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2/09

[과학사회학] 김기흥 (2009), 12장. “우리에게 광우병은 무엇인가?” 요약 정리 (미완성)

   
[ 김기흥, 『광우병 논쟁』 (해나무, 2009). ]
  
   
  1. 한국의 광우병 파동
  2. 사전 예방 원칙
  3. 과학적 연구기반 구축
  4. 인간광우병 취약성에 대한 논란
  5. 유럽연합은 왜 미국산 쇠고기를 수입하지 않는가?
  6. 과학의 절대적 객관성에 대한 뜨거운 열망
  
   
  1. 한국의 광우병 파동

231
유럽의 광우병 발생률은 저하되고 있지만 영국의 예에서도 알 수 있듯이 광우병은 그 국가 의 농업 분야에 치명적 타격을 가하고 엄청난 경제적 손실을 가져옴.
    
232-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둘러싼 여러 가지 충돌
‘불확실한’ 현실에 대해 막연한 확률이나 가능성의 논리로 풀어 나가는 자세를 지양해야 함.
광우병 전문가인 일본 도쿄대 가네코 기요토시 교수: “단 한명의 국민이라도 광우병으로 인한 희생자가 나와서는 안 된다.”
2008년 한국 정부는 ‘확률론에 바탕을 둔 원칙’


  2. 사전 예방 원칙

234-
광우병은 잠재적인 질병이며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영역.
이러한 질병에 대한 최선의 대처 방법은 고도의 ‘사전 예방 원칙’에 기반하는 것.

236-237
한국에서 벌어진 광우병 논쟁의 어느 쪽도 과학적이라고 내세운 근거들은 아직 논란의 대상이고 증명되지 않은 것들.
또한 그저 국제조직의 최소 기준만을 충족시키면 문제는 해결된다는 식의 주장이 올바른 정책 판단의 원칙인지는 생각해보아야 함.
최소한의 기준을 충족하는 것이 곧 안전한 것이라고 믿기에는 불확실성이 너무 큼.
시민들의 건강권을 지키기 위해서는 과학적 원칙을 넘어설 수 있는 사전 예방 원칙을 적용하는 것이 중요할 수 있음.


  3. 과학적 연구기반 구축

237-
과학적 연구기반을 구축하는 것도 우리나라에 시급한 부분.
한국에는 전문적으로 스크래피나 광우병을 연구하는 연구소 전문 인력이 턱없이 부족한 실정
그런 열악한 상태에서 미국산 쇠고기 수입 문제에 대해 미국 측이 제시한 과학적인 자료에 반박할 여력이 있었겠는가 하는 당연한 문제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4. 인간광우병 취약성에 대한 논란

241-
일단 광우병이 발생한 나라들에서는 예외 없이 인간광우병인 변종 CJD가 발병.
특히 지난 광우병 파동에서 논란이 되었던 ‘한국 인구의 유전적 연구를 통한 프리온 질병의 취약성’에 대한 논문은 중요한 시사점을 제기.
그러나 취약성 문제도 불확실성이 높은 영역이므로 단순히 유전자라는 변수만으로는 취약성을 판단하기 어려움.
더군다나 쇠고기 섭취가 아닌 수술과정에서 받은 수혈을 통해 전염된 사례들도 염두에 둬야할 중요한 사안.


  5. 유럽연합은 왜 미국산 쇠고기를 수입하지 않는가?

246-
유럽연합은 1989년부터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전면 금지.
미국 축산업자들이 소에게 유럽에서 금지하고 있는 성장호르몬을 투여하기 때문
세계무역기구가 미국의 손을 들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럽연합은 결과에 승복치 않은 채 지금까지 수입을 하지 않고 있음.
영국을 포함한 유럽연합은 광우병 파동을 통해 너무나 큰 교훈을 얻었고, 자국 국민의 생명보호를 위한 식품정책은 세계 어느 곳보다 강화
결국 무역 분쟁에서 패소했음에도 식품정책 완화는 전혀 추진하지 않고 있음.
이런 사례들을 통해 우리는 안전한 먹거리를 위한 정부의 노력은 아무리 해도 과하지 않다는 것.


