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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19

다른 방식으로 과학사 수업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과학사에는 양립불가능한 이론들이 경쟁을 벌이는 사례들이 종종 나온다. 어떤 경우는 두 이론의 설명력이 동등하다고 하고, 어떤 경우는 두 이론 중 한 이론이 어떤 이점을 가지고 다른 이론이 다른 이점을 가진다고 한다. 나는 과학을 잘 모르니까 그렇게 설명하면 그냥 그러려니 한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당대의 과학 활동을 재현해본다면, 대단한 것이 아니라 당대 과학자들이 했던 문제 풀이 정도라도 따라해 본다면, 뭔가 몰랐던 점이 보일 수도 있지 않을까?

내가 과학사 수업을 그렇게 많이 들은 것은 아니라서 자신 있게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내가 들은 것만 놓고 본다면, 과학사 수업에서는 과학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주로 과학에 관한 것에 관한 것을 다루었던 것 같다. 그래서 적어도 나의 경우에는, 과학사 수업을 듣고 당대 과학에 영향을 주었을 수 있는 것들에 관한 이해가 늘어났을지는 몰라도 당대 과학에 관한 이해는 거의 늘어난 것 같지 않다.

하버드대에 교환 학생으로 다녀온 대학원 선배에 따르면, 하버드대에서는 학부 과목으로 <18세기 물리학사> 같은 과목도 개설된다고 하며, 수업 시간에 학생들이 당대 물리학에서 문제가 되었던 문제들을 연습 문제 풀듯이 직접 종이에 풀어보기도 한다고 한다. 수업이 <과학사>나 <물리학사>이었다면 진도 나가기 바빠서 문제 풀이 같은 것은 못했을 텐데 <18세기 물리학사>로 한정 지으니 문제 풀이 같은 것이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면 한국에서도 학부 수업으로 <18세기 물리학사> 같은 것을 개설할 수 있을까? 전공과목으로 개설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런 수업을 개설할 학과가 없기 때문이다. 서울대에 있는 동양사학과, 서양사학과, 국사학과처럼 과학사학과 같은 것이 있어야 할 텐데 그런 수업을 개설할 수 있을 텐데 한국 대학에 그런 학과는 없으니까 전공과목으로는 개설할 수 없다. 그런데 전공과목으로 개설하지 못한다고 <18세기 물리학사> 같은 과목을 개설하지 못 하나? 전공과목이 안 되면 교양과목으로 개설할 수도 있는 것이다. 학생들이 너무 부담스러워할 것 같으면, 성적 부여방식을 A/F가 아니라 P/F로 하면 가능할 수도 있다.

대체로 교양 수업이라고 하면 전공 수업의 약화된 버전 정도로 여기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꼭 그래야 할 이유는 없다. 전공 수업보다 더 센 교양 수업이 있으면 왜 안 되는가?

<18세기 물리학사> 같은 과목을 교양 강의로 만들면 누가 듣겠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이과대생이나 공대생이 들으면 된다. 이과대생이나 공대생도 어차피 교양 학점을 이수해야 하니까 그들 중 일부가 수강할 것이다. 약간 좀 별난 학생들, 취향이 고상한 학생들, 방황하는 학생들 등을 꼬시면 수업 개설 인원을 모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학부 <경제학사> 같은 수업도 다른 방식으로 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아는 방식의 <경제학사> 수업은 일종의 사상사 수업 비슷하게 진행된다. 그런데 사상을 잡다하게 아는 것이 중요한가? 차라리 다루는 범위를 줄여서 특정 시기의 경제학사를 다루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연습 문제를 풀면서 경제학자들이 실제로 고민한 이론적인 문제와 해결 방식을 탐구하는 방식으로 학부 교양 수업을 구성할 수도 있을 것이다.

(2020.12.19.)


