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5/07

이야기가 엉성한 <맨 프럼 어스>



학교에서 연극 동아리가 공연한 <맨 프럼 어스>를 보았다. 연극을 보는 내내 이야기가 엉성하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작품 각색에서 문제가 발생했을 수도 있어서 영화를 찾아서 봤는데 영화 내용도 연극과 똑같았다. 각색의 문제가 아니라 원작의 문제였다.

영화의 내용은 대충 이렇다. 주인공 존 올드맨은 10년 간 대학에서 교수 생활을 하다가 종신교수직을 거절하고 갑자기 이사간다고 한다. 동료들이 마련한 환송회에서 주인공은 자신이 1만 4천 년을 살았다고 말한다. 자신이 늙지 않는다는 것을 남들이 알아채지 않도록 10년 마다 신분을 바꿔 이주하다 보니, 함부라비 밑에서도 살아보고 부처도 만나보고 하여간 역사 곳곳에 관여했다고 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주인공은 신약성서에 예수로 기록되었음을 털어놓는다. 개그콘서트 <달인>에서 비슷한 장면을 본 것 같다.

이해하기 힘든 점은, 주인공이 자신의 주장을 입증할 수 있는 어떠한 증거나 자료를 제공하지 않는데도 그의 동료 교수들이 죄다 얼빠진 얼굴로 그 말을 믿는다는 것이다. 주인공의 이야기를 듣고 동료들이 괜히 화를 낸다든지 슬퍼한다든지 총을 꺼낸다든지 하는 장면도 있다. 죄다 개연성이 없어 보인다.

주인공이 자신의 경험을 말하면, 그의 동료들은 주인공이 말한 경험이 현재까지 밝혀진 지질학이나 역사학의 내용과 일치한다고 말해준다. 그런데 이것만으로는 주인공의 주장이 입증되지 않는다. 그 정도 이야기는 일정 정도의 상식만 있으면 누구라도 지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주인공이 어떠한 유물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그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되지 못한다. 골동품점에서 샀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주인공이 자기가 1만 4천 년을 살아왔음을 입증하려면 기존 이론과 부합하는 증언이 아니라 기존 이론이 예측하지 못한 놀라운 증언을 하는 편이 더 나았을 것이다. 예를 들어, 예전에는 사마천 『사기』의 진시황 무덤에 관한 기사를 사실로 믿지 않고 설화를 적은 것이라고 믿었는데, 발굴 결과 상당 부분이 사실로 밝혀지면서 『사기』의 사료적 가치가 입증된 바 있다. 진시황릉에 수은으로 강을 만들었다고 했는데 진시황릉 주변 토양을 검사한 결과 수은 농도가 다른 지역의 몇십 배 높게 측정되었다든지, 병마용갱이 발굴되었다든지 등의 사례는 『사기』에 나오는 이야기지만 기존의 역사 이론에서는 사실이라고 믿기 힘든 것이었다.

이를 응용한다면, <맨 프럼 어스>의 개연성을 높일 수 있었을 것이다. 사람들이 예측하기 어려운 놀라운 사실을 주인공이 증언하는 장면을 넣는다면 어땠을까? 가령, 동료 고고학자가 유물을 발굴했으나 아직 학계에 공개하지 않았는데 주인공이 그 곳에서 어떤 유물이 출토되었을 것인지 말해서 그 고고학자를 놀라게 한다든지, 전승되지 않은 기록의 일부를 말해서 기존의 연구에서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를 아무렇지도 않게 해결한다든지 등의 장면을 넣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나름대로 상상력을 발휘해서 가상의 역사적 상황을 만들어낼 수도 있었을 텐데, 영화에서 그런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주인공의 반론도 어설프다. 주인공의 주장이 상식에 맞지 않는다고 반박하자 주인공은 “상대성 이론이나 양자 역학도 상식에 안 맞는다”고 하고, 언제부터 자신이 예수라고 생각했냐는 물음에 주인공은 “당신은 언제부터 정신과 의사라고 생각했냐?”고 반문한다. 이런 어설픈 반론에 박사나 교수라는 사람들이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인다니 말이 되는가?

나는 이 영화의 소재가 흥미롭다는 데까지는 동의하지만, 구성은 그다지 치밀하지 않은 것 같다. 그런데 평론가들은 납득하기 어려울 정도로 <맨 프럼 어스>를 높게 평가하는 것 같다. 어떤 평론가는 “미신숭배자들의 신성을 파괴하는 데서 쾌감과 동력을 얻어 굴러가는 작품”이라고 한다. 내가 보기에 영화에서 제시하는 바는 그냥 상식선에 있다. 성서에는 고대 사회의 여러 신화가 섞여 있고 이교도적인 요소가 혼재하니까 성서를 글자 그래도 믿는 것은 어리석다고 한다든가, 예수의 메시지가 왜곡되어 있다는 것이 그렇게 놀라운 주장인가? 사정이 이러한데, 네이버 영화란에 기자-평론가들은 “꽉 짜인 구성”이네 “논리적으로 착착 꿰어지는 수다가 황홀하”네 어쩌네 한다. 종교만 까면 해방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으니 그러한 평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지만, 적어도 평론가라고 한다면 그러지 말아야 하지 않을까? 그들 수준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2014.03.28.)

2014/04/29

복숭아뼈 옆 반핵 문신



기숙사에서 어떤 여자와 엘리베이터를 탔다. 그 여자는 키가 나와 비슷하고 말랐으며 화장기도 거의 없었다. 나는 별생각 없이 고개를 숙이고 바닥을 보고 있었다. 그러다 뭔가 이상하다 싶어서 보니, 그 여자의 복숭아뼈 옆에 엄지손톱만한 문신이 있었다. 반핵 표시? 보통은 글씨나 그림을 문신으로 새겨 넣는데, 그 여자의 문신은 반핵 표시였다. 문신으로 반핵 표시를 왜?

