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1/25

오세정 서울대 전 총장의 강연



과학학과 창립 40주년 기념행사가 있었다. 행사 일정 중에 서울대 오세정 전 총장의 강연도 있었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는데 이틀 간의 행사 중 제일 유익한 시간이었다. 물리학자가 행정가가 되기까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 들을 수 있었다. 다른 곳에서 듣기 힘든 이야기였다. 혼자 조용히 연구하며 지내겠다는 사람에게는 별 쓸모가 없을지 모르겠으나 자연대학이나 공과대학의 교수가 되어 행정을 맡을 수도 있는 사람에게는 들을 가치가 있어 보였다. 꼭 총장이나 학장이 될 사람이 아니더라도 흥미로운 옛날 이야기도 다소 있었다.

오세정 총장이 미국에서 한국에 돌아가야겠다고 마음 먹은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고 한다. 하나는 1980년대 초반에 서울대를 통틀어서 1년에 게재하는 SCI 논문이 다섯 편이었는데 당시 오세정 총장 1년 동안 혼자 쓰는 SCI 논문이 열 편이어서 자신이 한국에 돌아가면 논문 편수를 늘려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다른 하나는 당시 교민들이 한국 이야기 많이 하던데 그걸 보면서 ‘저럴 거면 들어가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BK21 등을 추진하면서 겪은 일화도 소개했다. 오세정 총장이 경북대에서 BK21을 교수들 앞에서 설명해야 했는데 살아나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우성이었다고 한다. 그 때 유시민이 “제가 어떻게 해볼까요?”라고 하더니 5분 만에 그 자리를 평정해서 교수들이 일단은 오세정 총장이 무슨 말을 하는지 듣도록 해놓았다고 한다. 그걸 보고 오세정 총장은 유시민이 능력이 있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교수들이 교수들이 BK21을 바보 코리아라고 부를 때 정도로 반발이 심했는데 나중에는 BK21 사업 중단을 대학에서 반대할 정도로 분위기가 바뀌었다고 한다. 오세정 총장은 성공한 사업과 실패한 사업의 사례를 들고는 대략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 제도 변화가 구성원 행동의 변화를 가져온다(BK21 사업에 의한 대학사회의 변화)

- 최고권력자의 의지가 중요하다(BK21 사업)

- 몇 사람의 아집에 의한 사업은 결국 실패(WCU 사업)

- 정책의 지속성을 위해서는 구성원의 동의를 얻어야

- 정책에는 시의성과 수용성이 중요하다(학부제 도입)

- 자신의 경력보다 정책적 명분과 대의를 중시하는 공무원이나 국회의원은 찾기 어렵다(막강한 공무원 조직이기주의: 연구재단 사무총장의 예)

- 조직화된 세력이 중요하다 (MB 초기 교육과학기술부 변경의 예 - 과총, 한림원 등 과학기술단체의 한계)

- 그러나 정책 실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원칙을 지키는 일(IBS 사업에 대한 논란, BK 사업을 둘러싼 초기 논란)

- 개혁은 선도적으로 해야(자연대 교수인사제도 개혁의 경험)

- 구성원의 동의를 얻은 개혁이라야 지속성이 있다(특히 대학개혁의 경우)

- 조직의 근본적인 변화에는 장기적인 리더십 필요(예: 미국의 대학들, 성균관대)

오세정 총장은 교직원과 관련된 이야기도 했다. 서울대와 성균관대를 비교하며 서울대는 교직원 수도 많지만 교수에 대한 지원은 성대가 더 많다고 했다. 어떤 식이냐 하면, BK 사업 같은 것을 한다고 하면 사업 설명회에 교직원이 가서 들을 뿐만 아니라 어느 교수가 맡아야 하는지도 판단하고 배분한다고 한다. 사업계획서도 일반적으로는 대학원생이나 조교가 쓰는데 성균관대는 교직원이 쓴다고 한다. 오세정 총장이 이에 대해 뭔가를 바꾸어보려고 했는데 성균관대에서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당신들은 안 돼. 성대는 삼성의 서포트가 있고 조직 강화나 개혁을 위해서 10-20년을 했다고. 당신들은 4-5년이면 바뀌잖아.”