  6. 과학의 절대적 객관성에 대한 뜨거운 열망

248-
광우병 논란은 과학적 근거에 절대적으로 의존할 수 없음.
연구와 논란은 여전히 진행 중
과학적 증거에 대한 논의는 결국 과학적 해석의 문제.
‘30개월령’이나 ‘특정 위험물질’도 과학적 기준이라기보다 가변적인 합의와 해석의 산물.
과학적 객관성에 대한 절대적인 열망은 오히려 그 객관성의 이름으로 오용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됨.
  
  
(2019.12.05.)
   

2022/02/08

[참고 문헌] 형이상학 - 가능세계, 양상 (한국어 서적)

      

김우진, 『양상논리와 형이상학』, 새들녘, 2012.
  
손병홍, 『가능 세계의 철학: 가능세계와 동일성에 대하여』, 소피아, 2004.

 

  
  
(2021.03.29.)
    

2022/02/07

[과학철학] Friedman (1998), “On the Sociology of Scientific Knowledge and its Philosophical Agenda” 요약 정리 (미완성)

     

[ Michael Friedman (1998), “On the Sociology of Scientific Knowledge and its Philosophical Agenda”, Studies in the History and Philosophy of Science 29, pp. 239-271. ]

 

  

  1. SSK and Traditional Philosophy

  2. The Intellectual Context of Philosophical Relativism

  3. SSK and Wittgenstein

  4. ‘The Hardness of the Logical Must’

  5. Entanglements of ‘Reflexivity’

  6. Conclusion



241-

- SSK의 철학적 의제(philosophical agenda)가 지닌 난점을 밝히고자 하는 논문. 

SSK가 경험주의적 과학의 한 분과라는 주장과 SSK가 철학의 전통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주장에는 긴장이 존재한다는 것이 핵심 주장. 

SSK 학자들이 쉽게 상대주의를 받아들이지 말고 자신들이 다루고자 하는 의제를 철학적 맥락과 전통 속에서 파악하려는 노력을 기울였으면 좋겠다고 언급.


 


  1. SSK and Traditional Philosophy


- SSK는 경험 연구와 규범적 판단을 뒤섞는 오류를 저지른다.

 

243

SSK는 과학을 평가하지 않고 서술할 뿐이라고 주장하며, ‘지식’과 ‘지식으로 받아들여지는 것’(달리 말해 올바른 지식과 잘못된 지식)을 구분하지 않으면서 규범성을 제거함.

SSK는 지식을 평가하는 대신 서술할 뿐.

 

244

동시에 SSK는 경험연구의 범위를 넘어서 전통적 철학의 목적, 방법을 기각하고자 함.

이런 입장을 취하는 이유는 철학에서 가정하던 바가 사회학적 설명과 상충한다고 보기 때문임.


245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오해에 의존함.

규범적, 처방적 고찰(비자연주의적)과 자연주의적 서술은 충돌하지 않음. 둘을 분리하면 됨.

 


  2. The Intellectual Context of Philosophical Relativism

  

247-

칸트의 비판철학

칸트는 뉴턴주의 과학이 부상하는 상황에서 과학과 철학의 관계를 설정하고 철학의 역할을 재규정하고자 했음.

칸트는 형이상학이 과학지식을 가능케 하는 조건을 탐색하는 학문으로 정의함(비판철학).

이에 따르면 형이상학, 철학은 "경험적" 임무를 띠는 과학과 달리 "초월적" 임무를 지님. 철학은 ‘현상’, ‘외양’에 대해 고찰하는 것이 아니라 현상을 가능케 하는 구조, 프레임을 고찰하는 학문이다.

철학은 모든 경험과학이 그 바탕 위에서 논의될 수 있을 수학적 전제(mathematical presupposition)의 프레임(경험과학은 이 프레임 안에서 규제적 이상(regulative ideal)을 통해 지속적으로 진보할 것이다)을 묘사함으로써 이 구조, 가능성을 설명해야 함.

