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1/23

백제 무왕과 신라 선화공주

     

백제 무왕과 신라 선화공주의 이야기는 『삼국유사』 권(卷)2 기이(紀異)편 무왕(武王)조에 나온다.
  
무왕은 과부의 자식으로 어려서 가난하게 살았다. 무왕의 어렸을 적 이름은 서동이었다. 서동은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인 선화 공주가 세상에 둘도 없이 아름답다는 소문을 듣고 신라의 서울로 가서 아이들에게 마를 나누어주며 선화 공주가 서동과 밀통한다는 동요를 부르고 다니게 했다. 서동이 지은 동요는 아이들의 입으로 퍼져 결국 진평왕의 귀에 들어가는 지경이 되자, 백관들은 동요의 내용을 사실로 믿고 선화 공주를 탄핵하여 선화 공주는 유배가게 되었다. 공주가 누명 쓰고 유배를 떠날 때, 왕후는 공주에게 노자로 순금 한 말을 주었다.
  
선화공주가 유배지로 가는 도중에 어떤 남자가 나타나 공주를 호위하겠다고 했다. 공주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몰랐지만 어쩐지 미더워서 자신을 수행하도록 허락했고, 그러다 두 사람은 몰래 정을 통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런 뒤에야 선화 공주는 그 남자가 서동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서동과 함께 백제에 간 선화공주는 왕후가 준 금을 서동에게 꺼내어 놓았다.
  
- 서동: “이게 무엇이오?”
- 선화 공주: “이것은 황금입니다. 아마 평생 넉넉하게 살 수 있을 거예요.”
- 서동: “내가 어려서부터 마를 캐던 곳에 이런 것이 흙처럼 쌓여 있소.” 
  
선화 공주는 서동의 말을 듣고 놀라서 이렇게 말했다. “이 새끼 허언증 좀 보게?”
  
  
(2016.09.23.)
    

2016/11/20

고종석이 트위터에 임하는 태도

   

예스24의 웹진인 <채널예스>는 고종석이 2013년 10월에 한 강의를 다음과 소개했다.
  
“고종석은 트위터 안에 정치적인 글이 많지만 사실 상대방을 설득하기보다는 같은 편을 공고하게 만드는 데 쓰이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리고 형식도 내용도 크게 중요하지 않은 트위터 언어에서 중요한 것은 글쓰기 능력보다 글쓰기 태도라고 강조했다. 결국 사람과 만나 대화하는 공간인 SNS에서 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이야기였다. 고종석은 자신도 앞으로는 ‘깨시민’이나 ‘문빠’ 같은 말을 쓰지 않았다고 말하며 강의를 마무리했다.”
  
  
그리고 2016년의 고종석 트위터는 이렇다.
  
  
  
    
  
* 링크: [채널예스] 고종석 “트위터에서 중요한 것은 글 쓰는 태도”
  
  
(2016.09.21.)
     

2016/11/18

[존재론] 니콜라이 하르트만, 『존재론의 새로운 길』 요약 정리 (미완성)

     

[ 니콜라이 하르트만, 『존재론의 새로운 길』, 손동현 옮김 (서광사, 1997).
  Nicolai Hartmann (1968), Neue Wege der Ontologie, 5th edition (Kohlhammer: Stuttgart) ]
  
  
  1. 고전적 존재론의 종언
  
■ 철학의 길
철학은 실천적인 과제를 가짐.
조바심을 누르고 숙고의 길을 찾으며 뒤로 멀찍이 물러서는 일도 서슴치 않는 것은 독일 정신의 강점

■ 존재론의 의의
철학은 존재에 대한 앎 없이는 실천적인 과제에도 접근할 수 없음.
  
■ 고전적 존재론의 기본 구도
근본적인 주제들에 있어서는 존재론적으로 구축
 
■ 고전적 존재론의 붕괴
고전적 존재론은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시작되어 스콜라 철학의 종언까지 이어짐.
보편자가 사물을 움직이도록 하는 목적 활동적으로 규정하는 원리라는 근본적인 통찰(목적론적 해석)
  우리 이성이 그 열쇠(움직이게 하는 것)를 파악하면 모든 변화를 다 알 수 있다고 함. 그래서 연역적인 성격을 띠게 되고, 경험적인 것을 소홀하게 된다.
  그리고 셸링이나 헤겔로 다시.


  2. 존재 범주의 파악
  
■ ‘본질 존재론’의 오류
고전적 존재론과 새로운 존재론을 나누는 것은 실재적 사태 자체로 나아가는 것이다. 인식이 문제가 아니라 인식의 대상이 문제다. 선천성과 후천성의 대립은 인식론적인 대립일 뿐.


  3. 새로운 실재성 개념

  고전적 존재론에서는 심적인 것은 유기론적으로, 정신은 본질의 영역으로 이해한다. 정신은 실재 세계 내에 있으며, 발생-소멸한다.
  데카르트 이원론에서는 정신과 육체는 비공간과 공간의 문제. 인간의 본래적 삶은 불가분적 상호 결합한다. 이는 실질성과 물질성을 혼동한 것이다.
  실질성의 참된 징표는 공간, 물질이 아니라 시간과 개별성의 범주이다. 개별성은 일회성이다.
  고전적 존재론에서는 비시간적인 명료한 것을 참된 것으로 보았으나, 이건 단순한 이법적일뿐이다.
  이 세계는 완결된 체계가 아니고 생성은 존재의 한 방식이다. 생성은 그 실재하는 것의 위계나 층에 따라 다양한 양식을 가진다. 공간적-물리적 운동, 유기적 과정 심적 과정.
정신적-역사적 과정
  의존 속에서의 자유(법칙성이 허용하는 이내에서만)


