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2/02

[한문] 천자문 (3/14)





19. 盍此身髮 四大五常

蓋(덮을 개) 此(이 차) 身(몸 신) 髮(터럭 발)

四(넉 사) 大(큰 대) 五(다섯 오) 常(항상 상)

무릇 이 몸과 터럭에는, 네 가지 큰 것과 다섯 가지 변치 않는 것이 있다.

- 四大: 천지군친(天地君親). 하늘, 땅, 임금, 부모. 인간 탄생의 근원.

- 五常: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 인간의 변하지 않는 성품.

- 사대가 아니면 사람은 태어날 수 없고 오상이 없으면 생김새만 인간일 뿐 진정한 인간이 될 수 없다는 것

20. 恭惟鞠養 豈敢毁傷

恭(공손할 공) 惟(오직 유) 鞠(기를 국) 養(기를 양)

豈(어찌 기) 敢(감히 감) 毁(헐 훼) 傷(다칠 상)

[부모님이] 살피고 길러주심을 공손히 생각하면, 어찌 감히 헐고 다치겠는가.

- 이 구절은 『효경』 「개종명의」(開宗明義)편의 “몸, 머리칼, 피부에 이르기까지 모두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므로 이를 감히 헐거나 다치지 않는 것이 효의 시작이다”(身體髮膚 受之父母, 不敢毁傷, 孝之始也)를 다시 쓴 것.

21. 女慕貞烈 男效才良

女(계집 녀) 慕(사모할 모) 貞(곧을 정) 烈(매울 렬)

男(사내 남) 效(본받을 효) 才(재주 재) 良(어질 량)

여자는 곧고 매운 지조를 사모하고, 남자는 재사(才士)와 현인(賢人)을 본받는다.

22. 知過必改 得能莫忘

知(알 지) 過(허물 과) 必(반드시 필) 改(고칠 개)

得(얻을 득) 能(능할 능) 莫(말 막) 忘(잊을 망)

허물을 알았다면 반드시 고치고, 할 수 있게 되었으면 잊지 말라.

- 知過必改: 『논어』 「학이」(學而)편의 “잘못을 저질렀다면 고치기를 꺼려하지 말라”(過則勿憚改)를 다시 쓴 것.

- 得能莫忘: 『논어』 「자장」(子張)편의 “날마다 자신이 모르는 바를 알고, 달마다 자신이 할 수 있게 된 바를 잊지 않는다면, 가히 배우기를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다”(日知其所亡, 月無忘所能, 可謂好學也已矣)를 다시 쓴 것.

23. 罔談彼短 靡恃己長

罔(없을 망) 談(말씀 담) 彼(저 피) 短(짧을 단)

靡(아닐 미) 恃(믿을 시) 己(몸 기) 長(길 장)

다른 사람의 단점을 말하지 말고, 자기의 장점에 의지하지 말라.

- 罔談彼短: 맹자에서 나옴

- 靡恃己長: 상나라 22대 임금 무정과 재상 부열에 관한 것

24. 信使可覆 器欲難量

信(믿을 신) 使(하여금 사) 可(옳을 가) 覆(뒤집힐 복)

器(그릇 기) 欲(하고자 할 욕) 難(어려울 난) 量(헤아릴 량)

약속은 [실천에] 옮길 수 있도록 하고, 그릇을 헤아리기 어렵게 되고자 한다.

- 信使可覆: 『논어』 「학이」(學而)편의 “약속이 의로움에 가까우면 그 말은 실천에 옮길 수 있다”(信近於義 言可復也)를 다시 쓴 것.

25. 墨悲絲染 詩讚羔羊

墨(먹 묵) 悲(슬플 비) 絲(실 사) 染(물들일 염)

詩(글 시) 讚(기릴 찬) 羔(염소 고) 羊(양 양)

묵자(墨子)는 실이 물든 것을 보고 탄식했고, 『시경』은 「고양」(羔羊)편을 찬양했다.

- 墨悲絲染: 『묵자』 「소염」(所染)편의 “묵자가 흰 명주실을 물들이는 것을 보고 탄식하며 말하기를 ‘푸른색에 물들이면 푸른빛이 나고 노란색에 물들이면 노란빛이 나니, 집어넣는 물감이 바뀌면 그 빛도 역시 바뀌는 구나’라고 했다”(墨子見染素絲者而歎曰, 染於蒼則蒼,染於黃則黃,所以入者變,其色亦變)를 다시 쓴 것.

- 詩讚羔羊: 『시경』 「고양」(羔羊)편은 소남(召南)의 나라가 문왕(文王)의 정치에 교화되어 벼슬아치들이 모두 검소하고 정직해 새끼 양과 같아졌음을 읊은 시.