2021/02/17

자연과학대학 건물



자연과학대학 건물은 이상하게 되어있다. 501동, 502동, 503동, 504동, 이렇게 건물 네 동을 하나로 붙여놓고는 ‘500동 건물’이라고 부른다. 밖에서 보면 건물들이 따로따로 있는 것 같은데 들어가 보면 하나의 건물로 되어 있다. 건물 구조가 이상하게 되어 있어서 갈 때마다 길을 못 찾고 헷갈린다. 왜 건물을 이렇게 만들어놓았을까.

이것과 비슷한 것이 불교 건축물 중에도 있다. 금산사 미륵전은 밖에서 보면 3층 건물인데 들어가 보면 단층 건물이라고 한다. 내가 아직 금산사를 가본 적은 없지만, 그와 비슷한 구조의 건물을 중국에서 본 적이 있다. 소주에서 보았는지 항주에서 보았는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데 역시나 밖에서 보면 3층이고 안에서 보면 단층이다. 왜 이렇게 만들었는가? 단층 건물인데도 밖에서 보면 3층인 것처럼 해놓은 것은 건물의 높이가 그만큼 높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고 안에서 보면 단층인 것은 부처님의 위엄을 보이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자연과학대학 건물을 그렇게 만든 것도 일종의 상징성이 있는 것인가? 건물 네 동을 붙여놓은 것은 자연과학대학의 규모를 보여주는 것이고 건물 내부가 하나로 붙어있는 것은 자연과학대학의 일체감을 보여주는 것인가? 물론 이건 개소리이기는 한데, 왜 그런 식으로 건물을 만들었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2020.12.17.)


2021/02/15

<재정학> 기말고사에 대한 경제학과 이준구 선생님의 답변



<재정학> 기말고사를 보고 나온 이자성이라는 학생이 퇴근하는 교수의 차를 가로막으며 이렇게 따져물었다.





“준구형, 거 재정학이 너무 심한 거 아니오?”

이에 대한 이준구 선생님의 답변.





(2020.12.15.)


2021/02/14

방송에서 영화 <조제>를 소개하는 것을 보고



영화 프로그램에서 <조제>라는 영화를 소개했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이라는 일본 영화를 리메이크한 한국 영화라고 한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이라는 영화가 있다는 것까지는 알고 있었는데 동물 나오는 유럽 영화인 줄 알고 어떤 영화인지 찾아보지도 않았는데, 그게 일본 영화라는 것을 며칠 전에야 알았다.

영화 프로그램에 따르면, <조제>라는 영화는 작품의 완성도를 떠나서 내가 안 좋아할 만한 영화인 것 같다. 가난하고 힘들게 사는 사람들이 궁상떠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속으로 ‘영화가 참 재미 없겠네’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뒤에서 어머니가 이렇게 말했다. “거, 더럽게 재미없겠네.” 어머니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던 모양이다.

영화에는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의 이름을 물어보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데 이름이 뭐예요?”, “조제라고 불러.” 영화 소개만 봐도 가슴이 답답해진다. 저런 영화를 보고 감동하는 사람들은 영화를 보고 어떤 요소 때문에 감동하는 것일까? 그런 사람들이 말하는 감동이라는 것과 내가 생각하는 감동이 비슷한 것인가?

나 같은 사람이 감동할 영화를 만들려면 이렇게 만들어야 한다.

- 남자: “그런데 이름이 뭐예요?”

- 여자: “조제라고 불러.”

- 남자: “조제... 조제... [...] ‘제’자가 혹시 돌림자 아닙니까? [...] 거, 실례지만 으데- 조씨입니까?”





(2020.12.14.)


2021/02/12

<신고리 원전 5・6호기 공론화위원회>의 의의



산업부 공무원이 월성 원전 1호기 관련 문서 444개를 삭제한 사건이 있었다. 검찰 조사에서 해당 공무원은 자신이 “신 내림을 받은 것 같았다”고 진술했다고 한다. 신 내림이라니. 이게 무슨 개소리인가 싶지만, 삭제한 문서가 마침 444개라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 찝찝하기는 하지만, 어쨌든 신 내림은 그냥 넘어가자.