나만 강연을 인상 깊게 들은 것이 아니었다. 동료 대학원생 중에도 상당수가 오세정 총장의 강연을 인상 깊게 들었다고 말했다. 다른 할 일이 있어서 잠시 다녀올까 하다가 들은 것이었는데 듣지 않았다면 후회할 뻔했다.

(2023.11.25.)


2024/01/23

변화가 빠르고 예측하기 어렵기 때문에 창의성이나 상상력이 필요하다?



현대 사회는 과거에 비해 변화가 빠르고 예측하기 어렵기 때문에 창의성이나 상상력이 필요하다고들 말한다. 그런데 변화가 빠르고 예측하기 어렵다는 것은 이전 사회와는 다른 현대 사회의 고유한 특징인가? 이전 시대에는 미래를 예측하기 쉬웠나?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을 겪은 조선시대와 21세기 한국을 비교하면 어느 시대가 더 격변의 시대인가? 6.25를 겪은 몇 십 년 전과 오늘날을 비교한다면? IMF 구제금융을 받던 시대를 예로 들며 오늘날의 경제적 변동성을 강조할 수도 있겠지만, 옛날에는 자연 재해 때문에 수시로 경제적 타격을 받았다. 오히려 예전에는 내년에 살지 죽을지도 예측할 수 없는 시대가 아니었나?

기술의 발전만 놓고 보면 오늘날이 확실히 변화가 빠른 것 같기는 하다. 그런데 절대적인 양이 아니라 단위 시간당 변화율을 놓고 보면 이야기는 달라질 수도 있다. 오늘날의 미사일 기술은 놀라운 것이지만, 2차 대전 때 독일의 미사일 기술에서 오늘날의 미사일 기술로 변화한 것의 변화율과 몇 백 년 전에 화약의 발명에서 화약 무기의 개발로 변화한 것의 변화율을 비교한다면 어떨까? 오늘날 사람들이 오늘날 기술을 볼 때 느끼는 놀라움보다 옛날 사람들이 옛날 기술을 볼 때 느끼는 놀라움이 더 컸을지도 모른다.

오히려, 현재가 인류 역사상 가장 안정되고 살만한 시대여서 한가하게 창의성이나 상상력 같은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아닐까? 내가 1930년대나 1940년대에 대해 아는 바는 없지만 그래도 그 시대에는 창의성이나 상상력 같은 소리를 안 했을 것 같은데, 그러든가 말든가 맨하튼 프로젝트 같은 데 참여했던 물리학자들은 당시 인류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창의성과 상상력을 발휘했다. 현대 사회가 정말 위기이고 급변하고 있다면 창의성이나 상상력이 필요하다고 하나마나한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와, 이러다 우리 다 죽는다!”라고 하지 않을까?

(2023.11.23.)


2024/01/22

건설업체와의 민사소송에서 사실상 승소



우리집 사유지를 침범하고도 우리집에 민사소송을 건 물류창고 업체와의 재판이 끝났다. 선고는 11월 21일(화) 오후 2시에 있었다. 판결 내용은, 피고(나의 아버지)는 원고 이◯성(물류창고 업체 사장)에게 720만 원을 지급하고 원고의 나머지 청구를 기각하며 소송비용은 원고들이 90%, 피고가 10%를 부담하라는 것이었다. 원고가 청구한 것이 100,765,271원이니 사실상 원고가 패소한 것이나 다름없다.

민사소송의 판결문은 크게 ‘주문’, ‘청구취지’, ‘이유’로 구성된다.

주문

청구취지

이유

1. 사실의 인정

2. 원고들의 주장

3. 판단

‘주문’에는 법원에서 원고의 청구 중 인정한 것(피고가 원고에게 물어내야 하는 것)과 기각한 것이 나오고, ‘청구취지’에는 원고가 피고에게 얼마를 청구했는지 나오고, ‘이유’에는 법원에서 주문과 같이 판결을 내린 이유가 나온다. 피고가 원고에게 왜 720만 원을 물어내는지는 ‘이유’에 나온다.