이런 점에서 칸트는 규범적인 것과 서술적인 것을 엄격히 구분했음.

규제적 이상의 순수히 규범적 성격 강조.

 

247-248

칸트의 한계와 실증주의의 한계

과학의 발전은 칸트 식의 과학적 객관성 개념에 문제를 제기했음.

칸트에 따르면 뉴턴역학 시공간 구조의 수학적 표현인 유클리드 기하법칙과 운동 법칙이 바로 철학이 논의하는 바로 그 “수학적 전제의 프레임”이었지만,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를 거치면서 비-유클리드 기하학과 상대론적 시공간이 새로운 수학적 구조로 떠오르게 됨.


248-249

이런 상황에서 논리 경험주의자들은 “과학적 객관성의 선험적, 초월적 전제”를 탐구하려던 칸트의 프로젝트를 그대로 가져감.

칸트와 마찬가지로 이들은 여전히 오직 감각 가능한 자연에 선험적인 수학적 프레임을 부여할 때에만 과학적 객관성을 획득할 수 있다고 생각했음.

처음에 이들은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1921)를 따라 순수수학, 논리와 자연에 대한 특정한 수학적 표상을 구분하고 전자가 보편적 정당성을 갖는다고 주장함.

그러나 1920년대 들어 고전 수리논리와 판이하게 다른 다양한 논리-수학적 논법(calculi)이 등장하면서 순수수학, 논리에 보편성을 부여하고자 하는 시도에도 문제가 생김.

 

249-250

카르납의 논리 경험주의

카르납은 특수한 논법(calculi)의 특수한 규칙과 독립적인 보편적 정당성, 보편적 참의 개념이란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함.

카르납의 주장에 따르면 형식 언어, ‘언어 프레임’에 따라 ‘합리성’, ‘객관성’, ‘참’ 개념이 다 다르게 되므로, 규범성도 사라지게 됨.

‘언어 프레임’의 특수한 논리규칙에 따라 그 프레임 특유의 ‘참’이 결정될 뿐이며, 이를 초월하는(overarching) 합리성이란 존재할 수 없으므로 프레임의 선택은 완전히 임의적, 실용적 문제로 남음(더 이상 합리적 문제가 될 수 없다!).

이것이 카르납의 관용의 원리(principle of tolerance)

상대주의적 과학적 합리성에 대한 이런 생각이 나중에 쿤으로 이어짐.


251

과학철학은 칸트에서 논리경험주의를 거치면서 과학적 합리성의 조건을 탐구하되, 동시에 그 조건의 역사적 변화도 함께 다루려는 노력을 진행해왔음.

과학의 발전에 발맞추어 과학철학도 상대주의적, 규약주의적 합리성을 찾는 길로 나아감.

이것이야말로 SSK가 적을 두고 있는 철학적 의제.

“카르납 더하기 쿤이 SSK의 철학적 의제이다”



  3. SSK and Wittgenstein


SSK의 이른바 “철학적 의제”와 SSK가 의존하는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의제는 다름.

[프리드먼은 SSK가 철학적 주제, 개념을 다룬다고 생각하지 않음. 이 점은 민속지를 주장하는 린치도 마찬가지]


252

SSK가 스스로 과학이고자 한다면, 비트겐슈타인은 과학과 철학을 엄격히 구분함.

“철학은 환원하지 않는다. 철학은 순수하게 기술할 뿐 설명하지 않는다.”

그는 인간의 사상과 언어에 대해서 일반화하는 것도 거부했다.

철학은 오직 개별적인 것(particulars)의 수준에 머무르면서 우리가 이미 아는 것을 알기 쉽게 드러내는 데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


253-254

비트겐슈타인이 고찰하는 언어 게임은 실제의 것이 아니라 상상의 것.

이들을 서술하는 것은 과학과는 거리가 멂.

“우리는 자연과학에도, 자연사에도 참여하지 않는다.”

  

254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적 실천, 문화적 실천의 역사적, cross-cultural 다양성에 관심 없었음. 

