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주 박사가 2012년 4월 <중앙일보>에 기고한 “수치심은 정신이 살아 있다는 증거”라는 칼럼이 논란이 되고 있다. 실린 지 1년도 훨씬 지난 글이 지금에야 화제가 되는 것은 아마도 그 글이 『감정수업』에도 그대로 실려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강신주 박사가 보기에 서울역 앞 노숙자들은 수치심이 없는 사람들이다. 노숙자들이 길바닥에 널부러져 있는 것은 치욕을 느끼지 않는 것이고, 치욕을 느끼지 않는 마비된 상태에서 감정을 깨우기 위해 필요한 것은 수치심인데 노숙자들에게는 수치심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강신주는 “자존심을 느낀다면 어떻게 노숙자로 살아갈 수 있겠는가?”라고 묻고는 “어떻게 해야 노숙자를 하나의 인격자로 깨울 수 있을까?”를 고민한다.
수치심이 없다면 자신이 한 행동이 부끄러운 것인지 느끼지 못할 것이므로 그 때문에 부끄러운 행동을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부끄러운 행동을 한다고 해서 그 사람에게 수치심이 없다고 하는 것은 섣부른 판단이다.
예전에 건설 노동자를 만난 적이 있다. 그 노동자는 자기들이 왜 파업을 하는지에 대해 말하며 열악한 노동 조건을 설명했다. 자신이 공사장에서 노상방뇨를 하고 있는데 지나가던 어떤 어머니가 어린 자식에게 “어려서 공부 안 하면 나중에 저렇게 된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고 말했다.
노상방뇨를 한 노동자는 수치심이 없어서 그랬던 것인가? 아니다. 수백 명이 일하는 건설현장에 화장실은 한 개밖에 없었다. 공사장에 만드는 노동자를 위한 시설(화장실, 식당 등)은 공사를 끝내면 모두 없애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장은 최소한만 만들려고 한다. 오줌을 바지에 쌀 수도 없고 인근 건물에 가서 해결할 수도 없으니 건설 노동자들은 공사장에서 노상방뇨를 할 수밖에 없다. 이 때 노동자의 수치심은 그러한 행동을 제약하는 조건이 되지 못한다. 이를 노숙자에게 적용한다고 해도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사실, 수치심에 대한 글을 쓰기 위해 언급할 대상은 정말 많다. 여러 층이 있다면 가장 상층부를 언급하는 게 좋을 것이고 그게 여의치 않다면 그 밑에를, 그것도 여의치 않다면 두루뭉술하게 언급하는 것이 온당할 것이다.(강신주 박사가 그 기사를 쓸 당시는 2012년 4월로 마침 대통령이 이명박이었다) 그런데 강신주가 언급한 것은 가장 취약한 계층인 노숙자다. 이들은 명예훼손 소송을 걸지 못할 것이고 신문사에 압력을 넣지도 못할 것이다.
권력자를 비판하는 것이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라서 못 한다고 하자. 그래도 굳이 노숙자를 수치심 없는 사람으로 매도해야 하는가? 강신주 박사가 한양대에서 한 강연 중에 인(仁)을 강조한 적이 있었다. 그 강연에서 강신주 박사가 말한 인(仁)이란 다른 사람의 아픔을 느끼는 것이다.(이런 해석은 양명학적 해석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확실치는 않다.) 강신주는 자본주의가 비-인간적인 삶을 유도한다면서 다른 한편으로 자본주의 사회의 경쟁에서 가장 바깥으로 밀려난 노숙자들에 대해 그런 식으로 말했다. 강신주 박사는 적어도 노숙자의 아픔은 느끼지 못하는 듯 보인다.
강신주 박사는 공중파에 나와서 자본주의를 거부해야 한다고 대놓고 말한다. 얼핏 보면 매우 급진적이고 근본적인 비판인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강신주 박사의 주장은 무력하다. 그가 말하는 사회 문제는 모두 개인의 문제로 환원되기 때문이다. 강신주 박사가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수준은 가정에서 냉장고를 없애는 것 정도밖에 안 된다.
* 링크(1): [중앙일보] 수치심은 정신이 살아있다는 증거 / 강신주
( http://sunday.joins.com/article/view.asp?aid=25595 )
* 링크(2): [경향신문] 인간다운 삶을 가로막는 괴물, 냉장고 / 강신주
( www.khan.co.kr/opinion/column/article/201307212131165 )
(2014.0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