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교육 전문가 이강룡은 여백이 있는 글을 쓰라고 말한다. 여백이 있는 글은 엉성한 글이 아니라 군더더기를 모두 없애서 꼭 필요한 말만 하는 글이다. 그러한 글을 쓰려면 주장을 줄이고 근거를 늘려야 하고 감정을 직접 표현하는 대신 그러한 감정을 느낄 여지를 보여주어야 한다고 한다.
이강룡은 다음과 같은 사례를 들었다. 어떤 초등학교에서 민속촌으로 현장체험학습을 갔다. 교사는 학생들에게 유인물을 나눠주고 과제를 하게 했다. 어떤 학생이 한눈을 파는 사이, 지나가던 말이 그 학생이 손에 쥐고 있던 유인물을 뜯어먹기 시작했다. 놀란 학생은 자신의 인쇄물을 말에게 빼앗기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다른 애들은 모두 그걸 보며 웃었고 그날 학생들의 일기 내용은 모두 똑같았다. “오늘 민속촌에 소풍 갔는데 말이 ◯◯의 종이를 뜯어먹었다. 참 재미있었다.” 그런데 자신의 유인물을 말에게 빼앗기지 않으려고 애쓴 그 학생이 쓴 일기는 달랐다. “나는 말에게 종이를 빼앗기지 않느라 고생했다. 왜냐하면 종이 끝에 스템플러가 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이강룡은 그 학생의 일기 같은 글이 여백이 있는 글이라고 말한다. 동물을 보호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하는 것이나 자신이 동물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역설하는 것보다 그러한 여백이 더 강한 힘을 가지며 그 학생의 따뜻한 마음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게 생각만큼 잘 안 된다는 것이다. 글로 먹고사는 사람 중에도 이런 걸 잘 못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이들은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첫 번째 유형은 여백이 뭔지 아예 모르는 부류다. 이들은 대놓고 감정 상태를 기술한다. 그런 글을 쓰는 저자는 혼자 감동받지만 그런 글을 읽는 독자는 차분해진다. 가령 이런 식이다.
강유는 몹시 제갈량을 안타까워했다. ‘불쌍한 분...’
작가는 제갈량이 안 됐다는 것을 강유의 입으로 표현하려고 한다. 그런데 이렇게 해놓으니까 독자 입장에서는 제갈량이 불쌍하다는 것이 와닿지 않는다. 출판한 권수로만 놓고 보면 중견작가 축에 끼는 사람 중에도 이런 식으로 글을 쓰는 사람이 종종 있다.
두 번째 유형은 여백을 억지로 쥐어 짜내는 경우다. 이들은 심심하면 말 줄임표를 붙여서, 무형의 여백을 만드는 대신 문장 안에 물리적인 공간을 만들어낸다.
얼마 전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영화 <역린>의 각본을 소설화한 책을 훑어보았다. 놀랍게도, 소설에 있는 거의 모든 대화마다 말 줄임표가 있었다. 큰따옴표 안에 말 줄임표가 반드시 하나 이상 있었다. 이런 식이다.
“상선은... 어디 있느냐.”, “나는 편전이... 이러이러해서... 좋구나”
나는 <역린>을 보고 현빈이 몸만 좋지 연기를 못한다고, 저게 무슨 목우유마 같은 연기냐고 욕했었는데, 그건 내가 오해한 것이었다. 현빈은 각본대로 연기를 충실하게 했을 뿐이다. 어쩌면 현빈 또한 그러한 각본의 피해자였는지도 모른다.
(2015.0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