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0/25

[생물학의 철학] Weber (2005), Ch 1 “Introduction” 요약 정리 (미완성)



[ Marcel Weber (2005), Philosophy of Experimental Biology (Cambridge University Press), pp. 1-17. ]

p.14

- 8장은 발생 생물학(developmental biology)

- 발생 프로그램은 유기체의 DNA sequence로 쓰여졌다는, 일반적인 생각

- 이 생각이 처한 두 가지 어려움

(i) 이러한 개념은 지향적(intentional)인 것으로 보인다는 것

이는 열린 질문이고, 2장에서 다룰 것임

p.15

(ii) 발생계 이론(development systems theory; DST)으로 알려진, 발생에 대한 철학적 설명의 옹호자들.

p.15

발생 생물학에서의 정보 개념

몇몇 DS 이론가들은 DNA의 nucleotide sequence는 유전 정보를 구성하는 유일한 종류의 것이 아니라고 주장함

(2017.09.23.)


2020/10/24

[한국 가요] 이은미 (Lee Eun-mi)



이은미 - 알바트로스 [온스테이지 플러스]

( www.youtube.com/watch?v=ZnCL8ze2Cm4 )

이은미 - 헤어지는 중입니다 [온스테이지 플러스]

( www.youtube.com/watch?v=7zhk04KyecA )

이은미 - 애인 있어요 [온스테이지 플러스]

( www.youtube.com/watch?v=s2RHOo-qrXk )

이은미 - 어떤 그리움

( www.youtube.com/watch?v=XRQjtQ4VoO4 )

(2019.07.15.)


한국의 대규모 유적지 파괴 사례들

     

교양 프로그램이라고 해야 할지 예능 프로그램이라고 해야 할지 애매한 프로그램들의 공통된 특징이 있다. 심심하면 일본 욕을 한다는 점이다. 일제시대 때 일본놈들이 어떤 나쁜 짓을 했는지 설명하는 것이 방송의 주된 내용인 프로그램도 있다. 물론, 일제강점기 때 있었던 일은 기억해야 하고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우려먹을 대로 우려먹어서 모두가 다 아는 내용을 방송 형식만 바꾸어가면서 되풀이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내가 서른여섯 살을 먹도록 레퍼토리가 바뀌지 않는다. 말하는 사람만 바뀌고 프로그램만 바뀌었을 뿐이다. 사례라도 다양해져야 할 것 같은데 그렇지도 않다.

  

이것이 어떤 것과 비슷하냐면, <개그콘서트>에서 관객들의 박수와 호응을 받으려고 정치인들 욕하는 것과 비슷하다. 개그라고 짜놓았지만 웃기지는 않고 그래도 관객의 호응은 얻어야 하는 상황에서 사람들의 박수와 호응을 얻어내는 손쉬운 방법은 정치인을 욕하는 것이다. 웃기지도 않고 내용도 없고 시사점도 없지만 그래도 사람들이 박수는 쳐준다. 박수 받으려고 일본놈 욕이나 하는 무의미한 방송을 반복한다는 점에서는 유사-교양프로그램도 이와 비슷하다.

  

그런 애매한 프로그램들에서 일제가 조선의 문화재나 유적지를 파괴한 것을 다루는 것을 보면 기분이 묘하다. 사람들은 일본이 저지른 파괴 행위에 그렇게들 분개한다. 그런 모습을 보면 마치 대단한 문화 민족인 것처럼 보인다. 그렇게 문화재나 유적지 파괴에 가슴 아파하는 사람들이라면 한국인이 저지른 문화재나 유적지 파괴에도 가슴 아파할 것이다. 일제시대는 35년이지만 해방 이후 지금까지는 75년이 지났으니 어찌 보면 일본인들이 저지른 파괴보다는 한국인들이 저지른 파괴가 더 심각한 문제일 수도 있다. 그런데 방송에서는 한국인들이 저지른 문화재나 유적지 파괴를 거의 다루지 않는다. 왜 그럴까? 왜긴 왜 그렇겠는가. 애초에 문화 민족이 아니니까 그런 것이다.

