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본 것인가. 꿈을 꾼 것인가. 나는 영화 <리얼>을 보았다.
영화 <리얼>의 줄거리를 모르겠다. 나는 분명히 영화가 시작할 때부터 끝날 때까지 두 눈을 뜨고 보고 있었다. 그런데도 무슨 내용인지 정리하지 못하겠다. 뭔가 굉장한 것을 본 것 같다는 인상은 남는다. 아니다. 보지 말았어야 하는 것을 본 것인가?
어쨌거나 파편적인 기억은 있다. 극 중 김수현은 1인 3역을 하고 온 몸에 문신을 하고 특정 부위에 구슬을 박았으며, 성동일은 연변 사투리를 쓰는 잔인한 깡패이며, 이성민은 도박을 즐겨하고 환자에게 마약을 처방하는 정신과 의사이며, 설리는 그냥 연기를 못했다. 깡패들은 김수현한테 주먹 한 방 맞으면 석고상처럼 몸이 굳은 채로 바닥에 꼬꾸라졌고, 여자들은 반쯤 벗거나 다 벗고 나왔으며, 화면은 항상 어두웠다. 영화에 아까 본 것 같은 장면이 또 나오고 그와 비슷한 장면을 또 나와서 내가 영화를 제대로 보고 있는 건지, 내가 착각을 하거나 꿈을 꾸는 건 아닌지 의심하게 되었다. 정신이 몽롱해지면서 몸이 나른해졌다. 내가 영화를 보고 있는 건지 꿈을 꾸는 건지 헷갈리면서 ‘이게 현실인가. 아, 이래서 영화 제목이 <리얼>인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매트릭스> 같은 영화를 통해 철학적인 질문을 던진다는 책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 영화 보고 아무 말이나 지어내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이겠냐만은, <리얼>은 그러한 다른 영화보다도 더 근본적인 물음을 던진다. 다른 영화들이 관객에게 무엇이 정의인지, 실재와 가상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지 등을 묻는다면, <리얼>은 더 근본적인 문제, 즉 동일률이란 무엇인지 같은 것들을 묻는다. 영화에서 김수현은 깡패이자 르포 작가이자 부자로 1인 3역을 맡는다. 분명히 김수현이 김수현을 죽였는데 죽은 줄 알았던 김수현이 살아있고 김수현을 죽인 김수현이라고 알고 있던 것이 사실은 김수현이 아니니 말이다. 영화를 보면 보통은 개연성이 있는지 없는지를 따지는데, 영화 <리얼>을 보면 개연성이란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하게 된다. 이런 영화는 영어 자막을 넣어서 지젝한테 보내야 한다.
나는 어린 애들이 “인생 영화” 같은 표현을 쓰는 것을 보면서 ‘얼마나 살면서 보고 들은 것이 없으면 고작 그런 거 하나 가지고 인생 영화라고 하나’ 하는 생각을 했다. 하루살이가 조조 영화 본 것을 점심 먹으면서 인생 영화라고 하는 것과 뭐가 다른가? 그래서 나는 웬만한 것을 보고도 인생 영화 같은 소리를 안 했는데, 영화 <리얼>을 보고 생각이 바뀌었다. <리얼> 정도면 누구라도 인생 영화라고 해도 될 만한 영화다. 앞으로 최소한 30년 안에는 한국 영화 중에 <리얼> 같은 영화는 나오지 않을 것 같기 때문이다.
(2017.1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