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9/04

[수리철학] Putnam (1975), “What Is Mathematical Truth?” 요약 (미완성)

     

[ Hilary Putnam (1975), Philosophical Papers, Vol. 1: Mathematics, Matter and Method (Cambridge University Press), pp. 60-78. ]
 
 
  1. The method of mathematical proof
  2. Martian mathematics
  3. Why have we not used quasi-empirical methods?
  4. Realism in the philosophy of mathematics
  5. Physical application and nondenumerability
  6. The importance of proof
  7. Physics and the future of mathematics
 
 
  1. The method of mathematical proof


  2. Martian mathematics


  3. Why have we not used quasi-empirical methods?


  4. Realism in the philosophy of mathematics

[pp. 72-73]
- 경험 과학과 관련된 실재론은 소극적인 논증(negative argument)과 적극적인 논증(positive argument)에 의존함.
- 소극적인 논증: 다양한 환원적 또는 조작주의 철학들이 성공적이지 않았음
- 적극적인 논증: 과학의 성공을 기적으로 만들지 않는 유일한 철학적 입장은 실재론
- 과학적 실재론의 입장
• 성숙한(mature) 과학 이론의 용어들은 일반적으로 지시함.
• 성숙한 과학 이론에서 수용되는 이론들은 일반적으로 근사적으로 참임.
• 동일한 용어는 다른 이론들에 나타날 때도 똑같은 대상을 지시할 수 있음.
• 과학적 실재론자는 이러한 진술들을 필연적 참이 아니라 과학의 성공에 대한 유일한 과학적 설명의 일부로 간주하며, 그래서 과학과 그 대상의 관계, 과학 자체에 대한 충분한 과학적 기술의 일부로 간주함.
  
p. 73
퍼트남은 수학적 실재론에 유비하여 과학적 실재론 옹호
  
p. 73
수리 철학에서 실재론을 지지하는 건 두 가지: mathematical experience and physical experience


  5. Physical application and nondenumerability


  6. The importance of proof


  7. Physics and the future of mathematics

  
  
(2017.02.19.)
    

2015/09/03

비전공자스플레인 - 비전공자들은 전공자를 가르치려고 한다

일부 남성들이 여성들을 가르치려고 하듯 일부 비-전공자들은 전공자를 가르치려고 한다. 남성이 여성을 가르치려는 태도를 ‘멘스플레인’이라고 부르듯이, 비-전공자가 전공자를 가르치려는 태도를 ‘비전공자스플레인’이라고 불러보자. 비전공자스플레인은 왜 일어나며 어떻게 일어나는가? 철학에 대해 아는 것도 없고 배운 적도 없는 사람들이 왜 근거 없는 기준에 맞추어 철학을 재단하는가? 왜 쥐뿔도 모르는 사람들이 철학은 이러저러해야 하는 것이라고 우기면서 강단 철학이 잘못되었다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가? 왜 그들은 아무 것도 모르면서 자기가 뭔가 아는 것처럼 생각하는가?

언론에서 석학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다. 학문적으로 무슨 대단한 업적을 이루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유명한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듣기에 기분 좋은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이 홀랑 넘어가기 마련이다. 우리집 개가 달을 보고 짖으면 앞뒤 사정 모르는 옆집 개도 따라 짖는 것처럼, 언론에서 석학이라는 사람들이 헛소리를 해주면, 너도나도 따라서 헛소리를 하는 것이다. 내가 비록 아무 것도 모르지만 석학님이 학계가 썩었다고 하니 나도 학계를 욕해주고, 강단 철학은 철학도 아니라고 석학님이 말씀해주시니 나도 주워들은 것을 그조차 주워듣지 못한 사람들 앞에서 대충 한 마디 뱉어보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무슨 발언권이라도 가진듯한 착각이 드는 모양이다.

『인문학 콘서트2』라는 책을 예로 들어보자. 그 책은 방송 내용을 정리해서 만든 책이라서 방송 내용에 맞게 대담 형식으로 구성된다.

