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시가 나오는 수능 문제를 못 풀었다는 최승호 시인의 2009년 인터뷰가 수능철마다 인터넷 커뮤니티에 돌아다닌다. 최승호 시인이 인터뷰한 것도 수능 즈음이니 언론사에서 수능에 맞추어서 인터뷰했을 가능성이 높다. 시인이 자기 시가 나오는 수능 문제를 못 푼다는 비판은 내가 고등학생이었던 15년 전에도 나왔던 이야기다. 그런데 그러한 일화들이 수능 시험을 비판하는 근거가 되는가?
나는 가끔씩 어떤 글을 읽고 오해해서 남들한테 이상한 이야기를 한다. 사실, 자주 그런다. 어떤 사람들은 내 이야기만 듣고서도 내가 그 글을 어떤 식으로 이해했으며 무엇을 전제하고 어떤 추론 과정을 거쳐서 그러한 결론에 도달했는지를 추적한 다음, 원래의 글을 보고 내가 무엇을 오해했는지 지적한다. 머리가 좋은 사람들은 그렇게 할 수 있는 모양이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수능 국어영역 문제에서 출제자의 출제 의도가 인용된 문학 작품의 원작자의 의도와 어긋난다는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출제자가 원작을 어떤 식으로 이해했는지를 추론해서 문제를 풀면 된다.
최승호 시인은 객관성 시험에 맞게 시의 의미나 함축을 한정하는 것이 시를 제대로 파악하는 것과 거리가 있다고 말했다. 맞는 말이지만, 그것이 수능시험의 객관성을 문제 삼을 근거가 되지는 않는다. (A)라는 시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고 해보자. (A)의 시어 중 하나에 밑줄을 그어놓고 그 의미가 무엇인지 객관식으로 물어보면 그 답안의 객관성은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A)라는 시를 (B)라는 시에 연관 지어서 물어본다면 출제자가 물어보는 (A)의 시어의 의미는 한정될 수밖에 없다. 수능 시험이 지문의 아무 데나 밑줄을 그러놓고 이게 무슨 뜻이냐고 묻는 시험도 아닌데 이걸 가지고 주입식 교육이라고 우기면 안 된다. 시인은 출제자가 자기 시를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이해하지 못한 것뿐이다.
고등학교 문학 교육은 나름대로의 역할과 가치가 있을 것이다. 학생들이 즐겁게 사는 데 문학이 도움이 된다면 좋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건 그거고, 수능에서 그런 것을 고려해야 하는가는 다른 문제다. 추론 능력은 없지만 아무 데서나 쓸데없이 많이 주워듣고 외워서 문학 교양을 쌓은 학생과 문학 교양은 없지만 추론 능력이 뛰어난 학생이 있다면, 대학은 둘 중 어느 학생을 뽑아야 하는가? 후자를 뽑는 게 옳다. jtbc <썰전>에 나오는 전원책과 유시민을 보자. 어떤 학생을 뽑아야 하는가? 대학에서 필요한 능력은 무분별한 기억력이 아니라 추론 능력이다. 문학 작품 읽고 느낄 때의 즐거움 같은 것은, 내가 내 돈 내고 내가 책 사서 내가 책 읽고 나랑 비슷한 사람들하고 모여서 남의 헛소리 듣지만 괜히 남한테 돈 갖다 바치는 독서모임 같은 데서 느껴도 된다.
수능시험 때마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에서 “이번 수능은 학교 수업을 충실히 이수한 학생이라면 누구든지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있다”고 개뻥을 치니까 사람들이 말도 안 되는 생트집을 잡는 것 같다. 수능 전날 평가원장이 “대학은 머리 좋은 애들이 가는 곳이고 말귀를 못 알아먹는 애들은 오지 말라고 수능 시험을 그렇게 내는 겁니다”라고 이야기한다면 더 이상 어느 누구도 그런 생트집을 잡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진실을 말하고 감당할 수 없는 후폭풍을 맞이하느니 하얀 거짓말을 하는 것이 여러모로 낫기 때문에, 하얀 거짓말이 매년 반복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 링크: [중앙일보] 최승호 시인 “내 시가 출제됐는데, 나도 모두 틀렸다”
( http://news.joins.com/article/3885483 )
(2017.1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