법원에서 인정한 사실은, 피고가 세 차례에 걸쳐 공사가 진행되지 못하도록 방해하여 벌금 150만 원을 선고받았고 그 판결이 확정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우리 측 변호사는 우리 집의 “토지에 인접한 2.5-3m인 좁은 농로로 원고들이 대형굴삭기를 이용하여 공사를 진행할 경우 피고측 토지를 침범・훼손할 수밖에 없는 것이어서, 이를 막으려고 한 행위는 민법 제761조 제1항에서 정한 정당방위에 해당하므로 위법성이 조각된다”고 변론했으나, 법원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법원의 판단은 “원고의 공사진행은 개벌행위허가에 따른 정당한 행위이고 인접한 토지의 이해관계인의 동의를 받아야 할 법적 근거는 없다고 보이는 사정 등에 비추어 볼 때, [...] 원고들의 공사가 진행되면 피고측의 토지에 불가피하게 훼손 등이 발생하게 되거나, 피고의 행위가 정당방위에 해당한다고 인정하기는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원고는 손해배상액으로 100,765,271원을 청구했고 법원은 그 중 720만 원만 인정했다. 720만 원 중 220만 원은 “피고의 1, 2차 공사방해로 인해 원고들이 중장비 비용 2,200,000원을 투입하고도 공사를 하지 못한 사실이 인정”되어 물어내는 것이고, 500만 원은 “원고 이◯성은 피고의 불법행위로 계획한 공사가 제때 진행되지 못함으로써 상당한 정신적 고통을 받았을 것으로 보이므로” 위자료로 지급하는 것이다.

아버지가 내가 시키는 대로만 했다면 720만 원도 물어내지 않을 텐데 어쨌든 이 정도 선에서 마무리되어 다행이다. 나는 민사소송을 진행하면서 1천만 원이든 2천만 원이든 합의는 없다고 생각했고, 선고를 앞두고는 3천만 원이든 4천만 원이든 합의는 없다고 생각했다. 걱정했던 것보다 손해배상액이 적게 나왔다. 원고 측이 항소할지 모르겠으나 나는 항소하지 않을 생각이다.

상식적으로 공사업체가 남의 사유지에 들어와서 중장비로 땅을 파헤친 것은 비난받을 일일 수는 있으나, 토지에 아무런 경계 표시도 하지 않았을 경우 해당 토지에 침입하는 것을 법률로 막을 수는 없다. 오히려 공사업체의 사유지 진입을 몸으로 막으면 불법행위를 한 것이 되어 형사로 처벌받고 민사로 배상하게 된다. 이게 불합리해 보일 수도 있겠으나 법에는 틈이 있고 있을 수밖에 없다. 그 틈이 없으면 아무 것도 못 하게 되거나 모든 것을 다 하게 될 수 있게 되니 그 틈은 없어질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간단하다. 사회운동이라면 모르겠으나 개인 간의 다툼에 불과한 것이라면 법률을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모든 수단을 동원하는 것뿐이다. 법 없이도 살 정도로 착하더라도 법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법을 아는 사람에게 당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본다면 물류창고 건설업체는 매우 운이 나쁘다고 볼 수도 있다. 법원에서도 나의 아버지가 공사장비를 몸으로 막은 것이 불법이라고 판단했다. 내가 적법한 조치도 하지 않았다면 업체는 적법하게 공사를 마무리 지었을 것이다. 우리집 근처에 있는 집 중 우리집을 제외한 어느 집도 그 업체를 막을 능력이 없다. 어떤 집은 자기 땅에 건설업체가 사각집수정을 묻었는데도 내가 시청을 통해서 그 사실을 확인하게 하기 전까지 그 사실을 몰랐고, 어떤 집은 남편이 포크래인 기사라서 공사장 사정은 잘 알지만 한 번 허가받은 개발행위허가를 돌이킬 수 없다고 생각했고, 어떤 집은 대대로 남의 땅에 눈독을 들이는 집이라 물류창고가 마을에 들어오는 김에 남의 땅에 길을 뚫어 자기 땅을 개발하려고 했고, 어떤 집은 그 옆집한테 당해서 억 단위로 손해를 보았지만 예수님만 찾고 있었고, 어떤 집은 말이나 많이 할 줄 알고 아는 척이나 하지 공문서만 들이대면 겁 나서 도망갔고, 전 이장이고 현 이장이고 간단한 행정 처리도 할 줄 몰랐다. 동네에 있는 50여 가구 중 물류창고 건설업체를 상대할 수 있는 집은 단 한 가구였는데, 재수 없게도 건설업체는 그 한 가구를 건드려서 이렇게 되었다.

