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Werner Heisenberg (1958), Ch 8 “Criticism and Counterproposals to the Copenhagen Interpretation of Quantum Theory”, Physics and Philosophy: The Revolution in Modern Science (Harper & Brothers Publishers), pp. 128-146.
하이젠베르크, 「8장. 코펜하겐의 해석에 대한 비판과 반론」, 『하이젠베르크의 물리학과 철학』, 구승회 옮김 (온누리, 2011). ]
많은 물리학자와 철학자들은 이론 자체의 비결정적인 토대와 측정 개념의 불완전한 해명에 기초하여 양자 이론의 코펜하겐 해석을 비판함.
즉, 비판자들은 물리학이라는 기념비적인 학문에 확률이라는 비결정적인 개념을 도입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으며 한편으로는 확률 함수를 비확률적인 결과로 변화시킨다는 측정의 신비한 역할에 의문을 품었다는 것.
“나는 그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한다.” “당신은 당신이 달을 쳐다보지 않으면 정말로 달이 그곳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나요?”와 같은 아인슈타인의 코멘트는 그러한 양자역학 비판자들의 생각을 드러냄.
코펜하겐 해석의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하나인 하이젠베르크도 당연히 그러한 비판자들을 잘 인식하고 있었고, 책의 한 장(chapter)을 코펜하겐 해석에 대한 비판에 할애함.
코펜하겐 해석을 대체하고자 노력하는 집단은 크게 세 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음.
첫 번째는 지금까지의 실험 결과에 관한 한 코펜하겐의 해석의 실험 결과를 예외 없이 받아들이지만, 거기에 적용된 언어를 다른 것으로 대체하고자 함.
즉, 코펜하겐 해석의 철학적 기초에는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
두 번째 부류는 실험결과가 코펜하겐의 해석의 예측들과 일치할 경우, 그러한 해석이 바로 유일하고 적절한 해석이라는 긍정적인 인식으로부터 출발함.
따라서 이 부류의 연구는 양자 이론을 완전히 거부한다기보다는 비판적 관점에서 변경하려 함.
세 번째 부류는 (하이젠베르크에 따르면) 철학적이건 물리학적이건 간에 아무런 반대 의견도 제시하지 않은 채, 양자론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는데, 이 부류에는 아인슈타인, 폰 라우에, 슈뢰딩거 등이 포함되어 있음.
물론 코펜하겐 해석에 대한 반대는 이 부류의 사람들에 의해 가장 먼저 제기되었다 할 수 있음.
위에서는 반대자들을 세 부류로 나누었지만 그들도 한 가지 점에서는 일치하는데, 그것은 그들의 관점에 따르면 고전 물리학의 현실 표상에 대한, 다시 말해 유물론적 존재론으로의 회귀에 대한 소망, 즉 객관적 사실적 세계의 표상, 또 이 세계의 가장 작은 부분들마저도 우리가 관찰하건 못하건 간에, 돌이나 나무들처럼 객관적으로 존재한다는 객관적 사실적 세계의 표상에 대한 그들의 소망이라고 할 수 있음.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들의 이런 표상은 불가능하고, 책의 앞부분에서 논의한 것과 같이 원자 현상의 속성에 의해 완전히 가능하기는 어려움.
하이젠베르크는 우리의 과제가 원자 현상이 어떠해야 한다는 희망 사항을 피력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강조하면서, 그들에게 새로운 과학을 받아들일 것을 종용함.
앞서 언급했던 첫 번째 부류의 연구는 단지 코펜하겐의 해석을 상이한 언어로 반복하고 있을 뿐임.
따라서 우리는 이와 관련하여 다만 그 언어의 합목적성만을 논의할 수 있음.
이런 반대 제안을 하는 집단의 한 부류는 ‘숨은 변수’라는 관념을 활용하는데, 그 이유는 양자론적 법칙이 실험 결과를 주로 통계적으로 예측하기 때문에, 실제로 그 전에 받아들여진 인과적 방식 속에서 실험의 출발을 규정하는 숨겨진 변수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 즉 여전히 그들이 고전물리학의 관점에 기울어졌기 때문임.
