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언제부터 ‘공감’ 같은 단어를 잘 안 쓰게 되었나? 대략 10년 정도 될 것이다. 한국에서 아무 데나 ‘공감’ 같은 소리를 붙이는 것이 언제부터 유행이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으나, 제러미 리프킨의 『공감의 시대』(이경남 역, 2010년)를 언급만 하면서 아무 말이나 하는 것이 공감 타령 초기의 암묵적 규칙이었으므로, 공감 타령의 역사는 대략 12년 정도 될 것이다. 공감 타령이 널리 퍼지는 것을 보니 ‘공감’ 같은 단어가 입 밖으로 잘 안 나오게 되었다. 가뜩이나 멍청한데 공감 같은 소리나 하고 다니면 정말 멍청해 보일 것이어서 그랬을 것이다.
공감 능력은 중요하다. 사람은 어떻게든 다른 사람하고 교류하고 살아야 하는데 공감 능력에 문제가 생기면 교류하는 데 문제가 생긴다. 내가 정상인지 살펴보는 것도 중요하고, 내 자식이 정상인지 살펴보는 것도 중요하다. 공감 능력의 중요성은 이 정도에서 한정되어야 할 것 같다. 자녀 양육이나 개인의 정신적 건강의 범위를 벗어난 공감 타령이라는 것은, 대체로 개소리 예비 동작에 불과하다.
대중매체에 나오는 공감이라는 것은 인간 관계의 알파와 오메가이자 온갖 사회문제를 풀어낼 마법사의 돌 같은 것이다. 뻥쟁이들은 공감 같은 것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것을 두고도 걸핏하면 공감 능력이 없는 것이 문제라고 말한다. 당연히 그럴 리는 없다.
인간관계에서 공감 능력이 문제가 된다는 것은, 나도 정상이고 상대방도 정상이며 두 사람이 수평적인 관계일 뿐만 아니라 어떠한 이해관계의 충돌이 없는 상황에서 서로 미묘하게 무언가가 맞지 않을 때나 고려할만한 것이다. 보통은, 한 쪽이 정상이 아니거나, 이해관계가 충돌되거나, 멍청해서 말귀를 못 알아먹거나, 수평적이지 않은 관계에서 한쪽이 다른 한쪽을 착취하려고 하는 등의 상황이다. 만일 상사가 정상인데도 상사의 지시를 따르지 못해서 관계가 안 좋다면, 그건 공감 능력이 문제인 것이 아니라 업무 능력이 문제인 것이다. 따지고 보면 공감 능력이 문제가 되는 상황이 그렇게 많지가 않은데도, 공감 타령에 현혹된 사람들 중 일부는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공감 능력 같은 소리를 하면서 자책해서 이중으로 고통받는다. 미친 놈 때문에 고통받는 것인데도 자신에게 공감 능력이 없는지 자책하여 이중으로 고통받는 것이다.
사회 문제에서 공감 능력이 문제가 된다는 것도 말이 안 되기는 마찬가지다. 가령, 세월호 참사와 관련하여 개돼지 같은 소리를 하고 다닌 사람들은, 물론 애초부터 개돼지 같은 심성을 지녔으니 그랬겠지만, 공감 능력 자체에 문제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지지 정당이 부당하게 공격받는다고 판단하여 그랬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들 중 상당수는 자기 가족이나 이웃, 박정희 등에는 놀라운 수준의 공감 능력을 발휘할 것이다. 반대편도 마찬가지다. 세월호 참사와 관련하여 그렇게 가슴 아파하던 사람들 중 일부는 민주당 인사들의 성폭력 사건에 대해 매우 냉담한 반응을 보였을 것인데, 세월호 참사 때 충격을 너무 많이 받아 맛이 가서 그런 것이 아니라 자기편이 부당하게 공격받는다고 판단하여 그랬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사례들은, 공감 능력의 문제 때문에 판단이 맛이 가는 것이 아니라, 판단 능력의 문제 때문에 공감 능력이 맛이 가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정말로 공감 능력의 문제라면, 왜 (특정 정당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 아동 성폭력 등에 대해서는 지지 정당에 상관없이 분노하겠는가?