그가 관심이 있는 것은 언제나 “우리의” 실천.

비트겐슈타인에게서 어떤 사회문화적 상대주의의 냄새도 맡을 수가 없음.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우리”는 "인류 전체를 의미함.

따라서 그가 의미하는 동의도 “인간의 일반적 행위 양식”을 의미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여러 문화 사이의 언어활동 차를 보기보다. “우리의” 단일한 문화-언어 커뮤니티에서 볼 수 있는 언어, 언어활동의 다양한 용법을 주목함.

그가 쓰는 “form of life”도 이런 의미 


 254-255

비트겐슈타인은 규범성을 포기하려 하지 않았음. <-> 반대로 SSK는 규범성을 포기하려 함.

논리철학논고에서 비트겐슈타인이 사용한 논리는 곧 칸트의 보편이성 개념의 후계자.

왜냐하면 여기서 논리란 사고의 틀을 규정하는 것이었기 때문.



  4. ‘The Hardness of the Logical Must’

 

257-

 = 칸트와 논리철학논고의 차이: 

논리철학논고는 말해질 수 있는 것(gesagt)과 말해질 수 없지만 보여질 수만 있는 것(gezeigt)를 명확히 구분함.

그저 보여지는 철학적 개념이라고 해서, 모두 “말할 수 있는”, 즉 “정교화”될 수 있는 것은 아님.

“명제는 실재의 논리적 형태를 비춘다(보여준다).”

하지만 “보여질 수 있는 것은 말해질 수 없다.”(257) 

다시 말해 실재의 논리적 형태는 명제들의 관계를 통해 확인할 수 있지만, 그것을 다시 하나의 법칙으로 언어로서 정교화할(말할) 수는 없음.

따라서 칸트와는 달리 비트겐슈타인은 보편이성에 대한 ‘초월적’ 철학 이론을 찾지 않았음.

 

257-259

카르납과 논리철학논고의 차이

카르납과 비트겐슈타인 모두 논리는 오직 상징 언어의 순수 형식적, 문법적 조합 가능성에만 의존하며, 따라서 상징의 의미 (내용)와 논리(형식)는 무관하다고 생각했음.

그러나 카르납은 언어의 논리적 문법(형식), 즉 메타언어(대상언어의 형식 논리적 문법을 서술하는 언어)를 다루는 분과가 존재하고, 그것이 힐베르트의 수학이라고 생각했음.

따라서 카르납은 그 논리문법을 표현할 수 없다는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에 반대한 셈

따라서 카르납은 논리-언어 다원주의로 나아감.

반면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수학적 사고가 언어 작동, 활용의 토대가 되지 않고 대신 고유의 논리 법칙을 지닌 여러 개의 언어 활동이 존재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렇다면 논리-수학적 필연성의 원천은 무엇인지를, 즉 “논리적 필연성의 견고함”(the hardness of the logical must)에 대해 고민했음.

 

259-260

더 이상 논리-수학적 필연성에 실재와 같은 토대가 없다면 (이것이 논고와 달라지는 지점 중 하나다. 존재론의 제거), 도대체 그 필연성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 필연성은 분명 인간 활동, 인간의 언어 용법에서 나와야지, 사실 분명한 것이 아님에도 “분명한 것”으로 전제해서는 안 됨.

“논리학과 수학의 필연성의 근원은 담론의 그 영역들 내에, 실제의 언어 관행 내에 있다”(피어스, 비트겐슈타인, 176)

또한 이 필연성을 “경험주의적 탐구”를 통해서 밝히는 것도 안 됨(그것을 밝히는 것은 오직 문법적 문제!).

그것은 그저 드러나있어 살필(survey) 수 있는 것이지, 그 기저에 뭔가 토대, 설명이 있을 수가 없음.


261

비트겐슈타인 후기 철학의 주제

1) 우리의 사고에서 규범적인 것 여전히 남아있다 

2) 언어관행의 규범적 성격은 철학적 탐구의 주제이다. 