- 이어령: “인문학의 쇠퇴가 문제가 아니라, 라이프와 관계없는 인문학이 문제예요. 요즘 인문학서나 논문을 보면 주석을 새까맣게 달아놓고 남의 글을 잔뜩 인용해놓는데, 그게 사실은 인문학에 자연과학적 방법을 도입한 거죠. [...] 오늘날 인문학이 쇠퇴했다는 말은 인문학 자체가 쇠퇴한 것이 아니라, 인문학 본연의 특성을 잃어버리고 자연과학으로 대체될 수 있는 공허한 학문이 되어가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그렇게 공허한 인문학은 감동과 즐거움을 주지 못하니까 사람들이 찾지 않는 거죠.”(25쪽)

- 이어령: “얼마 전 리먼브라더스가 파산하면서 세계적인 금융위기가 왔잖아요. [...] 이제 새로운 자본주의를 만들어야죠. [...] 자본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생산할 수 있는 재료를 말하죠. [...] 어느 시대나 뭔가를 자본으로 삼아서 뭔가를 생산해왔잖아요. 이제 그 자본으로 인문학이 나올 차례라는 겁니다.”(31-32쪽)

- 이어령: “이제 인문학자가 반격할 때가 온 겁니다. 지구온난화, 환경파괴, 이런 것을 누가 고발하고, 누가 경종을 울리겠습니까? 인문학자밖에 없어요. 왜? 인간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생명기술, 감동기술을 쓰고 남의 마음을 움직이는 기술을 써왔지, 화석연료 파내고 생산을 위해 생산하는 짓은 하지 않죠.”(35쪽)

- 이어령: “인문학은 본질적으로 인간 사이의 소통, 너와 나와 사이의 공감, 사랑을 중요시하지요. 동쪽 하늘에 해가 뜨더라도 그저 사방이 밝아졌다는 사실에서 생각이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어둠 속에서 태양이 솟아오를 때 느끼는 그 장엄한 감동, 마치 심포니 4악장의 그 웅장한 소리처럼 자신의 삶을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는, 그런 차원을 부여한다는 겁니다.”(36쪽)

- 김갑수: “이념과 형식논리에 빠진 인문학은 결국 대중에게서 멀어질 수밖에 없겠지요. 인문학 본래 목적이 그렇듯이 이제는 인간을 대상으로 한, 인간이 중심이 된, 인간을 위한 인문학으로 다시 태어나야 할 때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47쪽)

- 이어령: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독자도 인문학자도 조류가 어떻고 흐름이 어떻고 하는 일시적이고 가변적인 경향에 현혹되어 본질을 잊어버리지 말자는 겁니다. 적어도 때리면 멍이 들고 찢으면 피가 흐르는 인문학을 하라는 겁니다. 읽으면 눈물이 흐르고 가슴이 뛰는 인문학을 하라는 거예요.”(50쪽)

이들에 따르면 인문학은,

(1) 자연과학과 달리 사람들에게 감동과 즐거움을 주어야 하고

(2) 자본주의의 폐해를 극복하면서도 새로운 생산 활동의 원동력이어야 하고

(3) 기존의 기술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야 하고

(4) 인간 사이의 소통과 공감, 사랑을 이끌어내야 하고

(5) 이념이나 형식 논리에 매몰되면 안 되고

(6) 인간을 대상으로 한, 인간이 중심이 된, 인간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1)번부터 (6)번까지 맞는 말이 단 하나도 없다.

“(1) 자연과학과 달리 사람들에게 감동과 즐거움을 주어야 하고”

과학자들은 과학에서 감동과 즐거움을 얻기도 한다.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읽으며 과학자의 꿈을 꾸었다는 사람도 있고 과학을 통해 자연의 경이로움을 엿보며 감동과 즐거움을 얻는다는 사람도 있다. 자연과학이 사람들에게 감동과 즐거움을 주지 않는다고 생각할 정도로 수준이 낮은 사람이 인문학에서 얻을 감동이나 즐거움이란 아마도 통속 소설이나 읽으면서 느낄 정도의 즐거움일 것이다. (1)에 따르면 학회 같은 것은 있을 필요가 없다.