26. 景行維賢 克念作聖

景(클 경) 行(다닐 행) 維(벼리 유) 賢(어질 현)

克(이길 극) 念(생각할 념) 作(지을 작) 聖(성인 성)

큰길을 가는 사람은 현명하고, 능히 생각할 수 있으면 성인이 된다.

- 維賢: 세상의 벼리가 되는 현인. 벼리는 그물의 위쪽코를 꿰어 오므렸다 폈다 하는 줄.

- 克念作聖: 『서경』 「다방」(多方)편의 “성인도 생각이 없으면 미혹된 자가 되고, 미혹된 자도 생각할 줄 알면 성인이 된다”(惟聖罔念作狂, 惟狂克念作聖)를 다시 쓴 것. 이는 옛 상(商)나라를 회복하려는 무리들이 주나라에 모반을 꾀하는 일이 자주 발생하자 주공(周公)이 주나라가 상나라를 멸망시킬 수밖에 없는 필연성을 설명한 부분이다.

27. 德建名立 形端表正

德(덕 덕) 建(세울 건) 名(이름 명) 立(설 립)

形(형상 형) 端(단정할 단) 表(겉 표) 正(바를 정)

덕을 세우면 [저절로] 이름이 서고, 모양(외모)을 단정히 하면 드러나는 것(인품)도 바르다.

- 이 구절은 『예기』에 나오는 ‘겉모습이 똑바르면 그림자도 똑바르다’는 말을 다르게 한 것.

28. 空谷傳聲 虛堂習聽

空(빌 공) 谷(골 곡) 傳(전할 전) 聲(소리 성)

虛(빌 허) 堂(집 당) 習(익힐 습) 聽(들을 청)

[덕행은] 빈 골짜기에서도 소리로 전하고, 빈 대청에서도 들림이 겹쳐진다.

- 이 구절은 주역을 정치 철학으로 해석한 구절

- 空谷傳聲: 세상을 다스리는 자의 말이 훌륭하면 천 리 밖에서도 따르지만 그렇지 않으면 어기게 마련이라는 뜻.

- 虛堂習聽: 빈 대청에서 말을 하면 아무도 듣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소리가 울려 퍼져 결국 많은 사람이 듣게 된다는 뜻.

- 習聽: 들림이 여러 번 겹친다는 뜻. 소리가 울려 메아리치는 현상을 말함.

* 참고 문헌

김근, 『욕망하는 천자문』, 삼인, 2003.

박성복, 『천자문풀이』, 대구대학교출판부, 2012.

한정주, 『천자문 인문학』, 다산초당, 2016.

(2024.02.04.)


2024/02/01

종교사회학에 대한 몇 가지 질문



과학철학 석사과정생 중에 목사님이 있다. 신학박사인데 과학철학을 공부하려고 석사과정에 입학한 분이다. 목사님은 석사과정 수료 이후에 학부 수업 강의를 여러 개 하셔서 요새는 학교에서 자주 만나지는 못하고 학과 행사 때나 가끔 만난다. 내가 가끔 종교를 소재로 우스갯소리를 하면 목사님이 그렇게 좋아한다. 어떤 식의 농담이냐 하면, 종교 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그거 사실 다 경제적인 문제 아니냐고 한다든지, 한국 개신교와 관련된 문제를 이야기하다가 그거 다 다른 종교에서도 있었던 일이라고 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특정 시기 특정 사회의 특정 종교에서 비난받을 일이 일어나는 것은 맞지만 그 원인이 종교 내재적인 요소인지 그 종교가 속한 사회적인 맥락인지는 불분명하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가령, 내가 “전도하라는 말은 성경에도 있고 불경에도 있는데 한국에서 유독 개신교만 전도에 악착같은 건, 목사님들은 자영업자고 신부나 스님은 공무원이어서 그런 거잖아요? 그게 성경 잘못은 아니잖아요?”라고 말하면 목사님이 웃음이 빵 터지는 것이다. 맞는 말이고 목사님도 하고 싶은 말이겠지만 차마 목사 신분에 할 수 없는 말인데, 개신교도가 그 말을 대신하니 좋아하는 것이다.

지난 학기에 어느 날은 목사님이 나보고 자기가 하는 학부 수업에 특강 형식으로 한 번 와달라고 했다. 내가 하는 이야기를 학생들에게 들려주고 싶다는 것이었다. 나는 목사님이 내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었다는 것을 저런 식으로 표현하는구나 싶었다. 나는 내가 하는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이 들어도 되기는 하지만 정규 수업에서 그러면 안 된다고 답했다. 그런데 이후에도 목사님은 나를 만날 때마다 자기 수업에 와서 특강 한 번 하자고 했다. 그렇게 나는 목사님의 제안을 너댓 번 정도 거절했다.