     

서울 송파구에 석촌동(石村洞)이 있다. 왜 동네 이름이 석촌동인가? 조선시대에 그곳에 채석장이 있었나? 아니다. 그 동네에 적석총이 많았기 때문이다. 적석총이라고 하면 길림성 집안 지역에나 있을 것 같지만, 석촌동에도 적석총이 많이 있었다. 고구려 왕족이나 백제 왕족이나 조상이 같으니 무덤을 만드는 방식도 비슷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면 왜 지금은 적석총이 몇 개 없는가? 악독한 일본놈들이 다 없앤 건가? 아니다. 한국 사람들이 없앴다. 집 짓는다고 없애고, 도로 뚫는다고 없애고, 강남 개발한다고 없애고, 88올림픽 준비한다고 없앴다. 다 없어질 것인데 역사학자들이 죽네 사네 하며 고생해서 그나마 몇 개 남은 것이다.

  

방송에는 이런 내용이 절대로 나오지 않는다. 누가 이런 내용을 좋아하겠는가? 우리는 문화 민족이고 우리에게 자랑스러운 역사가 있고 우리 조상들은 대단한 사람들이고, 우리가 잠깐 한눈 판 사이에 외부에서 나쁜 놈들이 와서 망쳐놓았을 뿐이라고, 우리의 문제는 그 놈들이 저질러놓은 일 때문이라고 말해야 한다. 그렇게 모든 문제의 근원을 외부로 돌려야 잠깐 화가 나더라도 마음도 편하고 속도 편하고 정신 건강에도 도움이 된다. 석촌동은 방송국에서 멀지도 않은데 굳이 멀리 지방까지 가서 이건 일본놈들이 훔쳐갔고 이건 일본놈들이 없앴다고 하는 방송을 만드는 데는 그러한 공중보건적 고려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1970-80년대 한국은 후진국이었으니까 그렇다고 치자. 지금은 나은가? 강원도 춘천에서는 청동기 시대 주거지 1400여 기가 확인되든 말든 <레고랜드>라는 테마파크를 짓고 있다. 유구한 역사가 그렇게도 자랑스럽지만 그런 유구한 역사를 뒷받침할 유적지는 지역 개발에 방해나 되는 걸림돌이다. 걸림돌이나 고인돌이나 어차피 돌덩이지 뭐가 중요하겠는가. 하긴, 외국 사람들을 만나면 그들에게 싸이나 강남스타일을 아는지를 물어보지 한국의 청동기 유적을 아느냐고 묻지는 않을 것 아닌가.

  

일제시대에 일본놈들이 한반도에 있는 유물을 도굴해갔다고 한다. 도굴은 정말 나쁜 짓이다. 그런데 그것은 개인들의 소행인가, 조선총독부 등에서 시킨 조직적인 범죄인가? 방송에서는 분명하게 나오지 않는다. 석굴암이 하도 눈부시게 찬란해서 일본놈들이 석굴암을 망치려고 일부러 시멘트로 싸발랐다고 하는 방송도 있었다고 한다. 그런 방송을 만든 사람들은 박정희 정권 때 ‘복원’했던 광화문이 시멘트로 지은 것이라는 사실도 몰랐던 것인가? 해방 이후의 대규모 유적 파괴는 개인들이 소소하게 저질렀던 도굴과는 급이 다르다. 정부 차원에서 저질렀거나 방조한 것이기 때문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해방 이후 친일 청산이 안 되어서? 이승만이 친일 부역자들을 채용하고 박정희 등이 만주국 출신이고 한국 사회의 주류가 친일파의 후손이어서? 청동기 유적지를 깔아뭉개고 짓고 있는 <레고랜드>는 민주당 최문순 지사의 역점 사업이다.

  

방송에서 일본 욕을 열 번 할 때마다 그와 관련된 한국의 상황을 한 번씩만 다루었어도 지금보다는 상황이 나았을 것이다. <일본 욕 열 번 할 때마다 한국 한 번 되돌아보기 운동> 같은 것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한다. 꼭 역사도 모르는 놈들이 그런 소리를 한다.