3) 이런 철학적 탐구는 어떤 학설이나 이론으로 귀결되지 않는다. 오직 문법적 특성을 "보여주는" 다양한 언어게임을 통해 탐구할 수 있을 뿐이다.

 

262-263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수학적 규칙의 "존엄성"과 그 규칙의 (민속지적) 서술을 분리했다. 

“Wittgenstein then attempts to depict the true character of these most fundamental features of our practice from within, and thus in a way that embraces, rather than dissolves, their normativity.”(263) 

이처럼 규범성을 놓지 않으려 했기 때문에,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의 전통에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


263-264 

SSK는 어떤 기준의 규범성을 임의적 “선호”로 환원함.

따라서 실제로 이 표준의 규범적 힘은 사라짐.

 

 

  5. Entanglements of ‘Reflexivity’

 

265

과학에 대한 사회학적 연구를 둘러싼 여러 논쟁은 철학과 사회과학 사이의 이와 같은 긴장을 극복하기 위한 것

긴장을 하기 위해서는 = 비트겐슈타인의 기여:

이전 철학적 시도의 실패, 사상의 사회적 성격 모두를 인정하면서도 물기를 우리가 사고할 수 있도록 해주는 규범성을 놓지 않는 새로운 철학적 스타일, 방법을 창출


265-267

블루어와 린치의 논쟁

린치는 블루어보다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잘 이해하고 있지만, 여전히 경험적 연구를 시도함으로써 비트겐슈타인을 벗어남.

린치도 “경험적”과 “문법적”을 구분하지 못함.

 

267-269

콜린스와 라투르의 논쟁

라투르는 SSK가 사회학적 요인과 자연적 요인을 비대칭적으로 다룬다고 비판함.

콜린스는 이런 불만에 대해 “메타 교호”(meta-alternation)를 해결책으로 끌어들임.

과학 못지않게 SSK도 상대주의적 철학의 대상이 되지만, 둘에 대한 비판이 동시에 진행될 수는 없다는 것.

따라서 둘을 “구획”(compart)한 후 두 관점 사이의 “메타 교호”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과학을 하는 것과, 과학의 본성에 대한 반성을 동시에 진행하면 안 된다는 것


그러나 콜린스의 대응은 자가당착적

그는 구획(compartment)을 강조하면서 실은 둘을 섞어놓음으로써 “위험한” 상대주의적 결론을 끌어들임.

그는 “과학의 본성을 재평가”하는 동시에 “과학을 함”으로써 SSK는 회의주의적, 상대주의적 철학에 호의적인 전제의 기반을 벗어남.

이런 식의 접근법은 그들 자신이 주장하는 회의주의적, 상대주의적 철학과 맞지 않음.

 

269

가령 흄은 인간 이성에 대한 회의주의적 결론과 과학, 일상에서 보이는 ‘자연적’ 태도를 구분함.

따라서 흄은 자신이 만들어낸 바로 그 철학적 주장 자체도 우습다는 것을 보였고, 따라서 철학적 합리주의의 야심도 함께 공격할 수 있었음.

카르납도 마찬가지였음.

카르납은 순전히 규약적인 선택을 두고 철학자들이 실속 없는 논쟁을 펼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철학이 진정한 이론적 질문과 관련이 없음을 밝혔음.

흄과 카르납 모두 과학과 철학을 구분하면서, 과학의 실천을 “회의주의적, 상대주의적 철학의 신랄한 효과”로부터 보호함.

이 점은 비트겐슈타인도 마찬가지


 

  6. Conclusion

 

270

프리드먼은 SSK의 실천과 철학적 의제가 분리될 수 있으며, SSK의 철학적 의제는 그런 실천에서 매우 피상적 부분에 불과하다고 주장. 

경험주의적 사회사가 경솔하게 철학적 논쟁에 뛰어드는 것을 우려.

그러나 철학적 논쟁에 뛰어들게 만드는 배경이 있는 것 인정

따라서 좋은 방법은 사회사가들이 철학의 변천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

  

  

(2021.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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