지난 주 과학학과 창립 40주년 행사에서 만났을 때 목사님은 다른 때보다 강하게 권유했다. 대구에서 하는 수업이라 멀기는 하지만 차량으로 모셔갔다 모셔오겠다, 식사도 제공하겠다, 강의료도 20만 원 제공하겠다, 강의 준비 많이 안 하셔도 되고 평소 하던 이야기만 해도 된다고 했다. 그렇게 하면 목사님은 그 날 수업해서 금전적으로 남는 것이 거의 없게 된다. 무슨 수업이냐고 물어보니 사회학과 교양수업인 <종교와 사회>라고 했다. 수업이 <기독교와 사회>가 아니라 <종교와 사회>라 동양 종교에 대해서도 말하기는 해야 하는데, 목사님은 동양 철학이나 동양 종교에 대해 잘 모르기도 하고(신학교에 가기 전에는 공대생이었다고 한다) 목사 신분에 다른 종교에 대해 함부로 말하면 안 되는데, 내가 특강을 해주면 수업에서 부족한 부분을 채울 수 있을 것 같다는 것이었다.

나도 개신교 신자라서 목사님이 이렇게 강하게 권하니 마음이 움직이기는 했다. 그런데 사회학과 관련하여 나는 완전히 무자격자인데 특강을 해도 되나? 목사님께 물었다. “<무자격자와의 대화>라고 하면 할 수는 있는데 학부 수업에서 그러면 안 되지 않나요? 예수님이 그러지 말라고 하실 것 같은데요?” 목사님은 한참 웃더니 내가 학부에서 동양 철학을 복수 전공했고 석사학위 논문도 사회과학과 관련되니까 자격이 된다고 했다. 그래도 찜찜했다. 일단 수업 교안을 보고 생각해 보겠다고 했다.

수업 교안을 받아보고 내가 말 몇 마디 정도 해도 될 구석이 있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는데, 그래도 내가 특강을 할 명분이 약했다. 어떻게 명분을 만들어야 하나? 무언가가 떠올랐다. 질문 형식으로 하면 된다. 무자격자도 질문은 할 수도 있으니까, 내가 가르치러 왔다고 하지 말고 질문을 던지러 왔다고 하면 된다. 그렇게 명분에 대한 부담이 사라졌다. 학생들에게 말할 내용을 A4용지 두 쪽 분량으로 정리해서 파일을 목사님께 보냈다. 책임질 수 있는 확실한 사실에 관한 문장 끝에는 마침표를 찍고 모르거나 불확실한 것에 관한 문장 끝에는 물음표를 찍었다. 그런 다음 제목을 “종교사회학에 대한 몇 가지 질문”이라고 했다.

내가 대구에서 학생들에게 했던 이야기는 대충 다음과 같다.

- 나는 사회 현상의 상당 부분은 경제적인 측면으로 설명가능하다고 믿는다. 경제적인 측면에서 보았는데도 답이 안 나왔을 때나 정신, 관념, 문화 같은 것을 찾아야 한다.

- 서구의 사례와 동아시아의 사례를 살펴보는 건 일종의 실험군과 대조군을 보는 것과 비슷한 것이 아닌가?

- 어차피 사람 사는 건 거의 비슷하다. 정말 동아시아적 특수성 같은 것이 있는가? 특수성이 있다면 왜 다른지, 무엇 때문에 다른지 보는 것이 도움이 되지 않을까?

- 동양과 서양을 비교할 때 왜 전-근대 동양과 근대 서양을 비교하는가? 같은 시기의 둘을 비교하면 비슷한 구석이 있지 않은가?

- 마치 불교는 포용적인 종교인 것처럼 여기는 사람들이 있는데 정말 그런가? ‘대승불교’라는 단어 자체가 차별적인 단어인데?

- 부처가 깨달음을 얻고 나서 맨 처음에 화엄경을 설법했다가 사람들이 못 알아먹어서 아함경을 설법했다는 식의 이야기는 기독교의 신교와 구교의 정통성 논쟁과 다른가?

- 본질적으로 다른 종교에 배타적이거나 공격적인 종교가 있는가? 미얀마에서는 불교도들이 무슬림을 학살하는데? 북위 태무제는 도교를 신봉하면서 승려들을 학살했는데? 조선시대 유생들은 불상 머리를 자르기도 했는데? 태국, 미얀마, 캄보디아는 불교 국가인데도 전쟁에서 이기면 상대방 국가의 불상 머리를 잘랐는데?

- 경전의 어떤 부분이 강조될지 결정하는 것은 경전 내재적인 요소인가, 상황적 맥락인가?

- 종교를 비판하는 사람들 중 필요에 따라 선진시대 유가를 들먹이는 사람들이 있는데 송대 유학의 성립 과정을 보면 나름대로 종교적 요구에 부응한 것 아닌가?