순간, 그 여자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도대체 저 사람은 뭐 하는 사람인가? 내가 아는 활동가 중에 문신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반핵 문신을 새겨넣을 정도의 사람이라면 어떤 사람인 것인가? 환경단체 회원인가, 채식주의자인가, 무슨 전공인가, 학부 때 무슨 활동을 했나? 아, 궁금하다. 말을 걸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말을 걸면 첫 마디를 뭐라고 꺼내야 하나? 첫 마디를 문신 이야기로 꺼내면 나를 젊은 꼰대로 오인하고 도망가지 않을까? 그렇다고 다른 이야기를 꺼내면 개수작 부리는 놈으로 알 텐데.

고개를 다시 들어 그 여자를 보았는데, 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그 여자가 내렸다. 나는 잠시 멈칫했다가 닫힘 버튼을 눌렀다.

(2013.10.27.)


2014/04/13

평소 행실의 중요성



평소 행실이 이렇게 중요하다.












* 출처: 삼국연의(1993), 11회 완성 전투(宛城之戰)

(2014.02.16.)


노숙자는 수치심이 없을까?



강신주 박사가 2012년 4월 <중앙일보>에 기고한 “수치심은 정신이 살아 있다는 증거”라는 칼럼이 논란이 되고 있다. 실린 지 1년도 훨씬 지난 글이 지금에야 화제가 되는 것은 아마도 그 글이 『감정수업』에도 그대로 실려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강신주 박사가 보기에 서울역 앞 노숙자들은 수치심이 없는 사람들이다. 노숙자들이 길바닥에 널부러져 있는 것은 치욕을 느끼지 않는 것이고, 치욕을 느끼지 않는 마비된 상태에서 감정을 깨우기 위해 필요한 것은 수치심인데 노숙자들에게는 수치심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강신주는 “자존심을 느낀다면 어떻게 노숙자로 살아갈 수 있겠는가?”라고 묻고는 “어떻게 해야 노숙자를 하나의 인격자로 깨울 수 있을까?”를 고민한다.

수치심이 없다면 자신이 한 행동이 부끄러운 것인지 느끼지 못할 것이므로 그 때문에 부끄러운 행동을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부끄러운 행동을 한다고 해서 그 사람에게 수치심이 없다고 하는 것은 섣부른 판단이다.

예전에 건설 노동자를 만난 적이 있다. 그 노동자는 자기들이 왜 파업을 하는지에 대해 말하며 열악한 노동 조건을 설명했다. 자신이 공사장에서 노상방뇨를 하고 있는데 지나가던 어떤 어머니가 어린 자식에게 “어려서 공부 안 하면 나중에 저렇게 된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고 말했다.

노상방뇨를 한 노동자는 수치심이 없어서 그랬던 것인가? 아니다. 수백 명이 일하는 건설현장에 화장실은 한 개밖에 없었다. 공사장에 만드는 노동자를 위한 시설(화장실, 식당 등)은 공사를 끝내면 모두 없애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장은 최소한만 만들려고 한다. 오줌을 바지에 쌀 수도 없고 인근 건물에 가서 해결할 수도 없으니 건설 노동자들은 공사장에서 노상방뇨를 할 수밖에 없다. 이 때 노동자의 수치심은 그러한 행동을 제약하는 조건이 되지 못한다. 이를 노숙자에게 적용한다고 해도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사실, 수치심에 대한 글을 쓰기 위해 언급할 대상은 정말 많다. 여러 층이 있다면 가장 상층부를 언급하는 게 좋을 것이고 그게 여의치 않다면 그 밑에를, 그것도 여의치 않다면 두루뭉술하게 언급하는 것이 온당할 것이다.(강신주 박사가 그 기사를 쓸 당시는 2012년 4월로 마침 대통령이 이명박이었다) 그런데 강신주가 언급한 것은 가장 취약한 계층인 노숙자다. 이들은 명예훼손 소송을 걸지 못할 것이고 신문사에 압력을 넣지도 못할 것이다.

권력자를 비판하는 것이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라서 못 한다고 하자. 그래도 굳이 노숙자를 수치심 없는 사람으로 매도해야 하는가? 강신주 박사가 한양대에서 한 강연 중에 인(仁)을 강조한 적이 있었다. 그 강연에서 강신주 박사가 말한 인(仁)이란 다른 사람의 아픔을 느끼는 것이다.(이런 해석은 양명학적 해석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확실치는 않다.) 강신주는 자본주의가 비-인간적인 삶을 유도한다면서 다른 한편으로 자본주의 사회의 경쟁에서 가장 바깥으로 밀려난 노숙자들에 대해 그런 식으로 말했다. 강신주 박사는 적어도 노숙자의 아픔은 느끼지 못하는 듯 보인다.

강신주 박사는 공중파에 나와서 자본주의를 거부해야 한다고 대놓고 말한다. 얼핏 보면 매우 급진적이고 근본적인 비판인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강신주 박사의 주장은 무력하다. 그가 말하는 사회 문제는 모두 개인의 문제로 환원되기 때문이다. 강신주 박사가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수준은 가정에서 냉장고를 없애는 것 정도밖에 안 된다.

* 링크(1): [중앙일보] 수치심은 정신이 살아있다는 증거 / 강신주

( http://sunday.joins.com/article/view.asp?aid=25595 )

* 링크(2): [경향신문] 인간다운 삶을 가로막는 괴물, 냉장고 / 강신주

( www.khan.co.kr/opinion/column/article/201307212131165 )

(2014.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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