해당 공무원이 관련 문서를 삭제한 것은 월성 원전 1호기의 경제성 평가 조작 의혹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월성 원전 1호기를 가동 중단할 때와 대비하여 계속 가동할 때의 경제성을 일부러 낮게 평가하도록 조작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자, 해당 공무원은 관련 문서를 임의로 삭제했다. 이에 대한 언론 보도를 보니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3년 전에 있었던 <신고리 원전 5・6호기 공론화위원회>다.

<신고리 원전 5・6호기 공론화위원회>는 2017년 당시 건설 중인 신고리 원전 5・6호기를 건설 중단해야 하는지 여부를 두고 만들어졌다. 많은 사람들은 공론화위원회에서 건설 중단으로 결론이 날 것으로 예상했고, 나도 그렇게 될 줄 알았다. 그런데 실제 공론화위원회의 결론은 건설 재개로 나왔다. 왜 그랬을까? 내가 관련 자료를 제대로 본 것은 아니지만, 관련 연구자에게 들은 바로는 대충 다음과 같다고 한다.

찬반 동수로 맞추어 층화추출방식으로 선정된 시민대표참여단은, 2박 3일 동안 건설 중단 측과 건설 재개 측의 발표를 번갈아 듣고 중간 중간에 시민들끼리 토론하며 의견을 조율했다. 흥미로운 점은 시간이 지나면서 시민대표참여단의 의견이 점점 원전 건설 재개 쪽으로 기울어졌다는 것이다. 건설 재개 쪽으로 기울어진 원인으로 지목되는 것 중 하나는 건설 중단 측의 전문성 부족이다. 건설재개 측에서는 원자력 관련 전문가들이 나와서 설명을 잘한 반면, 건설 중단 측에서는 환경 운동가 같은 사람들이 나와서 전문성이 떨어지는 설명을 하거나 흔히 말하는 감성팔이 같은 것이나 했다는 것이다.

공론화위원회에서 나온 결론이 법적인 효력을 지니는 것이 아니고, 공론화위원회 자체도 어떠한 법적인 근거가 있어서 만들어진 것도 아니다. 그러면 공론화위원회를 왜 만들었는가? 대통령이 공론화위원회를 만들어보자고 해서 그냥 만들어본 것이다. 탈-원전을 공약으로 내세웠으니 새로 짓던 원자력발전소를 짓지 못하게 해야겠는데, 그러기에는 이미 들어간 돈이 너무 많아서 그냥 공사를 중단시키면 정부의 정치적 부담이 너무 커지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민의 뜻이라고 하면서 원자력발전소 건설 중단의 목소리를 내도록 하면, 정부의 정치적 부담이 줄어들게 될 것이다. 당시 여론은 원자력발전소 건설에 부정적이었기 때문에 공론화위원회를 하면, 설사 찬반동수로 공론화위원회를 만들어도, 결국 건설 중단 쪽으로 결론이 도출될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러면 <신고리 원전 5・6호기 공론화위원회>의 의의는 그냥 시험적으로 공론화위원회라는 해보았다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 않은가? 시민들의 싸워가며 얻어낸 민주주의의 산물도 아니다. 정부가 자기들이 정책을 집행하는 데에 유리할 줄 알고 했다가 뒤통수 맞은 것뿐이다. 그런데 이에 대한 당시 전문가들의 평가는 나 같은 무식쟁이의 시각과는 다소 달랐다. 일부 사회학자들은 <신고리 원전 5・6호기 공론화위원회>를 두고 숙의 민주주의가 어쨌다는 둥, 무슨 거버넌스가 어쨌다는 둥, 집단 지성이 발휘가 됐네 안 됐네, 시민 권력이 탄생했네 어쩌네, 대중들의 과학에 대한 신뢰가 어쩌고 하는, 온갖 의미를 부여했다. 신문 칼럼도 아니고 KCI 등재지에 게재된 학술논문에서 그런 소리를 한 것이다. 그런데 그런 함축은 어디에서 어떻게 도출되었는가? 그러한 결론이 도출될 만한 구석은 잘 보이지도 않았다.

