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2월, 국회의원회관에서 <2020-2025년 대학통합네트워크 현실화 경로와 방안> 토론회가 열렸다고 한다. 그 토론회에서 “대학통합네트워크를 실행할 구체적인 방안”도 나왔다고 한다.
그 구체적인 방안에 따르면, 대학통합네트워크는 두 단계로 진행된다. 1단계에서는 10개 거점국립대를 ‘국립한국대학’으로 묶고, 2단계에서는 12개 지역중심 국립대학을 통합한다. 학생들은 ‘한국대 통합 입학처’에 지원하는 식으로 통합네트워크에 공동 진학하게 되며 공동 학위를 받는다. 여기까지는 고릿적부터 했던 이야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번 논의가 기존 논의와 다른 점은 필요한 예산을 언급했다는 데 있다. 기사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1단계 통합이 성공하려면 각 거점국립대가 연세대・고려대 수준이 되어야 하며, 그러려면 각 거점국립대가 서울대 수준의 예산을 확보해야 하므로 1년에 총 3조-5조 원이 필요하다고 추산했다.
거점국립대에 예산을 때려넣어서 연세대나 고려대 수준이 되었다고 하자. 정말 좋은 일이고 나도 바라는 일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거점국립대가 현재의 연세대나 고려대 수준이 되었는데 통합을 왜 하는가? 그렇게 되면 통합할 필요 자체가 없어지는 것 아닌가? 연세대와 고려대가 통합해서 ‘연고대’가 되고 신촌캠퍼스가 ‘연고대 제1캠퍼스’, 안암캠퍼스가 ‘연고대 제2캠퍼스’가 되었을 때 좋아지는 점을 생각해보자. 좋아지는 점이 단 하나도 없다. 무엇이 좋은가? 사교육이 줄어드나, 교육불평등이 줄어드나, 연고전이 사라지고 한국 사립대학계에 평화가 찾아오나?
대학통합네트워크를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일종의 이름 페티쉬 같은 것이 있어서 그런 주장을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수학자들이 수학 공식을 보면서 아름다움을 느낀다고 하듯이, 이름들의 묘한 규칙성에 자극받지는 않을 것 아닌가. 충남대, 충북대, 전북대, 전남대, 이렇게 하면 아무 느낌도 안 나는데 한국 제1대학, 제2대학, 이런 식의 이름을 보면 자기도 모르게 전율을 느낀다든지 하지는 않을 것 아닌가. 종친회 같은 데 가서 돌림자로 된 이름을 가진 사람들을 보면 막 자기도 모르게 찌릿찌릿한 느낌을 받는 변태가 아니라면, 굳이 그럴 이유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윤서인 같은 사람들이 일본라면 먹으면서 일본사람 된 기분을 느끼듯이, 유럽대학 같은 대학 이름을 보며 유럽사람 된 기분을 느끼려고 그러는 것도 아닐 것이다. 아니, 그럼 왜?
최대한 호의적으로 해석해보자. 서울대에 사회적 상징성이 있으니까 서울대의 독점적인 지위가 무너졌다는 것이 공식화되면 거점국립대에도 예산 배분이 쉬워질 수도 있다는 의미에서 대학통합네트워크를 하려는 것이라고 생각해보자. 그래도 말이 안 되기는 마찬가지다. 예산은 상징성으로 배분하는 것이 아니다. 기존에 하던 것에 기초해서 예산이 배분된다.
내년부터 거점국립대에 3조-5조 원을 쏟아붓는다고 하자. 그 돈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계획이 있고 그에 따라 예산이 분배되는 것이 정상적인 과정이다. 계획 없이 예산을 투입하면 헛짓거리하는 데 쓰인다. 예산을 요구하기 전에 어디에 쓸지 먼저 정해야 한다.
각 거점국립대마다 나름대로 구상한 발전 방안이 있을 것이다. 어떤 사업을 할 것이며 예산이 얼마나 필요한지 제시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토론회 발표자료집에는 그런 내용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왜? 거점국립대에 있는 사람들도 대학통합네트워크 같은 것이 회의적이어서 협조하는 사람이 그만큼 적다는 것은 아닌가? 토론회에서는 마치 서울대만 꼬시면 어떻게 될 것처럼 말하지만, 부산대와 경북대에서도 이런 것을 반대하는 시위가 있었다.
예산 지원에도 순서가 있을 것이다. 당장 3조-5조 원을 쏟아넣기 전에 기반을 만드는 작업부터 해야 할 것이다. 우수 학생을 어떻게 유치할지, 우수 교원을 어떻게 유치할지, 해외 학자들을 어떻게 모셔올지, 학생당 교수 수를 늘리기 위해 교수를 얼마나 더 뽑을지, 교육 질을 높이기 위해 학생 정원을 어떻게 할지, 어떤 시설을 새로 지어야 할지, 재정을 자체적으로 확보할 수 있도록 어떤 사업단을 꾸려야 할지 등등. 그런데 발표자료집에는 이런 이야기가 하나도 없다. “대학통합네트워크를 실행할 구체적인 방안”이라면서 1단계에서 열 개 묶고 2단계에서 열두 개 묶는다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구체적인 방안이 없다.
심지어 1년에 추가로 들어야 하는 예산이 3조-5조 원이라는 것도 특별히 무언가를 연구해서 나온 결과물이 아니다. 거점국립대들의 1년 예산을 연고대 기준으로 높이면 3조 원이 들고 서울대 기준으로 높이면 5조 원이 든다는 것이다. 그런 단순 계산은 방구석에서 놀고 있는 나 같은 백수한테 시켜도 몇 시간 안에 할 수 있다. 그런데 기준이 되는 자료조차 전년도 자료도 아니고 2016년 자료다.
실현가능하지도 않고 실현될 필요도 없는 구상을 하지 말고, 차라리 거점국립대 기숙사 수용가능 인원이 현재 몇 명인데 이걸 몇 년도까지 몇 명으로 늘린다든지, 기숙사비가 얼마인데 얼마를 보조한다고 하면 예산이 얼마 들어간다든지, 등록금을 얼마만큼 보조해주면 서울 소재 사립대학에 갈 학생들이 거점국립대에 진학할 유인이 생긴다든지 하는 분석을 한다면 훨씬 생산적인 논의가 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아무 내용 없는 이야기에다 평등이 어쩌네, 권력이 어쩌네 하는 개념어만 달아놓으니, 학교 이름 바꾸자는 것 말고 무엇을 어쩌자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지역 균형 발전을 위한 거점국립대 정상화 방안>이라고 해도 되고, <교육공공성 확보를 위한 국공립대 발전 방안>라고 해도 되고, <세계적 수준의 연구 중심 대학을 만들기 위한 거점국립대 예산 지원 방안>이라고 해도 된다. 모두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생산적인 이야기가 나올 수 있도록 방향을 잡을 방법은 무수히 많다. 그런데 굳이 별 내용도 없으면서 독특해보이기만 한 이야기만 해서 부산대나 경북대 같은 거점국립대에서도 반대하게 만드니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내가 묻고 싶은 것은 매우 단순하다. 그러니까 대학통합네트워크가 왜 필요한가? 이름 페티쉬 때문에 그러는 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그런 것을 추진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 링크: [매일경제] “교육 불평등, 정시확대로 해결 못 해…대학 통합네트워크 필요”
( www.mk.co.kr/news/society/view/2020/02/172853/ )
(2020.08.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