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전공자가 자신의 연구나 전공이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데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보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고 권장할 만하다. 그런데 거기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인문학 전공자라면 사회 문제에 대해 한마디씩은 거들어야 하는 듯이 구는 것은 적절한 태도가 아니다. 인문학 전공자가 사회 문제와 관련하여 (다른 학문 전공자에게는 요구하지 않을 법한) 책임감을 느껴야 하며 그에 상응하는 행동을 해야 한다고 믿는 것은 일종의 망상이다. 사람이 살다 보면 고통받을 일이 많은데, 굳이 망상 때문에 추가로 고통받을 필요는 없다.
인문학 전공자에게 다른 사람들은 요구받지 않을 어떠한 고유한 사회적 책임이 있다면, 이는 두 가지 측면에서 따져볼 수 있다. 하나는 (대학원에 다닌 적 없는 사람과 대비되는) 대학원생 또는 학위취득자로서의 측면이고, 다른 하나는 (다른 전공과 대비되는) 인문학과 관련된 측면이다.
어떤 사람이 (정상적인) 대학원에 다니거나 (정상적인 절차를 밟아) 학위를 받는다는 것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어떠한 정보에 접근하거나 이를 다루는 데 더 유리한 조건에 있음을 의미한다. 대학원생이나 학위취득자가 그러한 능력이나 조건을 갖추게 된 데는 그 사회의 물적 기반이 어느 정도 기여했을 테니, 대가를 바라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돕는 것은 바람직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아무리 크립키나 퍼트남이라고 해도, 미국이 아니라 캄보디아나 소말리아 같은 데서 태어났으면 잘해야 반군 수장의 책사 정도나 되었을 것이다. 대학원생이나 학위취득자가 사회에 대한 일정 수준의 책임감을 느끼는 것은 그리 이상하지 않다.
시골 동네에 사는 대학원생이 동네 노인네들의 억울한 사연을 민원 문서로 작성하여 행정기관과 협의하는 상황을 떠올려보자. 노인네들만 사는 시골 동네에서 민원 사항을 문서로 작성할 수 있는 사람은 그 대학원생뿐이다. 외지에 사는 자식들은 시골에 사는 자기 부모가 겪는 자잘한 억울한 일은 알고 싶지도 않고 귀찮아하고 외면하고 싶어 한다. 그 대학원생이 아니고서는 노인네들의 억울한 일을 해결할 수 없다. 이런 상황이라면, 그 동네의 유일한 대학원생이 민원 해결에 책임감을 느끼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 여기서 논하는 것은 사회 문제와 관련된 인문학 전공자의 책임감이다. 한국 사회는 그러한 시골 동네가 아니다. 인문대 대학원생보다 대응 능력이 좋은 사람이 넘쳐난다. 어떠한 사회 문제가 생겼을 때, 인문대 대학원생의 대응 능력이 좋을까, 학부만 졸업한 기자의 대응 능력이 좋을까? 오늘날의 한국은 이승만은 퇴진하라면서 중고등학생들이 거리로 뛰어나오던 예전의 후진국이 아니다. 다들 배울 만큼 배웠고 알 만큼 안다. 요즈음 같은 시대에 인문학 전공자가 학부 졸업자보다 더 큰 사회적 책임을 느껴야 할 이유가 있는가?
인문학 전공자가 다른 전공자보다 더 큰 사회적 책임을 져야 한다면, 인문학 전공자가 다른 전공자보다 사회 문제 해결에 더 나은 능력을 가지거나 인문학이 다른 학문보다 사회 문제와 유관해야 할 것 같다. 그런데 그럴 리가 있나?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고들 하는데, 그러기에는 인문학 전공자가 다른 전공자보다 쥐뿔이나 더 큰 힘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인문학 전공자에게 사회 문제에 접근할 더 나은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다. 전문가 증인 등으로 사회 문제 해결에 인문학 전공자가 기여하는 경우가 있기는 있겠으나, 다른 전공과 비교하면 매우 미미하다. 사회 문제 해결에 인문학으로 기여할 수 있는 것도 별로 없는데 왜 사회 문제에 대한 비-정상적인 책임감을 느껴야 하는가?
인문학 전공자의 사회적 책임은 망상일 뿐 아니라 일종의 오만이기도 하다. 인문학 전공자가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이나 볼 베어링을 만드는 노동자보다 사회 문제 해결에 더 큰 책임감을 느껴야 할 이유가 있는가?
