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료함이나 명료한 글쓰기를 분석철학의 특징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는 모양이다. 그러면 대륙철학은 불명료한가? 그렇게 말하면 대륙철학 전공자한테 혼난다. 내가 철학과 대학원에 다닐 때 그와 관련하여 대륙철학 전공자가 분개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내가 약 올려서 분개한 것은 아니고, 철학을 잘 알지도 못하는 놈들이 (대륙철학을 이유 없이 미워하든 좋아하든) 대륙철학은 불명료하다고 말한다고 분개했던 것이다. 그 분은 현상학 전공자였는데, 현상학이 얼마나 엄밀함과 명료함을 추구하는데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이상한 이야기나 한다고 분개했었다.
나와 같은 학기에 철학과 대학원에 입학한 분 중에는 일본에서 유학하다가 현상학을 배우러 한국에 돌아온 스님도 있었다. 나는 일본에서도 현상학을 많이 한다고 들었는데 굳이 한국에 올 이유가 있었느냐고 스님에게 물었다. 내 물음에 스님은 한국의 이◯◯ 선생님에 대한 일본 학계의 평가를 듣고 한국으로 돌아왔다고 말했다. 일본에서는 그 선생님을 가리켜 “어떻게 한국에서 저런 분이 나올 수 있느냐?”라며 놀라워했다고 한다. 그 선생님의 주요 업적은 몇 십 년 동안 뒤엉켜있던 개념들을 정말 말끔하게 정리정돈한 것이라고 한다. 내가 현상학을 전혀 몰라서 어떻게 정리했다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하여간 그렇다고 한다. 그 선생님은 현상학 교재를 집필하기도 했는데, 학부 때 현상학에 심취했다가 분석철학으로 귀순(?)한 사람들조차 그 책은 정말 훌륭한 교재라고 평가한다.
철학과 대학원을 다니면서 현상학 뿐만 아니고 다른 대륙철학 분야 선생님들에 대해서도 비슷한 평가를 들은 적이 있다. 어떤 선생님의 논문이나 책에 대하여 어떤 분석철학 대학원생은 “명료하다”, “논지가 투명하게 드러난다”고 평가했던 적이 있다. 내가 대륙철학 쪽 선생님들의 논문이나 책을 읽어본 적이 없어서 그에 대해 내가 뭐라고 덧붙일 말은 없지만, 하여간 이러한 평가들은 명료함이나 명료한 글쓰기가 분석철학만의 전유물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 같다.
내가 왜 예전 기억을 떠올렸느냐 하면, 사무엘 C. 휠러(Samuel C. Wheeler III)의 다음과 같은 일화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분석철학을 정의하는 기준으로 명료한 글쓰기를 제안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기준도 어떤 사람이 받은 훈련에 상대적이다. “분열(schism)을 넘는 의사소통”이라는 관점에서 나는 데리다에게 솔 크립키의 『명명과 필연』(Naming and Necessity)을 주었다. 나는 크립키의 책이 거의 투명한 텍스트이고 매우 명료하고 뛰어나다고 생각했다. 데리다는 이전에 이 책을 읽어보려고 했으나 무엇이 말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반대로, 그는 하이데거가 매우 명료하다고 말했다. 크립키가 명료하게 썼다고 생각하면 당신은 분석철학자일 것이고, 하이데거가 명료하게 썼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대륙철학자일 것이다.(p. 2)
상당수의 글쓰기 책에서는 명료함이 글쓰기의 중요한 덕목이라고 말하지만, 정작 명료함이 어떤 것인지 설명한 책은 드문 것 같다. 물론, 많은 사람들은 어떤 글이 명료하고 어떤 글이 그렇지 않은지 대강 아는 것 같다. 그렇지만 그것은 글쓰기 책에서 제시하는 비교 대상들이 신문 칼럼 수준 정도라서 그런 것이다. 일반인이 읽을 수 있는 수준을 한참 뛰어넘는 글의 명료함은 어떠한 것일까? 만약에 전문 철학자들이나 읽는 전문적인 글이 명료하다고 한다면,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서로 전문가들의 영역이 겹치지 않는 두 분야가 있고 두 분야에 모두 정통한 전문가도 드물다고 할 때,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자기 분야의 글이 명료하고 다른 분야의 글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면, 이 때 어떤 글이 명료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런데 어떤 글이 명료하다고 할 기준을 명시적으로 제시하기 어렵다고 해서, 명료함의 기준이 사람이 받은 훈련에 상대적이라고 곧바로 결론내리는 것은 뭔가를 해야 할 것을 건너뛰고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는 것처럼 보인다. 구글에서 이와 관련하여 자료를 찾아봤는데 한국어 자료는 별로 없고, 영어 자료는 뭔가 많이 나오기는 하는데 내가 영어로 못하고 말귀도 잘 못 알아먹어서 대충 목록이나 훑어보다가 말았다. 당장 내가 할 일과 밀접한 것도 아니니 다른 사람이 이와 관련된 연구를 하면 슬쩍 가서 물어볼 생각이다.
* 참고 문헌
Samuel C. Wheeler III (2000), Deconstruction as analytic philosophy (Stanford University Press).
(2021.09.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