누구나 접근가능한 자료들에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의 연구들은, 애초부터 입증도 안 되고 반증도 안 되게 되어있기 때문에 반론에도 취약하지 않다. 해석상의 차이라고 하거나 그런 의미가 있다고 거듭 주장하면 되기 때문이다. 내가 꽃을 ‘꽃’이라고 불러서 나에게 와서 꽃이 되었다는데 그게 뭐가 문제냐고 우긴다면, 그에 대해 뭐라고 반박하겠는가. 그런데 가끔씩 이번 문서 삭제 사건 같은 것이 터져서 그러한 연구의 허구성이 들통나기도 한다.

월성 원전 1호기의 경제성 평가에 조작 의혹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정말 조작된 것이라면, 그리고 신 내림을 받아서가 아니라 윗선의 지시에 의한 것이라면, <신고리 원전 5・6호기 공론화위원회>에 관한 온갖 의미부여는 그저 새 정부에 대한 희망사항에 불과한 것임이 드러날 것이다. <신고리 원전 5・6호기 공론화위원회>가 “숙의민주주의의 모범”이거나 “시민권력의 탄생” 같은 것을 보여주는 사례라면, 월성 원전 1호기 폐쇄 같은 것도 공론화위원회 같은 데서 공개적으로 처리했겠지 왜 경제성 평가를 조작하려고 했겠는가?

<신고리 원전 5・6호기 공론화위원회> 이후에 변변한 공론화위원회가 없었다는 점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그 동안 한국 사회에 갈등이 없었던 것이 아닌데, 공론화위원회가 그렇게 대단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라면 그 동안 공론화위원회가 왜 제대로 열리지 않았는가? 이에 대한 최선의 설명은, 애초에 정부가 정치적 부담을 져야 하는 일을 시민을 동원하여 쉽게 처리하려고 만든 것이 공론화위원회인데 예상과는 달리 정부 뜻대로 굴러가지 않으니까 그 이후에는 안 만들었다는 것이다.

월성 원전 1호기 관련 문서를 왜 삭제한 것인지, 누구의 지시를 받고 했는지는 검찰이 밝히든 말든 할 거니까 내가 신경 쓸 부분은 아니다. 여기서 내 관심사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사실 관계를 밝히는 것도 아니고, 인과관계나 상관관계를 찾아내는 것도 아니고, 숨겨진 어떠한 함축을 이끌어내는 것도 아니고, 누구라도 약간의 시간만 들이면 쉽게 구할 수 있는 자료에다가 의미부여나 하는 것이 왜 연구라고 불리는가? 사춘기를 세게 겪는 청소년도 아닌데 왜 그들은 자신의 의미부여 활동을 마치 연구 활동인 것처럼 간주하는 것인가?

* 링크: [조선일보] 감사 전날 밤 원전파일 삭제...공무원, 윗선 묻자 “신 내림 받았나봐”

( www.chosun.com/national/court_law/2020/12/02/2UZ2ZHHO5VD3NGJLJU33UCJ2GQ )

(2020.12.12.)


초등학교 셔틀버스의 전원주택 진입로 출입을 막다

전원주택 진입로에 깔린 콘크리트를 거의 다 제거했다. 제거하지 못한 부분은 예전에 도시가스관을 묻으면서 새로 포장한 부분인데, 이 부분은 다른 부분보다 몇 배 두꺼워서 뜯어내지 못했다. 그 부분을 빼고는 내 사유지에 깔린 콘크리트를 모두 제거했다. 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