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주 강연회에 다녀왔다. 사실, 나는 그 강연회에서 어떤 내용이 나올지 대강 예상했고, 실제 강연 내용도 내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내가 강연회에 간 이유는 청중들의 반응이 궁금해서였다. 텔레비전이나 유튜브나 팟캐스트로는 강연장의 분위기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강신주는 언제나 그렇듯이 자신의 경험에 기초한 자질구레한 이야기를 하면서 곰국에 후춧가루 치듯 철학자 이름을 언급했다. 사람들은 강신주가 시키는 대로 구절을 따라 읽으라면 읽었고 손을 들라면 손을 들었다. 이건 뭔가 싶었는데 나하고 같이 간 친구가 말했다. “이거 꼭 대형교회 같다.”
대형교회 부흥회를 떠올려보자. 강연자는 신도들이 겪을 만한 일상적인 어려움이나 고민을 생동감 있게 묘사한다. 현재 상태에 대한 적절한 기술만으로도 듣는 이는 가벼운 트랜스 상태에 빠질 수 있다. 의도했든 안 했든 신도들을 그러한 상태로 몰아넣은 강연자는 신도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여러분들이 그러한 어려움을 겪는 이유는 당신들이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곳곳에서 “아멘”이 터져 나온다.
어려움(1) 제시 → “맞아요.”
어려움(2) 제시 → “맞아요.”
어려움(3) 제시 → “맞아요.”
....
“왜 그런 줄 아세요?” → “왜요?”
“당신은 죄인이라서요.” → “아멘”
(이런 수법은 홈쇼핑에서도 발견된다.)
여기까지만 오면 이후부터는 쉽다. 신도들이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기만 하면, 구원받기 위해서는 예수를 믿는 것 말고 다른 길은 없다는 것에 동의할 수밖에 없다. 그러고 나면 일요일마다 꼬박꼬박 교회에 나오고 십일조 및 각종 헌금을 해야 한다는 것에도 동의하게 된다.
예수를 믿기 시작했는데 왜 내 인생이 달라지지 않는가, 왜 내 인생은 여전히 이 모양인가. 예수를 진정으로 믿지 않아서다. 그런데 “진정으로” 믿는다는 건 뭔가. 아무도 모른다. 아무도 모르니 아무도 할 수도 없다. 그러니 계속 교회에 나와서 시키는 대로 하게 된다. 물론 초반에 “죄인은 무슨 놈의 죄인, 이건 뭔 소리야?”라고 하면 이후 과정은 진행되지 않는다.
강신주도 비슷하다. 일상에서 겪는 온갖 자질구레한 괴로움을 매우 구체적이고 일상적이고 생생한 언어로 표현한다. 한참을 그러고 나서 이렇게 말한다.
“그건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당신은 죄인입니다”)
여기서 “이게 뭔 소리야?”라고 하면 그 이후 과정은 진행되지 않는다. 하지만 여기서 동의를 하면 다음 과정으로 이어진다.
“인문학은 자신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을 사랑합니다.”)
“인문 정신은 억압과 구속에서 벗어나는 것이에요.”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받아요.”)
그러고 나서 불가능한 것을 요구한다.
“직장 상사가 마음에 안 들면 회사를 때려치우세요!”
“당신 배우자와 재산을 똑같이 나눠서 1년 후에 다시 만나지 못한다면 사랑하지 않는 거예요!”
“당신을 당신 형제들을 사랑하지 않아요! 부모님 돌아가시면 만나지 마세요!”
불가능한 것을 요구해놓고 그걸 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을 꾸짖는다.
“이걸 못하는 건 당신이 ‘진정으로’ 당신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당신이 ‘진정으로’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하기 때문이에요!”)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은 이런 짓을 못한다. 강신주 말에 따른다면 나는 죽을 때까지 나를 사랑할 수 없다.
그런데 강신주 책을 읽거나 강연을 들으면 뭔가 그런 돌파구가 열릴 것 같다(일요일마다 교회에 나가서 목사님 설교를 들으면 구원받을 것 같다.). 비슷비슷한 내용의 책을 계속 사서 읽고 비슷한 내용의 강연을 고개를 끄덕거리며 듣는다(그게 그거인 이상한 설교를 매주 듣는다.). 그리고 돈을 주고 비슷한 책 내용을 사서 읽고는(일요일마다 헌금하고), 주위 사람들하고 뭐가 좋고 뭐가 좋더라는 이야기를 한다(간증한다).
2000년대 이후 개신교 신자의 수가 꾸준히 줄고 있다고 한다. 강신주 현상이 개신교 신자의 감소와 어떤 상관관계가 있지 않을까. 일종의 풍선효과는 아닐지 연구해볼 필요가 있겠다.
(2014.09.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