내가 토지에 경계 표시를 하는 등 정비 작업을 한 이후로 건설업체는 불법이 아니고서는 공사를 완료할 수 없게 되었다. 내가 한 것은 법률에 기반한 합법적이고 정당한 행위이라서 이를 두고 어느 누구도 시비 걸 수 없다. 마을에 묶인 건설업체 돈이 14억 원 정도라고 알고 있다. 업체가 흙을 14억 원어치 파가든지 말든지 알아서 할 일이고(물론, 흙을 퍼가는 과정에서 불법행위가 발생한다면 그대로 보지 않을 것이다), 나는 건설업체와 합의할 생각이 전혀 없다.

다른 사람 눈에는 업체와 타협하지 않고 끝까지 가는 것이 어리석어 보일지도 모른다. 변호사도 재판을 오래 끌면 얻는 것 없이 손해만 볼 뿐이니 원고와 타협을 보는 것이 어떠냐고 권유했었다. 그 말도 나름대로 일리가 있지만, 그건 다른 지역에 사는 사람 입장에서나 그러한 것이다. 내가 다른 지역에 살았다면 이 기회에 계획적으로 내 토지를 개발하려고 했을지도 모르겠다. 지금 사는 집에서 앞으로도 상당 기간 동안 살 생각을 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물류창고가 들어섰을 때 예상되는 삶의 질의 저하를 고려한다면, 민사소송에 들어가는 시간이나 비용 등을 충분히 감수할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해야 부모님이 노후를 그나마 편안하게 보낼 수 있다.

또한 이 일은 단순히 개인적인 손익을 넘어서는 것과 관련된다. 내가 가만히 있는데 누군가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나에게 고의로 피해를 준다면, 그 사람에게 최대한의 손해를 입혀야 한다. 내가 치명적인 피해를 입지 않는 이상, 사소한 피해를 감수하더라도 그렇게 최대한으로 타격해야 한다. 이건 일종의 사회 정의나 공동체적인 차원과 관련된다. 착한 사람이 한 사람에게만 착한 행위를 하지 않는 것처럼, 악한 사람도 한 사람에게만 악한 행위를 하지 않는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나에게 고의로 피해를 끼치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도 그와 비슷한 행위를 할 가능성이 높다. 만일 그 사람이 이전에 누군가에게 악한 행위를 할 때 그에 대한 보복으로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다면, 그 사람은 그 피해로부터 회복하느라 나에게 피해를 주지 못했을 것이다. 다른 선량한 사람이 입을 또 다른 피해를 막으려면 내가 그 사람에게 최대한의 타격을 입혀야 한다. 나는 건설업체와 타협하지 않을 생각이다.

* 뱀발

민사재판의 경우 공판에는 법원에 갈 필요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선고 때는 법원에 갈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이번에 알았다.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는 법원에서는 판사가 판결문을 한 줄 한 줄 또박또박 읽고 원고 측과 피고 측의 분위기를 보여주며 재판 결과에 따라 두 측의 희비가 엇갈리는 게 나오지만, 실제로는 민사 재판의 경우 판사가 한 번에 여러 사건의 선고를 하며 선고 내용을 한 사건당 10-20초 정도로 짧게 읽을 뿐이다. 그래서 선고하는 날 방청석에는 변호사로 보이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었고 원고나 피고로 보이는 일반인만 있었다.

(2023.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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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하게 해주세요. 교수되게 해주세요. 결혼하게 해주세요. ​ ​ ​ ​ ​ * 링크: [알라딘] 흰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소설 ( 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43220344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