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지금까지 학술대회에서 발표한 것은 모두 세 번이지만, 학술대회 자료집에 원고를 실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사실, 마감기한을 약간 넘겨서 제출했다) 인공지능을 사용하니 작업 시간이 크게 줄었다.
다루는 내용 중에 모형에서 변수에 개입하는 것과 모수에 개입하는 것의 차이를 논해야 하는 부분이 있었는데, 내 능력으로는 작업하는 데 시간이 꽤 걸릴 수밖에 없었다. 모형에서 변수에 어떤 조치를 취하는 것, 모형이 붕괴되는 것, 모형이 성립하지 않는 것, 이 세 가지는 층위가 다른 문제인 것 같은데, 비판 대상이 되는 논문에서는 이를 구분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다고 아무런 예시도 없이 주장만 늘어놓으면 사람들이 내 말의 진위를 의심할 것이었다. 맞든 틀리든 일단 사례를 제시해야 했다. ChatGPT 등을 사용하며 따져 보니 대충 견적이 나왔다. 이를 약간 수정해서 원고에 넣었다.
지난 두 차례 발표 때는 원고도 작성하지 못했고, 발표 자료도 발표 당일에야 완성했다. 당연히 발표가 제대로 될 리 없었다.
첫 번째 발표 때는 경제학에서의 미시적 기초와 환원주의를 다루었다. 경제학이 사회과학에 포함되기는 하지만 경제학의 철학과 사회과학의 철학은 결이 상당히 다른데, 내가 이 둘을 구분하지 않고 한 발표에서 같이 다루었다.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지만, 되돌리기에는 남은 준비 시간이 부족했다. 일단 어떻게든 발표만 하기로 했다. 사람들이 내 발표에 관심이 없었는지, 생소한 내용이어서 그랬는지, 발표가 엉성해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발표 내용에 대한 유의미한 비평은 없었다.
두 번째 발표 때는 거시경제학에서의 인과를 다루었다. 다루는 내용 자체는 정상적이었지만, 기존 연구가 어떤 내용인지를 주어진 발표 시간 내에 전달할 방법이 없었다. 논쟁 구도만 간신히 설명하고 끝냈다. 기존 연구를 이해하는 것도 벅차서 그에 대한 비판 같은 것도 하지 않았다. 다행히도 몇몇 선생님들이 내가 다루는 분야에 흥미를 보였고, 참고할 만한 정보를 알려주는 선생님도 있었다. 발표 연습을 해야 할 것 같다고 지적한 대학원 선배도 있었는데, 사실, 문제는 발표 능력이 아니라 발표 준비였다.
이번 발표 때는 거시경제학에서의 실재론을 다루었다. 이번에도 기존 연구가 어떤 내용인지 주어진 시간 내에 전달할 방법이 없었다. 해당 분야의 연구 동향을 대강 파악하는 사람이 발표장에서 나 말고는 없을 것이기 때문에, 이번에도 기존 연구의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설명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지난번과 달리 이번에는 자료집에 원고가 실려 있었으므로, 발표 시간 내에 내용을 설명할 부담이 크게 줄었다. 대강의 구도만 말하고 나서 “자세한 것은 자료집에 있다”고 말하며 넘어갈 수 있었다. 세션들이 촘촘하게 배정되어서 발표 시간을 잘 지켜야 하는 상황이었고, 사회자도 이 부분을 강조했다. 나는 발표 시간과 질의응답 시간을 거의 정확히 지켰다.
내가 발표하는 중간에 몇몇 선생님들이 종이가 무언가를 열심히 적는 것이 보였다. 발표하면서 속으로 ‘내가 지금 발표하는 게 저 정도로 열심히 적을 만한 내용은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어서 약간 부담스러우면서도, 선생님들이 흥미로워할 만한 내용인 것 같아서 다행이다 싶었다. 발표가 끝나고 나에게 재미있게 잘 들었다고 인사하는 선생님들도 몇 분 계셨다.
원로 선생님 중에도 발표에 흥미를 보인 분이 계셨다. 박사학위논문을 과학적 실재론을 주제로 쓰셨고 주요 연구 주제도 과학적 실재론인 선생님이다. 발표 끝나고 질의응답 시간에도 손을 들고 질문하셨는데, 세션이 끝나고 나서 나에게 “경제학을 전공했느냐”면서 먼저 말을 거셨다. 나는 학부 때 복수전공했다고 답했다. 그렇게 짧은 질의응답이 다시 이어졌다.
그 선생님은 “언급한 학자들이 정말로 자신들의 연구에 대해 ‘실재론’(realism)이라는 용어를 쓰느냐?”고 물어보셨고, 나는 그렇다고 답했다. 경제학이나 사회과학에서 과학적 실재론 개념이 통용된다는 것이 약간 믿기지 않는 듯했다. 그 다음에는 “경제학자들 중에 이런 논의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있느냐?”고 물어보셨다. 나는 “케빈 후버는 중급 거시경제학 교재도 쓴 것으로 알고 있다”고 답했다. 그 다음에는 “아무리 봐도 최소 실재론(minimal realism)은 실재론이라고 할 수 없는 것 같다”고 하셨다. 나는 “줄리안 라이스도 최소 실재론 같은 거 하려면 그냥 반-실재론자 하라고 말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답했다. 그 선생님은 밝은 표정으로 발표 재미있게 들었다며 인사하고 다른 세션장으로 가셨다. 다음 학술대회 때 “최소 실재론은 실재론인가?”라는 제목으로 발표한다면 그 선생님이 높은 확률로 내 발표를 들으러 오시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 발표를 마치고 나서 몇 가지 생각이 들었다. 첫 번째는 가능하면 학술대회 발표 전에 원고를 작성해야 하며, 특히나 다른 사람들이 잘 모르는 분야일수록 더더욱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발표할 때 준비한 내용 중 일부분을 전달하지 못하더라도 청중들이 너그럽게 넘어가 줄 수 있다. 두 번째는 앞으로 5-10년 동안은 학술대회에서 기존 논의 내용만 잘 정리해서 전달해도 사람들이 계속 흥미로워할 것 같다는 점이다. 흥미 요소만 놓고 본다면, 같은 주제를 심화하는 것보다는 청중들이 접하지 못했을 법한 주제를 소개하는 것이 더 낫겠다. 세 번째는 심화된 내용은 해외 학회에서 검증받을 수 있도록 해야겠다는 것이다. 한국 학회에서는 약간 깊이가 얕더라도 다양한 주제를 다루는 연습을 하고, 해외 학회에서는 약간 더 좁은 범위의 더 깊은 수준의 내용을 다룰 수 있는 연습을 하는 쪽으로, 일종의 이중노선 전략을 써야 할 것 같다. 아직 해외 학회에 가본 적도 없는데 일본이나 대만 같은 가까운 나라부터 발표할 수 있도록 준비해야겠다.
* 뱀발
영어를 안 쓰려고 “투 트랙 전략”을 “이중노선 전략”이라고 했더니, 뭔가 북한의 대남노선처럼 보인다.
(2025.07.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