 그리고 결정적으로 행해진다. 두 번째 일은 그 자신의 개별적 본질을 그것의 완전으로 다소 가깝게 이끄는 일이다. 그러나 이 일은 시간을 요할 것이며, 우리들에게 있어 각자의 시간적인 개별성을 성취하는 일은 평생을 요한다. 간단히 말해, 본질들의 현실적 완성이 그들의 실존들의 궁극적 원인이고 이 원인은 현실적 완성을 성취하기 위해 많은 기능들을 갖는다.

실존은 그러한 기능들을 수행할 수 있는데, '있다는 것은 현실이다'라는 것이기 때문에 그 것은 또한 '행위할 수 있다'라는 것이다. 하나의 존재가 존재로서 행위하는 한 그것은 존재의 원인이 될 것이다. 신은 실존의 순수 현실이기 때문에 그분의 최초의 결과는 실존이고, 그래서 그분은 다른 모든 것이 실존하는 것에 대한 최초의 원인이다. 그러나 신이 창조한 실존하는 사물들은 그들이 실존하는 한 그분의 영상들이다. 그러므로 만약 신이 실존을 그들에게 부여함으로써 그분 자신과 비슷하게 그들을 만들었다면, 그들에게 자신의 인과적 행동들을 행할 힘을 허용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점은 어떤 유한한 존재라도 실존을 창조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그들이 최소한 실존을 전달해 줄 수 있는가에 대한 이유이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토마스의 역동 이론
  
315-
존재에 관한 이러한 고유한 역동이론(dynamism)은 아리스토텔레스적 본질 개념의 근본적인 변형을 수반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들은 자기 실현하는 형상적 유형들이었고, 개별자들은 그들 자신의 형상들이 되는 일에 실패한 시도들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들 중 누구도 어느 무엇을 자신의 종에 부가할 수는 없었다. 아리스토텔레스주의가 하나의 역동이론이었기 때문에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것을 그 자신의 존재 형이상학에 포함하기를 바랐지만 그것이 형상의 역동이론'이었기 때문에 그는 그것을 '있다(esse)의 역동이론'으로까지 심화시켜야만 했다.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각각의 개별자는 심지어 구체적 존재들조차도 그 자신의 '있다' 를, 즉 스스로가 갖는 하나의 '있다'를 향유할 수 있었다. 그러한 개별자들이 여전히 그들의 형상에 의해 규정되지만, 그들은 더 이상 질료의 고분고분하지 않는 본성에 의해 단지 방해만 받는 그런 형상들의 자동적인 자기 실현들이 아니다. 그들은 자기 형성에 있어 개별성을 지니며, 각각의 개별성은 그 자신의 있다에 의해 능동적으로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형상은 스스로 성취하는 목표가 아니라 그 자신의 있다에 의해서 성취되는 하나의 목표가 되는데, '있다'는 점진적으로 형상을 하나의 현실적 존재로 만드는 것이다. 또한 질료 자체는 더 이상 맹목적으로 형상을 동경하면서 하나의 장애물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도움이다. 능동적으로 질료에 관계되어 있기 때문에 영혼은 스스로 필요로 하는 신체를 자신에게 부여하고, 신체는 지적인 기능들을 가능케 하는 생리학적 기능들을 통해 점진적으로 영혼을 형성한다. 그런 까닭에 결국 무한히 다양한 인간의 마음들이 있게 된다. 모두가 동일한 척도, 동일한 방식에서 인간이지만, 그들 각각은 공통된 종의 정형화된 모사물이라기 보다는 단일한 원형을 부여받은 단일형인 양 모두가 다르다 | 한편, 모든 사람은 그의 종의 공동선(common god)을 분유한다. 그들은 자기 내부에서 존 재가 어떤 목적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을 경험할 수 있으며, 또한 다른 모든 것들이 어떤 목 적을 향해 행동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이 목적은 '있다라는 것이다.) 사실상 그들 모두는 동일한 아버지를 가지고 있고, 그 분은 그들 모를 자신의 닮은꼴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 들은 있기 때문에 행위하고 그들의 아버지의 이름이 있는 그분(He who is)이기 때문이다.


존재론에 근거한 인식론 : 실존 판단으로서의 진리
  
318-
원인론이 존재론에 의존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식론 또한 존재론에 의존한다. 만약 아는 것이 사물들을 있는 그대로 아는 것이라면 그들을 아는 것은 그들의 형상뿐만 아니라 그들 의 '있다'에 도달하는 것이다.
  
실존하는 존재들에 관한 어떠한 일반적 인식도 그들을 단순한 가능자들의 추상적 조건으로 환원하는 일을 수반한다는 키에르케고르의 진술에는 깊은 진리가 있었다. 그것이 참이었던 이유는, 현실적 실존이 감해진 존재는 기껏해야 가능성에 불과하며, 실존 자체에 관한 추 상적 인식도 여전히 실존의 가능성에 관한 인식으로 남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인식은 추상적 본질들에 관해서는 참이지만 현실적 실존의 본질에 관해서는 참이 아니다. 실존적 존재를 인식하는 것은 그것의 본질만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실존자'들을 인식하는 것이다.
  