그래서 이들 중 몇몇은 이 변수를 양자역학 내에서 구성하고자 하였는데, 예를 들어 봄(Bohm)의 경우 입자를 뉴턴 역학에서 말하는 질점과 같은 객관적 사실적 구조라고 봄.
위상공간에서의 파동은 그의 해석에서는 탄성장과 같이 역시 ‘객관적으로 실재’함.
하지만 위상공간은 매우 추상적인 공간이며 사물은 추상적 위상공간이 아니라 언제나 우리의 삼차원 공간에 있음.
따라서 그러한 파동이 실제적, 사실적이라고 말할 근거는 없음.
또한 봄은 불변하는 위상의 평면을 수직으로 나누는 선을 입자의 가능한 궤도라고 정의함.
이 선 중의 어느 것이 입자의 실제적인 궤도인가는 계측장치와 체계의 역사에 달려 있으며, 그것들에 대해 실제로 알려진 것 말고 더 많이 알지 못하고서는 결정할 수 없음.
봄은 “양자론의 영역에서 우리는 단일한 체계의 정확하고, 합리적이며, 객관적인 서술을 포기할 필요가 없다”고 말함.
하지만 이 객관적 서술은 스스로를 물리학적 실재와는 거의 상관이 없는 일종의 ‘이데올로기적 상부구조’로 드러남.
왜냐하면 봄의 해석에 있어서 숨은 변수는 양자론이 변경되지 않는 한 실제 과정을 서술함에 있어서 한 번도 나타나지 않는 성질의 것이기 때문임.
봅(Bopp)과 페니즈(Fenyes)의 통계적 해석도 반박가능함.
봅은 입자의 생성과 소멸을 양자론의 근본적인 과정으로 이해함.
입자는 고전적인 언어의 의미로 보았을 때 ‘사실적’이고 ‘실제적’임.
여기서 양자론의 법칙은 입자의 생성과 소멸과정에 관련되는 ‘상관적 통계’의 독특한 경우로 이해됨.
이러한 봅의 해석은 모순 없이 수행될 수 있고, 물리학적으로 코펜하겐 해석과 동일한 귀결에 이름.
그러나 이 해석은 양자론의 수학적 구조에서 아주 독특한 특징인 파동과 입자의 대칭 관계를 파괴함.
1928년에 이미 요르단, 클라인, 위그너 등은 수학적 구조는 하나의 입자 운동의 양자화일 뿐만 아니라, 삼차원 물질파의 양자화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보여줌.
물질파가 입자보다 덜 실제적으로 관찰된다는 것은 아무런 근거가 없음.
블로친체프(Blochinzew)와 알렉산드로프(Alexandrow)의 연구는 지금까지의 문제제기와는 전혀 다름.
이들은 처음부터 자신들의 반대 논거를 문제의 철학적 측면에만 국한함.
물리학적 측면에서는 코펜하겐의 해석을 아무런 반대 없이 받아들이지만, 논쟁의 외양은 훨씬 더 날카로움.
유물론적 존재론을 옹호하는 이들의 논의는 무엇보다도 양자론의 해석에 있어서 관찰자의 입장을 공격하는데 맞춰져 있음.
알렉산드로프에 따르면 관찰자의 안내자로서의 역할은 배제되어야 하고, 객관적 조건, 객관적 효과만을 다루어야 함.
물리적인 크기는 현상의 객관적 특성일 뿐, 관찰의 결과가 아님.
그에 의하면 파동방정식은 전자의 객관적 상태를 규정하는 것.
알렉산드로프의 이러한 설명은 어떤 체계의 계측 장비와의 상호작용은 만약 장비와 체계가 외부 세계와 단절된 것으로 보고, 전적으로 양자역학에 따라서만 다루어진다면 우리는 어떤 일정한 결과에 도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간과함.
