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철수가 이국종 교수를 언급하며 “문과X가 다 해 먹는 나라”라고 했다는 기사를 읽고, 정말 안철수가 그런 글을 썼을까 싶어서 페이스북에서 검색해 보았다. “문과가 다 해 먹는 나라”나 “문과생이 다 해 먹는 나라”라고 말해도 정치적으로 올바르지도 않고 적절하지도 않은 것 같은데, 대통령 선거 나오는 사람이 굳이 “문과X”라고 했다고? 안철수는 아예 게시글 제목을 <“입만 터는 문과X들이 해먹는 나라”… 이과생 안철수가 좌절을 끝내겠습니다>라고 써놓았다.
이국종 교수를 영입하고 싶은 안철수의 마음은 이해한다. 그런데 입을 잘못 털어 망한 대표적인 이과 출신 정치인이 안철수인데 “입만 터는 문과X들이 해먹는 나라”라고 하는 건 좀 아니지 않나? 안철수 캠프에 입을 잘 터는 문과놈이 없는 것인지, 문과놈이 입을 잘 털게 판을 깔아놓았는데 후보가 말을 안 듣는지 잘 모르겠다.
사실, 입만 털어서 먹고살 수 있는 문과생도 많지 않다. 몇몇 문과 출신 양아치나 사기꾼들이 설쳐서 그렇지, 대부분은 자료에 근거해서 일하고 먹고산다. 법정 영화나 드라마 같은 데서나 변호사가 대충 배심원들 현혹해서 재판 끝내는 것처럼 나오지만, 실제로는 사건 하나에 서류만 몇 보따리인 경우도 많다. 경제학 논문을 보자. 그게 어떻게 입만 털어서 쓴 것인가?
그런데도 ‘입만 터는 문과놈’이라는 관념이 자연스럽게 떠오를 수 있는 것은 그만큼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문과생들도 적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이야 잠잠해졌지만 몇 년 전만 해도 인문학 가지고 염병 똥을 싸는 것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문학이면 문학, 역사학이면 역사학, 철학이면 철학이지 대충 인문학이라고 뭉쳐서는 별놈의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다 했다.
그 시절에 나온 책 중에 『싸우는 인문학』이라는 책이 있다. 2000년대 가요 프로그램에서 힙합 가수들을 꼭 무슨 “힙합 전사”라고 소개하는 것도 아니고, 무슨 놈의 싸우는 인문학인지는 모르겠는데, 하여간 거기에 <안철수는 인문학적 정치인인가>라는 글이 있다. 나는 그 글에서 인상적인 몇 부분을 메모해 놓았는데, 다음과 같다.
안철수 교수는 언젠가 ‘강남 좌파 아니냐’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그가 웃으면서 내놓은 대답은 이랬다. “강남에 살지도 않고 좌파도 아닌데요.” ‘안철수는 인문학적 정치인인가?’라는 물음에도 같은 방식으로 대꾸하고 싶다. [...] 강남에 살지 않고 좌파도 아니지만 그를 ‘강남 좌파’라고 보는 사람들은 여전히 많고, ‘안철수는 인문학적 정치인’이라고 믿는 사람들도 꽤 많다. (27쪽)
안철수에 대한 기대가 나타남과 함께 인문학이 호출되는 배경에는 무한 경쟁, 승자 독식, 양극화, 사회의 정글화 등의 시장주의 추세에서 벗어나 ‘함께 사는’ 세상이라는 공동체적 가치로 전환하기를 바라는, 그리고 지난 한 세대 동안의 신자유주의 드라이브로 누적된 피로―가계 부채에서 우울증에 이르기까지―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국민들의 소망이 있다고 소박하게 해석해볼 수 있다. (29쪽)
안철수 현상에는 기대를 걸어볼 만한 아주 독특한 면이 있었다. 국민들이 ‘관전’만 하고 있을 수 없게 만드는 지점, 안철수의 유보적 침묵이 바로 그것이다. [...] 그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호명한 까닭을 물었다. 정치공학적인 연출이 아니라 진심으로 묻는 것 같다. “왜 나를 부르는 겁니까? 나에게 원하는 게 무엇이죠?” 그는 국민을 큰 타자처럼 대한다. 이런 자세, 이런 물음의 진지함이, 여러 실망스러운 점들[...]에도 불구하고 ‘안철수 현상’에 기대를 걸게 했다. (33-35쪽)
안철수가 대통령이 되면 잘할 거라는 기대가 아니었다. [...] 안철수 현상의 핵심에는 태풍의 눈 같은 ‘빈곳’이 있다. 안철수가 채우려 하지만 잘 안 되는 그 ‘빈곳’, 답하려 하지만 답할 수 없는 그 ‘물음의 자리’를 통해, 사람들이 비로소 정치적 소통을 해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에게 무엇을 원하는가?”라는 물음은 타자의 장(場)에서 발생하며, 기존 상징 질서가 깨지는 간극에서 나타난다. [...] 그런 물음이 발생하는 ‘빈곳’은 인문학적 사유가 돌아가는 바퀴축의 구멍 같은 곳이다.(35쪽)
인문학적 정치인은 인문학적인 의미에서 정치의 자리에 서는 사람이다. 정치의 자리란 제도권 정치가 아니라 정치라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사태의 근원적 발생 지점을 가리킨다. 인문학적 정치는 (제도나 질서로서의) 정치 이전의 것이며 동시에 그런 현실 정치들의 근원적 발생처이다. 집합적 자아인 ‘우리’가 기성의 자기에 관한 앎을 (잃어)버리고, 자기에 관해 스스로 (되)묻고 (되)찾는 자리, 이것이 정치가 자신의 근원으로 돌아가 맞닥트리는 물음의 자리이며, 인문학이 인간에 대한 인간 자신의 물음을 본질적으로 하는 성찰적 노동인 한에서, 인문학과 정치가 공유하는 공통의 자리이다. 인문학적 정치란 바로 그런 자리에 과감히 서려는 자의 과업이다. 무(無)―계급과 적대라는, 공동체의 자기-앎이 허위이자 무인 것으로 판명되는, 심연― 앞의 단독자가 두려움과 떨림 속에서 무 너머에서 오는 자를 예감하는 것이다.(40쪽)
안철수는 인문학적 정치인인가? “입만 터는 문과X들이 해먹는 나라”를 끝내겠단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똥에도 인문학을 붙이고 토에도 인문학을 붙이니, 사람들이 문과생을 우습게 볼 수밖에.
* 링크: [연합뉴스] 안철수 "입만 터는 문과가 해먹는 나라…이과생이 좌절 끝낼것"
( www.yna.co.kr/view/AKR20250417052700001 )
* 참고 문헌
강양구 외, 『싸우는 인문학』, 반비, 2013.
(2025.04.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