우리의 실존적 판단은 추상적인 지적 인식의 자료와 감각적 직관의 자료가 충실하게 일치 할 때 참이 된다. 그들이 일치할 때에도 (키에르케고르가 주지하듯이) 하나의 주관적 실존에 관한 어떤 객관적인 인식은 여전히 없는 것이지만, 그러나 나는 주관적으로 실존하는 하나의 존재에 관한 객관적 인식을 갖는 것이다. 만약 현실적 존재가 객관적 본질의 실존적 현실화라면 인식은 동시에 객관적이면서도 실존적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반드시 그러할 것이다. 그것은 추상적인 개념들을 통해서는 직접적으로 객관적이며, 어떤 종류의 판단들을 통해서는 직접적으로 실존적이다. 만약 그러한 판단들이 바로 현실적 존재들의 '있다'를 포함하면서 궁극적으로 그들에 도달함을 지향한다면, 그들의 진리는 사물의 현실적인 '있다'에 궁극적으로 의존해야만 한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사물이 그의 무엇임과 그의 실존(esse)을 모두 포함하기 때문에, 진리 는 사물의 무엇임 자체보다 사물의 실존에 더욱 근거해 있다.” 라고 말한다. 사물들이 있기 때문에, 참된 판단들은 사물들을 현실적 존재들로 받아들이는 한에서만 참이며, 한 “존재”라는 것이 일차적으로는 있다는 것이기 때문에 진리는 원칙적으로 사물의 본질에서보다는 사물의 실존에서 더욱 근거지어진다. 토마스의 인식론에 대한 마지막 말은 존재에 관한 우리의 인식이 하나의 추상적 개념 이상의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한 개념의 그리고 한 판단의 생생하고 유기적인 통일이고 또 통일이어야만 한다.

 

(2021.08.02.)
    

2017/08/02

분야별 전공자들의 발언권

     

세상에는 여러 전문 분야가 있는데, 사람들이 각 분야를 모두 동등하게 전문적인 분야로 보는 것 같지는 않다. 어떤 분야에서는 해당 분야 전문가가 다른 분야에 대해 근거 없는 주장을 하더라도 존중받는데, 어떤 분야에서는 해당 분야 전문가가 자기 분야에 대해 조심스럽게 의견을 표명해도 일반인들이 개소리로 치부하기도 한다.
   
내가 과학 분야를 잘 모르기 때문에 함부로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농담을 섞어서 말하자면 과학 분야에서 전공자의 의견이 가장 존중받는 분야는 아마도 이론물리학자 쪽일 것이다. 이 분야에서 성과를 내기만 하면 다른 분야에 대해 생뚱맞은 이야기를 해도 사람들이 진지하게 받아들인다(e.g. 스티븐 호...). 심지어 이론물리학 하는 사람들이 실험물리학 하는 사람들보고 “실험은 머리 나쁜 애들이 실험하는 것”이라고 놀린다더라 하는 식의 농담을 해도 일반인들은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인다.
  
과학 분야에서 전공자의 의견이 가장 무시 받는 분야는 아마도 진화심리학일 것이다. 진화심리학자들은 다른 심리학 전공자한테서도 “진화론이 과학인 건 맞는데 진화 심리학이 과학이 맞느냐”는 의혹의 눈초리를 받기도 한다고 한다. 인접 분야 전문가가 그러는 것은 그럴 수 있다고 치자. 그들은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들한테도 부당하게 욕을 먹는다. 물리학의 경우, 『시크릿』처럼 양자역학을 인용하여 개소리를 하는 책이 있기는 하지만, 고등학교 문과 수준의 물리학 지식을 겨우 아는 사람이 양자역학을 비판하는 책을 쓰는 경우는 거의 없다. 설사 어떤 미친 놈이 정말로 그런 책을 쓴다고 해도 아무 관심을 받지 못해서 묻힐 것이다. 진화심리학은 이와 반대다. 진화심리학에 대하여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 해당 학문을 근거 없이 비판하는 일이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나고, 책으로 출판되기도 하며, 그 책이 마치 어떠한 대단한 함축이라도 지닌 듯이 신문이나 방송에서 소개되기도 한다.(e.g. 『나는 과학이 말하는 성차별이 불편합니다』)
  
인문학 전공자 중에서 종사자의 의견이 가장 존중받는 분야는 아마도 문학 쪽일 것이다. 아무 분야에 대해 아무 근거 없이 아무 말이나 해도 사람들이 진지하게 귀 기울여 듣는다. 전공자뿐만 아니라 소설가처럼 관련 업종 종사자들의 의견까지도 과도하게 존중받는다.
   