만약 누군가가 “그러나 사진검판은 실제로 일정한 지점에서의 상호작용이 있었기에 검게 되지 않았느냐”고 이의를 제기한다면, 그는 전자와 검판으로 구성된 차단된 체계에 대해서는 양자역학을 포기하는 것이 됨.
이는 일상의 개념으로 서술될 수 있는 결과의 구체적인 성격으로서 이런 특성은 양자론의 수학 공식에 포함되어 있지 않으며, 코펜하겐의 해석에서 관찰자의 안내를 통해 들어감.
물론 관찰자의 안내를 자연을 설명함에 있어서 필수불가결한 어떤 주관적 요소라고 잘못 이해해서는 안 됨.
관찰자는 오히려 작용이나, 현상, 다시 말해, 시공간 내에서의 과정을 기록함.
여기서 관찰자가 실험장비인가, 생명체인가는 문제되지 않음.
그러나 기록, 가능성에서 실제적인 것으로의 이행의 기록은 양자론에서 떼어낼 수 없는 꼭 필요한 일임.
블로친체프는 알렉산드로프의 의견과는 약간 다른 생각을 가짐.
그에 의하면 양자역학에 있어서 입자의 상태 그 자체는 서술되지 않고, 입자가 어떤 총체에 속하는가만 기술되지만 입자의 소속은 완전히 객관적인 성격을 가질 뿐, 관찰자의 진술과는 무관함.
그러나 블로친체프가 양자론에서 한 체계의 총체로의 귀속성이 객관적인 무엇임을 보여주고자 할 때, 그는 ‘객관적’이라는 용어를 고전물리학과는 다른 의미로 사용함.
왜냐하면 고전물리학에서의 귀속성은 체계에 대한 진술뿐만 아니라 관찰자의 체계에 대한 이해도에 관한 진술도 의미하기 때문임.
코펜하겐 해석에 대한 두 번째 반론
이 부류의 반대론자들은 다양한 철학적 해석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양자론 자체의 변화를 시도함.
야노시가 이런 방향으로 연구를 진행했는데, 그의 비판의 초점은 소위 파속의 붕괴, 다시 말해 관찰자가 계측 결과를 지식으로 삼으면, 체계를 서술하는 파동함수는 불연속적으로 변한다는 사실임.
야노시는 이러한 환원은 슈뢰딩거 방정식으로부터 추론될 수 없다고 확증했으며, 이로써 ‘정통파’ 해석은 모순에 귀결된다고 믿었음.
‘가능’에서 ‘실제’로의 전이가 완료되면, 코펜하겐 해석에서는 언제나 파동군의 환원이라는 문제가 등장함.
아울러 계측장치가 체계 및 외부 세계와 불확정한 상호작용을 함으로써 생기는 ‘간섭집단’의 제거는 전제조건이 됨.
야노시는 ‘진동감쇄형’을 끌어들임으로써 간섭집단은 제한된 시간 후에 저절로 소멸된다는 식으로 양자역학을 변경하고자 함.
그러나 지금까지의 실험 결과는 그의 새로운 해석을 지지하지 않는 것으로 보임.
세 번째 부류의 반대자에 속하는 슈뢰딩거는 입자가 아니라 파동의 객관적 모습을 문제 삼는 한, 약간의 예외를 인정함.
그는 파동을 단순히 확률파로 해석하기를 거부하며, 양자 비약을 전면적으로 부정함.
그는 위상공간에서의 파동만이 삼차원의 ‘물질파’ 혹은 ‘복사파’가 아니라, 통상의 해석에 있어서 확률파라는 사실을 빠뜨림.
삼차원의 물질파는 입자와 마찬가지로 너무나도 객관적이고 실제적임. 이는 확률파와 도무지 관련이 없음.
아인슈타인, 폰 라우에의 연구가 나타내고자 한 비판은 결국 코펜하겐의 해석이 진실로 물리적 사실을 객관적으로 분명하게 서술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였음.
이들의 중요한 논지는 다음과 같이 전개됨.
양자론의 수학적 체계는 원자 현상의 통계학에 대한 아주 적절한 설명임.