개인적인 문제든 사회적인 문제든, 대개는 무엇이 잘못되었고 어떤 점에서 잘못되었는지, 누구에게 책임이 있고 얼마나 책임이 있는지 등을 따지면 되는 일이다. 그런데도 왜 사람들은 공감 같은 소리나 하는가? 대충 뭉개기 쉽기 때문이다. 공감 타령이 확산된 데는, 공감만큼 대충 뭉개는 데 적합한 단어도 없다는 점도 한몫 할 것이다.
기업에서 신제품을 만들어서 이를 홍보해야 하는데 홍보 문구가 마땅치 않다고 하자. 기능이 추가되었다고 하고는 싶은데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공감 같은 소리를 하면 된다. 소비자와 공감하니, 주부에게 공감하니, 애새끼에게 공감하니 등등. 방송에서도 쓸 수 있다. 작가가 원고 분량을 채워야 하는데 내용이 너무 개소리인 것 같다고 하자. 대충 아무거나 주워가지고 와서는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고 있다고 하면 된다. 섬세한 감정 표현이 필요한데 시간이 부족하다면, 역시나 공감으로 대충 후려치면 된다. 선거에 출마해야 하는데 공약이 잘 와닿지 않는다고 하자. 주민과 공감하는 정치를 하겠다고 우기면 된다. 사회 문제에 대해 아는 척 하고 싶어 죽겠는데 딱히 아는 것은 없다고 하자. 아무 문제나 붙들도 공감 같은 소리나 하면 된다. 대충 뭉개고 가는 데는 공감만 한 것이 없다.
그러면 개소리쟁이들에게 낚인 호구들은 피곤하게 재고 따지지 않고 공감 같은 소리나 하며 행복하게 지내는가? 그렇지 않다. 한국에서 공감 능력 타령을 하는 동안 쥐뿔이나 무슨 공감 능력이 늘어났는가? 주변에 있을지 모르는 사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를 어떻게 색출할지나 열을 올렸을 뿐이다. 그런데 그들은 이미 건강하지 않은 일체감을 향유하는 법을 익혔다. 그런 일체감을 계속 맛보려면 다른 사람에게 공감을 강요하는 수밖에 없다. 어떤 것을 제대로 설명하지도 못하고 논증하지도 못하고 주장하지도 못하고 심지어 묘사하지도 못하면서, 상대방이 뜻뜨미지근한 반응을 보이면 자신의 설명 능력 등을 반성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공감 능력을 탓한다. 다 큰 어른들이 그러고 앉았는 것이다.
중학생 딸에게 공감 능력이 부족하다는 핀잔을 들은 아버지가 공감 능력을 키워야겠다고 마음 먹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중학생은 그럴 수 있고 그래도 된다. 중학생이라면 30-40년 전에 10대였는 데다 여자였던 적도 없는 자기 아버지가 자신과 30-40살 차이나는 10대 여자아이의 감정을 짐작하기 어렵다는 것조차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다 큰 어른들이 공감 같은 소리나 하면서, 자기 비위를 안 맞추어준다고 공감 타령이나 하며 찡찡거리는 것이 정상인가? 장세동이 전두환의 심기 경호 해주는 것도 아니고, 자기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공감을 요구하는 것이 과연 정상인가?
공감 능력은 중요하다. 중요한 건 알겠는데, 다 큰 어른들이 공감 같은 소리나 하면서 애새끼처럼 찡찡거리는 것은 정상이라고 할 수 없다. 한 나라의 국회의원이라는 사람이 장관에게 질의하는 자리에서 공감 능력 같은 소리나 하고 앉았는 것을 보니 끔찍하다. 천지분간 못하고 공감을 요구하는 것을 ‘공감병’, ‘공감강박증’으로 부를 수 있을까? 일종의 사회병리적 현상일지는 모르겠으나, 하여간 정상적인 현상은 아닌 것이 분명하다.
* 링크: [SBS] 고민정 민주당 의원 “어떻게 이렇게 공감 능력이 없습니까?” 공세에 한동훈 법무부장관 대답은? (현장영상)
( www.youtube.com/watch?v=dMbyxFMnqNM )
(2022.05.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