- 중국과 한국에서 유/불/도가 평화롭게 공존한 것처럼 구는데 이건 일종의 신화 아닌가? 과정을 보면 별로 평화롭지 않은 것 같은데 현재 결과만 놓고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것 아닌가? 이는 종교 전쟁 같은 것 다 빼고 현재 유럽만 놓고 구교/신교가 평화롭게 공존한다고 말하는 것과 다른가?

- 반야부는 공사상 중심이지만 법화경에는 부처가 슈퍼 파워로 나오고 화엄경에서는 잔뜩 신이 나온 다음에 부처가 신을 이겨먹는다는데, 불교에서 부처가 인간이라고 한다더라 하고 그냥 받아들여도 되나?(물론 인간이라고 하는 건 맞다)

- 종교의 비용과 효용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 종교적 행위는 개인적인가, 공동체적인가?

대충 위와 같은 내용으로 1시간 30분 동안 말한 다음 질의 응답을 받았다. 학생들이 딱히 재미있어 하는 것 같지는 않았는데 목사님은 재미있어 하는 것 같았다. 목사님만 좋아하면 됐다고 생각하며 강의실을 나오는데 목사님이 이렇게 말했다. “오늘 평소보다 분위기가 훨씬 좋았어요. 학생들이 오늘만큼 질문을 많이 한 적이 없어요.” 진짜로 학생들이 좋아했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목사님이 좋다고 하니 다행이었다.

목사님이 강의하는 수업이 오전과 오후로 분반되어 있어서 나도 특강을 두 번 했다. 같은 내용의 특강을 대구에서 오전에 한 번 하고 상주에서 오후에 한 번 했다. 첫 시간에 목사님이 학생들에게 나를 소개할 때는 “본인이 개신교인이라는 정체성이 분명히 있으면서도 다른 종교에 열려 있고 그렇다고 다 받아들이지 않는 균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 분”이라고 말했는데, 두 번째 시간에 나를 소개할 때는 여기에 덧붙여서 “아까 강의하는 것을 처음 들으면서 기독교는 내(목사님)가 맡고 동양 종교는 이 선생님이 맡아서 전국의 대학교를 돌면 대박나겠다고 이 선생님께 말하려다가 말을 안 했다”고 말했다. 솔직히 그 정도는 아니었는데, 어쨌든 목사님이 좋아하시니 다행이었다.

질의응답 때 이런 일이 있었다. 어떤 학생이 여러 번 질문하고 의견도 여러 번 제시했는데 마지막에 이렇게 물었다.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자임을 알면서 예수를 믿지 않는 것도 가능할까요?” 어디서 들어본 것 같기는 한데 그와는 약간 다른 것이었다. “2+3=5이다. 그러나 나는 2+3=5라고 믿지 않는다”에서 믿음은 belief인데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믿는 것은 faith이다. 어떤 식으로 접근해야 할까? 그런데 예수가 구원자임을 아는데도 왜 예수를 안 믿지? 순간, 이런 사례가 떠올랐다.

“만약에 예수가 구원자는 맞는데 쌩양아치라고 가정해봐요. 길거리에서 침 뱉고 지나다니는 사람 어깨 다 부딪치고 막 째려보면서 ‘뭘 봐?’ 그러고 성전에 들어가서 온갖 욕을 하면서 막 다 때려부수고 [...]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인 것도 맞는 거예요. ‘앉은뱅이야 일어나라’ 하면서 뿅 그러면 벌떡벌떡 일어나고, 장님도 눈을 뜨고. 이런 상황이면 구원자이긴 한데 믿음이 안 생길 것 같지 않아요?”

faith는 단순히 belief의 연장선에 있는 게 아니라 belief에 어떤 요소가 추가된 것이어야 할 것 같은데, 이런 것에 대해 생각해 본 적도 없고 종교철학 수업을 들은 적도 없으니 마땅한 게 떠오르지 않아 대충 답변했다. 질문했던 학생에게 “이거 상당히 철학적인 질문 같은데...”라고 하니 목사님이 “저 학생, 철학과예요”라고 했다.

둘이 차 타고 이동할 때 목사님은 내가 이야기한 것 중에서 “쌩양아치”라고 말한 게 제일 재미있었다고 말했다. 목사로서 도저히 할 수 없는 말인데 그런 식으로 들으니 매우 재미있었다고 했다. 도올 김용옥이었다면 예수가 쌩양아치라고 말했겠지만 나는 사례를 들어 설명하기 위해 예수가 쌩양아치인 상황을 가정한 것이지 실제로 쌩양아치라고 생각한 건 아니니까 목사님도 재미있게 들었던 모양이다.

(2023.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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