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J. L. Heilbron, “The Measure of Enlightenment,” in Tore Frägsmyr, J.L. Heilbron, and Robin E. Rider (eds.), The Quantifying Spirit in the 18th Century (Berkeley: Univ. of California press, 1990), pp. 207-42. ]
1. The Plight of the People
1.1. Cain’s Legacy
1.2. Mathematics and the Rights of Man
2. The Program of the Academy
2.1. Professional Imperatives
2.2. Institutional Considerations
3. The Labor of Academicians
3.1. Pit and Pendulum
3.2. Roughing It
3.3. A Military Connection
4. The Response of the People
4.1. Resistance
4.2. Spread
207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미터법(metric system)은 18세기 계몽사조와 프랑스 혁명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하일브론은 이 글에서 미터법이 만들어지게 된 배경과 과정 그리고 이것이 널리 수용되기까지의 지난한 과정을 서술하고 있다.
1. The Plight of the People
1.1. Cain’s Legacy
207-208
18세기 프랑스에는 무려 700-800가지에 이르는 서로 다른 이름의 측정단위가 존재.
심지어 같은 이름의 단위가 지역에 따라 그 용량이 다른 경우도.
예) 파인트(pinte)의 경우, 파리에서 0.93리터, 세인트-데니스에서는 1,46리터.
임의적인 측정단위(arbitrary unit)는 소작농들에게 많은 공물을 징수하고 이를 시장에 팔 때에는 적은 수량단위로 팔기 위한 봉건 영주들의 속셈이 반영된 봉건체계의 잔재.
계몽기의 개혁가들은 이러한 폐해를 해결할 수 있는 합리적이고 보편적인 새로운 도량형의 도입이 필요함을 인식하고 이를 추진했다.
1.2. Mathematics and the Rights of Man
212-213
도량형 개혁이 단순히 임의적인 단위를 통일하려는 목적만을 가진 것은 아님.
여기에는 보편 지식, 특히 수학이 민주주의를 실현하는데 궁극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개혁가들의 열망이 담겨 있었음.
콩도르세가 언급한 것처럼, 자신의 이익에 관련된 계산을 스스로 할 수 있는 능력은 독립적인 인간이 되기 위한 중요한 조건.
이러한 열망은 더 단순하고 편리한 계산을 위해서 새로운 도량형에 10진법을 도입하자는 제안으로 이어짐.
라플라스: “새로운 도량형은 봉건적 도량형을 10으로 나눈 것”
십진법의 도입은 새로운 도량형의 가장 중요한 특징.
2. The Program of the Academy
2.1. Professional Imperatives
2.2. Institutional Considerations
그렇다면 새로운 도량형인 미터법은 어떤 과정을 통해 만들어졌는가?
미터법의 표준 길이 단위를 정하기 위한 방법으로 제시된 것은 두 가지
하나는 자오선의 길이를 측정하여 그것의 1/40,000,000을 표준 길이 단위로 정하는 것
다른 하나는 초진자(seconds pendulum)를 이용하여 표준 길이를 정하는 것.
국민공회(National Assembly)는 두 방법 중 어떤 것이 더 나은지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에 자문을 구함.
아카데미는 이를 평가하기 위한 위원회를 구성.
위원회는 면밀한 조사 끝에 여러 가지 문제가 있는 초진자 대신 정확한 측정이 가능해진 자오선을 길이의 표준 단위를 결정하는 방법으로 택할 것을 제안
아카데미는 이 제안을 국민공회에 제출.
3. The Labor of Academicians
3.1. Pit and Pendulum
3.2. Roughing It
3.3. A Military Connection
4. The Response of the People
4.1. Resistance
4.2. Spre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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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1년 국민공회로부터 미터법 프로젝트 제안을 승인받은 아카데미는 다섯 개의 위원회를 구성하여 이 프로젝트를 수행.
그러나 프랑스 혁명기였던 당시의 혼란한 상황에서 이들의 작업은 결코 순탄하게 진행되지 못함.
메솅(Mechain)은 남부 소작인들을 혼란스럽게 만든 그의 측정도구 때문에 반혁명이란 죄목을 쓰고 투옥.
들랑브르(Delambre)는 측량활동을 하다가 적국의 스파이로 오인을 받아 투옥되는 곤욕을 치름.
그리고 1793년에 프랑스 아카데미는 비공화주의적인 단체라는 이유로 폐쇄되었으며, 그해 11월에는 공안위원회(Committee on Public Safety)에 의해 라부아지에가 체포되었고, 미터법 프로젝트를 위해 그가 꼭 필요하다는 아카데미 회원들의 탄원에도 불구하고 결국 처형됨.
그러나 이러한 혼란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미터법 프로젝트는 계속 진행됨.
이는 혁명정부가 군사적 이익을 포함한 국가 이익을 위해 미터법의 개혁이 필요함을 인식했기 때문이며, 아카데미는 이 프로젝트가 프랑스 혁명의 정치적 폭풍 속에서 그들을 보호해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
1798년 파리에서는 새로운 단위를 검토하고 승인하기 위한 국제 전문가 위원회가 소집.
이들은 세 분과로 나뉘어 무게를 킬로그램으로 변경하고, 옛 척도와 새로운 척도를 비교하고, 미터를 표준 길이 측정 단위로 결정하는 작업을 수행.
이 위원회는 이듬해에 새로운 표준(prototype standards)을 사람들에게 공식적으로 발표했으며, 위원들은 각 국으로 돌아가 미터법 보급을 위해 노력.
특히 프랑스와 인접해 있는 국가들은 통상의 개선을 위해서 미터법의 사용을 장려.
그러나 미터법이 사람들에게 곧바로 수용된 것은 아님.
많은 사람들은 미터법이 오히려 일상생활을 혼란에 빠뜨린다고 생각했으며, 도매상인, 소매상인 그리고 소비자 모두 미터법이 자신들에게는 이익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이를 수용하지 않음.
결국 미터법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사람들의 자발적 수용에 의한 것이 아닌 권력에 의한 강압과 교육 덕분.
나폴레옹 제1제정 시기였던 1812년에 미터법은 모든 학교에 교육 되었으며, 공공사무, 시장 그리고 통상거래에 사용되었고, 옛 단위는 모두 없애버림.
미터법이 완전히 자리를 잡기 전까지 미터법의 사용은 점진적으로 증가.
한편, 미터법의 확산은 계몽주의자들이 기대했던 것처럼 유럽인들의 수리능력 향상에도 도움을 줌.
미터법 계산에 관한 초기 논문은 10진법 그리고 자리 수 개념 뿐 아니라 유효 숫자와 내림 또는 올림 작용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으며, 미터 변환 문제는 대중적인 산술 교과서의 연습문제에 실려서 학생들의 수리능력 증진에 도움을 줌.
하일브론은 이 논문에서 미터법이 만들어지고 수용되는 일련의 흐름이 결코 자연스러운 과정이 아니었음을 보임.
이 과정에는 여러 집단들 간의 협상, 갈등, 동의 그리고 권력이 작용.
이러한 사실은 18세기 계몽주의 시대의 발명품인 '보편지식'이 자연적 산물이 아니라 인공적 산물임을 보여줌.
(2019.1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