  

  

* 링크(1): [동아일보] 테마파크에 묻히는 한국의 스톤헨지… ‘문화재 참사’ 위기

www.donga.com/news/Culture/article/all/20190727/96718661/1 )

  

* 링크(2): [연합뉴스] 삐걱대던 춘천 레고랜드 공사 순항…“내년 7월 개장 문제없다”

www.yna.co.kr/view/AKR20200521116500062 )

 

* 링크(3): 춘천 중도 레고랜드에 독일 고고학자도 뿔났다!

www.youtube.com/watch?v=eB9YyKLvwa4 )

  

  

(2020.08.24.)

     

2020/10/21

[과학사] Guicciardini (2009), Ch 15 “The Quarrel with Leibniz: A Brief Overview” 요약 정리 (미완성)

   
[ Niccolò Guicciardini (2009), Isaac Newton on Mathematical Certainty and Method (Cambridge, Mass: The MIT Press), pp. 331-337. ]
  
    
뉴튼이 1664-1666년에 유율법을 형식화했으나 발표를 주저한 이유는 무한급수와 무한소 개념 때문에 격렬한 논쟁에 휘말리게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670년대 뉴튼은 새로운 광학 이론의 타당성을 두고 왕립 학회(Royal Society)의 자연주의자들과 논쟁을 벌였는데, 이 논쟁은 자연철학에서 수학의 역할과 관련된 것이었다. 당시 왕립 학회에서는 베이컨 식 경험주의가 유행했는데, 뉴튼은 기하학적 철학을 통하여 베이컨 식 경험주의의 불확실성을 극복할 수 있다고 보았다.
  
1672년 라이프니츠는 외교상의 임무로 파리에 도착했다. 그 당시 라이프니츠는 발전된 수학에 관한 지식이 거의 없는데 라이프니츠의 맞상대인 호이겐스(Huygens)가 이 점을 일깨워주었다. 이후 라이프니츠가 도달한 결과는 뉴튼과 다른 것에서 비롯되었으나 동시에 뉴튼의 것과 동등한 것이었다. 라이프니츠가 뉴튼의 수학 기호에 관심을 보였으나 단순히 수학 기호에만 관심을 보였다고 할 수 없는 것은 (i) 첫째, 수학 기호에 대한 라이프니츠의 연구는 폭넓은 철학적 의제에 의해 진행되었으며 (ii) 1675년부터 미적분의 근본 문제, 즉 연속체의 문제를 고민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올덴부르크는 라이프니츠와 다양한 주제에 관하여 서신을 주고받았고 왕립 학회의 비서인 콜린스는 영국과 스코틀랜드의 수학적 성과를 라이프니츠에게 알려주었다. 라이프니츠는 파리에서 하노버를 가는 도중인 1676년 10월에 런던을 방문했고 1677년 미적분의 구체적인 부분에 대하여 뉴튼에게 답변했다.
  
뉴튼은 『프린키피아』의 주석에서 라이프니츠의 발견을 언급했다. 이는 유럽 수학에서 라이프니츠의 위치에 대한 첫 번째 반응이라고 볼 수 있다. 보조명제2에 대한 주석(Scholium to Lemma 2)에서 뉴튼은 라이프니츠가 독립적으로 그러한 결과를 얻었음을 공적으로 인정했다. 이 주석은 『프린키피아』 3판(1726)에서 라이프니츠에게 비우호적으로 수정되었고 이에 따라 큰 논쟁이 벌어졌다.
  
뉴튼은 동등한 방법(equivalent method)이 영국에서 발전했다고 선언했지만, 미적분이 발전하고 확장된 것은 대륙이었다. 17세기 후반에 라이프니츠와 야코프 베르누이(Jacob Bernoulli), 요한 베르누이(Johann Bernoulli) 형제는 자신들의 작업을 <학술기요>(Acta Eruditorum)에 출판하기 시작했고, 피에르 바리뇽(Pierre Varignon)도 Menoires of the Academie des Sciences에 출판하며 이 무리에 끼어들었다. 이들의 작업은 미적분을 확장하고 발전시키는 것이었는데 이들은 대륙의 수학 수준이 영국보다 우위에 있음을 알았다. 존 크레이그(John Craig)와 데이비드 그레고리(David Gregory) 같은 영국 수학자는 새로운 미적분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학술기요>에 문의하기도 했다.
  