소설가가 소설을 잘 쓰면 그건 그냥 소설을 잘 쓴 것이고 거기서 끝나야 하는데, 언론에서는 무슨 일만 있으면 소설가한테 세상만사를 다 물어본다. 대부분의 소설가는 다른 분야에 별다른 전문성이 없으므로 그들이 내놓는 대답이라는 것도 보통은 소설 많이 읽은 아저씨나 아주머니가 하는 대답과 별반 다르지도 않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조차도 그렇게 귀 기울여들으며 소설가 누가 이런 말을 했다고 인용하기를 즐겨한다. 예술가를 잘 대접하는 건 좋은 일이고 권장할 일이지만, 왜 소설가를 마치 대단한 지식인이라도 되는 양 떠받드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
 
인문학 전공자 중에서 전공자의 의견이 가장 무시 받은 분야는 철학일 것이다. 전공자들이 자기 분야에 대해 맞는 이야기를 해도, 철학에 대해 쥐뿔도 모르면서 말귀도 못 알아먹는 사람들이 그런 건 진정한 철학이 아니라고 우긴다.
  
  
(2017.06.02.)
     

2017/08/01

속죄 논문

     

제본된 석사 논문을 들고 중세철학 선생님을 찾아갔다. 선생님은 일단 연구실로 들어오라고 하셨다. 연구실 의자에 앉아 나는 수줍게 말했다. “예전에 지은 죄가 커서 속죄하려고 왔습니다.”
  
나는 석사 과정 1학기에 발제를 펑크 낸 적이 있다. 지금도 나는 영어를 잘 못하는데 그 때는 영어를 처참하게 못해서 대학원 수업을 제대로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기말로 갈수록 수업은 한 주에 끝낼 것을 다음 시간에 끝내는 식으로 진행되는 경향이 있는데(8주차 진도를 8주차 수업 후반부와 9주차 수업 전반부에 하는 식), 나는 그 주에 해야 하는 발제를 다음 주에 하는 줄 알고 발제를 하지 않았다. 그 날 내가 발제를 했어야 한다는 사실을 수업 시작 네 시간 전에 알았다.
  
나는 수업 시간 두 시간 전에 선생님 연구실을 찾아가 사정을 말했다. 막장 상황인데도 선생님은 분노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나를 진정시키셨다. “너무 놀라지 마세요. 가끔 있는 일입니다. 그래도 지금이라도 와서 다행이네요.” 다행히 한 주 수업을 통째로 날리지 않고 절반만 날렸다. 그 다음 주에는 발제를 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인데, 다른 학교에도 발제 안 한 사람이 몇 년에 한 명씩 나온다고 한다. 그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나. “몰라. 발제하는 날 수업에 안 나왔어. 그 학기에 자퇴했다고 하던데.” 다들 그랬다고 한다. 그런 대형 사고를 치고도 자퇴 안 하고 석사 과정까지 마친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경우다.
  
발제를 안 한 날, 나는 도망가지 않고 수업 시간에 앉아있었다. 돌을 던지면 돌을 맞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너무 부끄러워서 건물에서 뛰어내리고 싶었는데, 그렇다고 진짜 건물에서 뛰어내리면 발제 빼먹고 부끄러워서 건물에서 뛰어내린 사람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대학원에 도시 전설처럼 대대손손 전승될 것 같아서 그러지 못했다. 게다가 대학원이 3층이라 뛰어내려도 안 죽고 살 것 같았다.
  
석사 첫 학기에 죄를 짓고 나는 생각했다. ‘내가 지은 죄를 속죄하는 길은 좋은 석사 논문을 쓰는 것뿐이다.’ 그러고는 한참동안 논문을 못 썼다. 남들보다 1년 반 정도 더 걸려서야 간신히 석사 논문을 썼다.
  
연구실에서 선생님은 여러 가지를 물으셨다. 석사 논문 쓰는 데 왜 그렇게 시간이 오래 걸렸는지, 왜 그런 주제로 썼는지, 논문 지도를 어떻게 받았는지, 협동과정은 철학과와 어떻게 다른지, 앞으로 무슨 연구를 할 것인지 등. 내 석사 논문을 이리저리 살펴보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거 쓰는데 고생 많이 했겠는데요?”
  
“원래는 석사 논문을 잘 써서 속죄를 할 생각이었는데 이 정도로는 속죄가 안 될 것 같고 다음에 좋은 논문을 써서 마저 속죄하겠습니다.” 내 말에 선생님은 씩 웃으셨다. “그래요, 고생했어요. 찾아와줘서 고맙습니다.”
  
  
(2017.06.01.)
    

한강 작가 노벨문학상 수상 예언한 알라딘 독자 구매평 성지순례

졸업하게 해주세요. 교수되게 해주세요. 결혼하게 해주세요. ​ ​ ​ ​ ​ * 링크: [알라딘] 흰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소설 ( 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43220344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