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업하는 사람을 가끔 만나게 된다. 내가 철학과 대학원 다닌다고 하면 사업하는 사람들은 나한테 꼭 ‘삶의 의미’ 같은 것을 물어본다.
나는 삶의 의미 같은 것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살면 사는 거지 삶의 의미 같은 것이 있든가 말든가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인가. 그런 것이 사는 데 왜 문제가 되는지 모르겠다. 김창완의 노래 <너의 의미>는 의미를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애인에 대한 애정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한 것 아닌가. 나는 사람들이 묻는 삶의 의미 같은 것이 이 것하고 뭐가 다른가 싶었는데, 물어보는 사람들은 꼭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은 모양이다. 나는 처음에 “삶의 의미가 무엇인가?”라는 말이 사업이 잘 안 되어 살맛이 안 난다는 표현인 줄 알았다. 그런데 사업에 별 문제가 없어 보이는 사람들도 삶의 의미 같은 것을 묻는 것을 물었다.
부모님 또래인 학부 선배를 만난 적이 있다. 그 분도 사업하시는데 역시나 나에게 삶의 의미를 물어보셨다.
- 선배: “철학과면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배우지 않나?”
- 나: “그런 분야도 철학에서 다루는 것이기는 한데 제 전공이 아니라서 잘 모릅니다. 노직이 쓴 책 중에 삶의 의미에 대해 쓴 부분도 있는데 거기까지는 읽어보지 않았어요. 저는 잘 모릅니다.”
- 선배: “철학과에서 배우는 것 말고 자네가 생각하는 게 있을 거 아닌가. 자네가 생각하는 삶의 의미 말이야.”
- 나: “그런 건 딱히 생각해본 적 없는데요.”
- 선배: “자네가 살면서 추구하는 게 있을 거 아니야. 자네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거 말이야.”
나는 무엇을 바라고 이렇게 살고 있을까. 솔직하게 말했다. “잘 먹고 잘 사는 겁니다.” 선배는 내 대답을 듣고 방긋 웃었다. “아니, 그런 거 말고 자네가 진짜로 원하는 게 있을 거 아냐. 그게 뭐냐고.”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학부 선배니까 솔직하게 말했다. “합법적인 범위 안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겁니다.” 선배는 호탕하게 웃으면서 “참 재미있는 친구네. 술이나 한 잔 받아”라고 했다.
(2017.06.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