1690년대 월리스(Wallis)는 뉴튼에게 “유율법 개념”이 “라이프니츠의 미적분이라는 이름으로” 대륙에서 유통되니 출판하라고 제안했고 뉴튼은 이 제안을 계속 거절했다. 그러자 월리스는 뉴튼이 작업한 것의 일부를 구해서 <Algera>(1685), <Opera>(1693-1699)에 포함시켰고 라이프니츠의 지지자인 요한 베르누이는 라이프니츠에게 월리스의 <Opera>에 관련된 불평을했다.
  
1697년 1월 베르누이는 최단시간강하곡선 문제(brachistochrone problem)를 “세계에서 가장 명석한 수학자”(뉴튼)에게 도전했고 뉴튼은 해결책을 2월에 익명으로 <Philosophical Transactions>에 게재했다. 이 논문은 곡선에 대한 기하학적 구성을 포함했지만 유율법적 분석을 포함하지 않았다. 1699년 파티오(Nicolas Fatio de Duillier)는 <Lineae Brevissimi Descensus Investigatio Geometrica>에서 라이프니츠가 뉴튼의 유율법을 표절했다고 비판했다.
  
18세기 초반이 되자 상황이 악화되었다. 라이프니츠는 <De Quadratura>(1704)를 1705년에 익명으로 출판했고 그 리뷰를 읽자마자 뉴튼은 분노했다. 그 리뷰는 뉴튼의 방법이 라이프니츠의 미적분보다 열등하거나 시기적으로 늦다는 것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1710년에 존 케일(John Keill)은 왕립 학회의 <Philosophical Transactions>에서 라이프니츠가 뉴튼을 표현했다고 주장했다. 라이프니츠는 왕립 학회 회원이었고 그러한 비난에 대해 사과를 요구해야겠다고 느꼈다. 라이프니츠의 편지는 1710/11년 2/4월에 슬로언(Sloane)에 전달되었고 존 케일은 자신의 정당성을 입증하라는 왕립 학회의 요청을 받고 뉴튼에게 상담을 받았다. 케일은 사과 대신 뉴튼 식 방법의 “몇몇 견본”이 뉴튼, 콜린스, 올덴부르크에 의해서 라이프니츠에게 전달되었다는 증거를 제시했다. 1711년 존 케일은 뉴튼의 수학에 대한 소책자를 출판했고 1711년 12월 라이프니츠는 케일 등의 행위를 중단하게 할 것을 왕립 학회에 요청했다.
  
결과적으로, 왕립 학회 위원회 회장인 뉴튼이 은밀히 지도하여 보고서를 제작하게 하고 50일 후에 <Commercium Epistolicum> 완성되었다. 이 보고서의 주장은 뉴튼이 “첫 번째 발명자”이며 라이프니츠의 미분법은 이름과 기호 표기만 빼고 유율법과 하나이고 동일한 것이라는 것이다. 이 보고서는 라이프니츠가 영국을 방문한 1673년과 1676년 이후에, 그리고 뉴튼의 친구들에게 편지와 기타 자료를 받아본 후에 그리고 1676년 뉴튼에게서 편지와 자료를 받은 후에 유율법에 대한 충분한 정보를 얻었고 기호를 바꾸어 미적분을 라이프니츠 자신의 발견으로 출판할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뉴튼과 라이프니츠의 논쟁은 라이프니츠가 죽은 뒤에도 이어졌다.
  
플란캔슈타인(Fleckenstein), 호프만(Hofmann), 홀(Hall), 화이트사이드(Whiteside) 같은 역사학자는 뉴튼과 라이프니츠가 독립적인 경로로 동등한 결론에 도달했다고 주장한다. 이 책의 저자는 뉴튼이 왜 다른 것이 아니라 특정한 수학적 도구를 선택했는지에 관심을 가졌는지 다음 장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2019.05.24.)
   

녹색정의당의 현재 상황을 4인 가족으로 비유한다면

예전에는 정당이나 정치 상황을 4인 가족으로 비유하거나 풍자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1990년대에는 코미디언 김형곤 같은 사람들이 그런 류의 풍자를 했던 것 같고, 2000년대 초중반까지도 그런 게 있기는 있었던 것 같다. 녹색정의당의 상황을 4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