원자과정의 확률에 관한 양자론의 주장이 전적으로 타당하다면, 이 해석은 우리들의 관찰과는 무관하게 원자에 실제로 무엇이 일어났는가에 대한 설명이 아닌 것이 됨.
그러나 무언가가 일어나야 한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음.
이 ‘무언가’는 어쩌면 전자, 파동, 입자와 같은 개념으로 설명될 수 없는 것일 수 있음.
하지만 이것이 설명될 수 없는 것인 한 물리학의 과제는 충족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음.
“양자물리학은 오로지 관찰행위의 문제이다”라는 말은 허용될 수 없음.
그래서 코펜하겐의 해석은 원자과정에 대한 아무런 실제적인 이해를 보증하지 않음.
이에 대해 코펜하겐 해석은 뭐라고 답할 수 있는가?
‘원자물리학자는 실험에서 실제로 무엇이 일어났는가를 설명해야 한다’고 요구할 경우 ‘설명’, ‘실제로’, ‘일어난다’라는 단어는 단지 일상생활 혹은 고전물리학의 개념과 관련될 수 있음.
물리학자가 이 근본원칙을 깨고자 하면 바로 정확하게 이해시킬 가능성은 사라질 뿐만 아니라, 학문을 더 이상 진전시킬 수 없게 됨.
그러므로 무엇이 실로 일어나고 있으며, 일어났는가 하는 진술은 전부 고전물리학의 개념으로 진술됨.
고전물리학의 개념은 열역학과 ‘불확정성의 원리’ 때문에 원자과정의 개별적인 사태에 관해 원래 불완전함.
양자론적 과정에서 두 번의 연속적인 관찰 사이에서 무엇이 일어나는가를 설명해야 한다는 요구는 ‘형용의 모순’임.
왜냐하면 이 개념은 두 관찰 사이의 공간에서 사용될 수 없는 반면에, ‘묘사한다’는 단어는 이미 고전개념의 적용을 지칭하고 있기 때문임. 이 개념은 언제나 관찰의 순간에만 적용될 수 있음.
유물론의 존재론은 우리가 존재의 확실성, 나아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의 직접적인 확실성을 원자영역에서 추출할 수 있다는 환상에 뿌리를 두고 있으나 그러한 ‘추출’은 불가능함.
코펜하겐의 해석에 대한 지금까지의 모든 반론은, 여하간 양자론의 본질적 특징인 입자파동 이중성을 제물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음.
그래서 우리는 대칭 특성을 당시 상대성이론의 ‘로렌츠불변수’처럼 자연의 진짜 속성이라고 간주하는 한, 코펜하겐의 해석은 불가피했음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며, 지금까지의 모든 실험이 이를 증명함.
하지만 하이젠베르크의 반론에 의해 모든 코펜하겐의 모든 문제들이 해결된 것으로 보이지는 않음.
가령, 스티븐 와인버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코펜하겐 해석은 관찰자가 측정을 행하였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묘사하지만 관찰자와 측정이라는 행위 자체는 고전적인 것으로 취급한다. 이것은 확실히 잘못된 것이다. 물리학자와 그들의 기구는 반드시 우주의 모든 것을 관장하는 동일한 양자 역학적 규칙의 지배를 받아야만 한다. 그러나 이러한 규칙들은 완벽하게 결정론적인 방식으로 진행되는 파동 함수의 용어로 표현된다. 그러면 코펜하겐 해석의 확률 규칙들은 어디로부터 유래하는 것인가? 보어와 아인슈타인 모두 양자역학의 진짜 문제에는 초점을 맞추지는 않았다. 코펜하겐 규칙은 잘 작동하고,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수용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파동 함수의 진행을 설명하기 위해 결정론적인 방정식을 관찰자와 그들의 기구에 이론을 적용했다는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다.”
결국 이 열린 물음에 답하는 것이 양자역학의 코펜하겐 해석을 더욱 완전하게 하거나 아니면 그것을 거부하고 새로운 해석을 받아들이게끔 하는 중요한 분수령이 될 것임.
(2022.1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