“(2) 자본주의의 폐해를 극복하면서도 새로운 생산 활동의 원동력이어야 하고”

인문학이 자본주의의 폐해를 무슨 수로 극복한다는 것인지 감도 오지 않는다. 인문학이 새로운 생산 활동의 원동력이 되어야 한다고 하는데 이것도 무슨 말인지도 모르겠다. 사기꾼이라면 인문학을 사기 사업의 원동력으로 삼을 수도 있겠다.

“(3) 기존의 기술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야 하고”

인문학이 기존의 기술적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옛날부터 공학자들이 기술을 개선해왔고 많은 진보가 이루어졌다.

“(4) 인간 사이의 소통과 공감, 사랑을 이끌어내야 하고”

인문학 같은 소리하지 말고 부모나 애인한테 떼나 쓰지 말아야 할 것이다.

“(5) 이념이나 형식 논리에 매몰되면 안 되고”

형식 논리도 안 지키는 것은 학문이라고 할 수 없다.

“(6) 인간을 대상으로 한, 인간이 중심이 된, 인간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인간이 하는 학문 중에 인간을 위한 것 말고 외계인을 위한 것이 있는가?

마치 비전공자스플레인의 종합선물세트를 보는 것 같다. 이를 다 만족시키는 건 인문학이 아니고 종교다. 종교에 요구할 것은 학문에 요구하니 성에 차지 않는다. 성경 읽고 성령의 불벼락을 받듯이 인문학 서적을 읽고 감동의 회오리가 몸을 휘감아야 하는데, 아니면 불경 읽고 마음이 고요해지듯이 인문학 서적 읽고 마음의 평정을 찾아야 하는데, 전공자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 감동은커녕 마음만 더 심란해진다.

텔레비전을 틀거나 신문을 펴면 석학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사람들의 입맛에 맞는 이야기를 해준다. 누가 붙여준 권위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권위 있다고 하는 사람들이 언론에 나와 내 입맛에 맞는 이야기를 해주는데,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석학님들 하시는 말씀에 딴지나 걸고 재미없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한다고 해보자. 당연히 기분 나쁜 수밖에 없다. “인문학은 본질적으로 인간 사이의 소통, 너와 나와 사이의 공감, 사랑”인데 전혀 공감할 수 없는 말을 들으니 기분이 나쁠 수밖에. 그렇게 전공자들을 꾸짖는 것이다. “너희가 하는 것은 진정한 인문학이 아니야” 하고.

이는 합성조미료에 길들여진 사람에게 버섯 갈아 넣고 멸치 갈아 넣은 천연조미료로 음식을 만들어 줘봐야 “음식이 밍밍하고 맛이 없다”는 대답밖에 들을 수 없는 것과 비슷하다. 이렇게 보면 비전공자스플레인이 나오는 것도 그리 이상하지 않다.

* 뱀발: 강신주가 하루아침에 나온 게 아니다. 강신주가 나올 만한 토양은 이미 오래 전부터 마련되어 있었다. 강신주가 예수라면 이어령은 세례 요한이다. 이어령은 “인문학은 이러저러한 것”이라고 하며 강신주의 출현을 예고했고 강신주는 “내가 진짜 철학자고 내가 하는 게 진짜 철학이다”라는 말씀을 선포하며 돌아다니고 있다.

(2015.07.03.)

2015/09/02

기업 인사담당자가 선호하는 얼굴상

     

페미니즘이고 뭐고 다 떠나서, 인사담당자 본인들은 엉망으로 생겨놓고 구직자들한테 호감 가는 얼굴을 요구하는 것은 반칙 아닌가?
 
 
 
  
(2015.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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