가령, 알코올중독 미치광이 대통령이 친위 쿠데타를 벌이다 실패해서 시민들이 광장으로 나오는 상황이 벌어졌다고 해 보자.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이 자신의 노동이 사회 문제 해결에 도움이 안 된다며 자괴감을 느낀다면, 그게 정상이라고 보아야 할까? 볼 베어링을 만드는 노동자의 경우는 오히려 반대다. 노동자의 볼 베어링 만드는 기술이 시위에 기여하면 안 된다. 한국 사회가 그런 상황까지 가지 않도록 사회 구성원 모두가 노력해야 한다.
대부분의 일반적인 노동자들은, 자기가 직장에서 하는 일이 사회 변혁에 도움이 되네 안 되네 하는 식의 건강하지 않은 자괴감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일과 시간에 자기 생업을 하고, 퇴근하고 거리에 나와서 시위하면 되는 것 아닌가? 생업은 생업대로 가치 있고, 정치적 활동은 정치적 활동대로 가치 있다. 전업 사회운동가가 되지 않는 이상, 일반인들은 그 정도 하면 된다.
연구나 교육도 일종의 노동이다. 인문학 전공자도 다른 노동자들과 마찬가지로 자기 일과가 끝난 다음에 시위에 나가든 하면 된다. 일반적인 노동자들의 노동이나 인문학 전공자의 노동이나 둘 다 노동인데, 왜 인문학 전공자가 자기 노동이 사회 변혁에 도움이 안 되는 것 같다며 자괴감을 느끼면 마치 고뇌하는 지식인처럼 보일까? 도대체 뭐가 그렇게 잘 났으며 얼마나 대단한 것을 하기에 자기가 하는 일이 사회 변혁에 도움이 되네 마네 하는 것까지 고민해야 하는가? 이것이 오만이고 망상이라는 것이다.
만일 한국 사회가 직면한 문제가 사회 내부의 정치적 갈등 같은 것이 아니라 외국의 군사적 침입 같은 것이라면 어떨까? 볼 베어링 노동자의 노동은 전시에 직접적인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이고,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의 노동도 꽤 유용할 것이다. 인문학 전공자도 해야 할 일이 있기는 있을 것인데, 전쟁통에 유물이 파괴되거나 도난당하지 않도록 관리하거나 학회 자료나 서버 등이 없어지지 않도록 간수하는 정도의 일일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것은 인문학 연구라기보다는 부차적인 것에 가깝다. 인문학 연구 자체가 전쟁 상황에 어떤 기여를 할 수 있을까? 거의 없다. 그래서 무슨 문제가 있나? 비트겐슈타인이 1차 대전 때 탄착병으로 활약하는 데 그의 철학은 기여한 바는 거의 없었을 것이다.
망상의 문제는, 하나의 망상이 하나의 고통을 주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망상을 연쇄적으로 불러일으켜 고통이 자가 발전된다는 데 있다. 고통의 자가 발전을 막으려면 망상에서 빠져나와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다. 결국, 헛짓거리를 하며 망상을 충족시켜 심리적 안정을 얻는 쪽으로 귀결되기 쉽다.
망상 자가 발전이 학문의 외피를 쓰고 개억지를 부리거나 확대 해석을 하며 오바하는 것으로 귀결되는 사례를 나는 종종 보았던 것 같다. 그러한 행위가 일종의 사회적 치어리딩이 될 수는 있겠으나, 그 정도 치어리딩을 하는 사람들은 사회에 널리고 널렸기 때문에 그러한 행위가 사회에 별 다른 도움은 안 된다. 오히려 그러한 치어리딩은 해당 전공자가 속한 분야의 취약점만 드러낼 뿐이다.
코로나19 때 지식인의 탈을 쓴 뻥쟁이들이 여기저기 한마디씩 얹고 다녔던 것을 떠올려보자. 문명이 어쨌다는 둥, 근대성이 어쨌다는 둥, 코로나19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둥, 얼굴을 드러내지 못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를 지닌다는 둥, 죄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였다. 그것이 시의성 있는 연구라도 되는가, 지식인의 사회적 참여라도 되는가? 장이 섰으니 장돌뱅이가 모인 것뿐이다. 코로나19 이전으로 못 돌아간다고? 싸이가 흠뻑쇼를 하고 권은비가 워터밤을 하는 마당이다. 상식적인 판단을 하는 사람이라면, 해당 분야 사람들이 평소에도 그런 식으로 대충 아무 말이나 하면서 쉽게 먹고사는 것은 아닌지 의심할 것이다.
굳이 “나 인문학 전공자요~” 하면서 오바 안 떨어도 민주 시민의 책무를 다할 방법은 충분히 많다. 자신의 전공과 연구 분야를 진지하게 대하는 것은 연구자의 덕목일 수도 있지만, 거기에 과하게 몰입하는 것은 건강하지 않은 태도다. 연구자의 덕목을 발휘해야 할 때가 있고, 시민의 덕목을 발휘해야 할 때가 있다.
(2025.0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