  4. 새로운 존재론과 새로운 인간형

  인간의 형태, 정신적 삶. 역사적 현실성은 의미를 이해하는 게 아니라 법칙성을 파악해야 한다. 이점에서 관념론은 나아가지 못함.
  인간은 정신적 존재이나 공간적 관계. 유기적 관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새로운 존재론에서는 세계의 총체성 이해부터, 그 다음 인간과 연관. 그 다음 인간(고전적 존재론은 이와 반대)
  인간의 신체까지도 이론적으로 주어짐(주관, 객관)
  범주 연구 들어지만, 범주의 불가사의 함은 인정해야 한다.
  새로운 인간학은 정신적 삶의 자유성을 위한 영역과 인간 존재의 유기적.
  존재론을 통합시키기도 함. 의존성.


  5. 세계의 연속적 위계와 층구조

  인간학을 수립하기 위해 새로운 존재론이 필요하다. 이때 세계의 구조에 대한 총괄적 전망이 필요하다.
  존재 형성물의 위계서열만 가져오는 범주적 차이성이 드러나지 않으므로, 다른 방식이다.
  데카르트가 다른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너 나눠서 물질, 생성, 심성, 정신.
  각 층은 다른 존재범주와 합치 않는 고유한 존재범주.
  실재 세계의 이 네 층을 형상물의 위계와 합치하지 않고, 종부되어 결처 있음. 사람은 다 포함된다. 인간은 정신적 존재라고 하면 일면적이다.
  이질성 속의 동질성
(1) 범주분석: 층들의 범주적 차이
(2) 성층분석: 층들의 연관 관계


  6. 낡은 오류와 새로운 비판

  물질주의는 세계가 원자와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영혼이나 감정도 마찬가지다.
  정신주의는 인간 행위를 특징짓는 목적관계가 세계 모든 과정과 물리적 과정으로 확장된다. 가장 높은 범주층이 가장 낮은 층에 전이된다. 그런데 사물에 내재된 능동적인 지성을 전제할 수 있나?
  심적인 통일성에서 모나드가 나와서 그 원자가 낮은 층으로 부여되는 것은 층간 경계를 넘어서는 오류.
  연역적 형이상학은 층간의 이질성을 조망 못한다.
  존재론은 세계의 통일상으로 다다가야 한다. 결국 범주론.


  7. 근본 범주들의 변양

  정신: 사상, 인격, 의욕, 자유, 가치평가
  심성: 작용과 내용, 의식과 무 개념, 근거와 본체
  생명: 유기적 조직, 적응과 합목적성, 자기초월
  물질: 공간과 시간, 과정과 상태, 실체성과 인과성

  성층관계

(1) 근본범주들의 재현: 층에서 층으로 넘어갈 때마다 번양한다. 제한적. 높은 층은 더 풍부한 다양성(안 줄어듦)
(2) 범주적 요소의 변양: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질료가 위로 가면 달라지는 것처럼. 상승적 계열은 단절을 거치기도 한다.
물질 -> 생명 -> 심성
  상위구축   상향 형성
세계가 통일적인 동시에 이질적이다.
(3) 환원시킬 수 있는 새로운 것의 등장: 층이 높아질 때마다 범주적 새로움이 등장
ex) 인과관계로 설명 안 되는 게 등장한다.
(4) 층들 간의 간격: 연속체가 아니라 일정한 단계에서 범주적으로 새로운 것이 등장한다.

자유와 의존 문제

각 층마다 범주적인 새로운 게 나오기 때문에 성층 법칙은 과거의 선입견을 해소한다.

  의존성과 자립성
  의거함과 담지됨의 관계

(1) 범주적 의존성은 하위 범주에서 상위 범주로 작용, 하위 범주들은 결정력에 있어 더 강함
(2) 남은 층의 범주들은 높은 층의 존재 기초이며, 높은 층과는 무관하게 존립한다. 상항 형성이나 상위 구축을 받아들이지만 요구하지는 않는다. 낮은 층은 높은 층 없이도 존립한다.
(3) 하위 범주들이 높은 존재층을 규정하는 것은 오직 재료로서만 제한할 뿐 규정하지 않는다.
(4) 높은 범주층의 새로운 것은 낮은 범주층에 대해 전적으로 자유롭다.
  
  
(2018.09.16.)
    

2016/11/17

북한 매체의 모국어 감각 - “잠자코 앉아서 뒈질 날이나 기다려라”

     

1994년 북한 측에서 했던 서울 불바다 발언은 공포스러운 것이었다. “송 선생님, 서울이 여기에서 멀지 않습니다. 전쟁이 나면 서울이 불바다가 되고 말아요. 그렇게 되면 송 선생님도 아마 살아남기 어려울 겁니다.” 서울 불바다 발언에는 군더더기 하나 없이 필요한 말만 있다. 글이나 말에서 절제는 긴장감을 높이는 효과가 있다. 협박은 이래야 한다.

그와 달리, 며칠 전 북한의 <민족화해협의회>가 한 “잠자코 앉아서 뒈질 날이나 기다려라” 발언은 긴장감보다도 한국어가 보여줄 수 있는 해학이나 리듬감 같은 것을 보여준다. 분명히 북한에서 그러한 문구를 짜는 사람들이 따로 있을 텐데, 애초에 문구 만들 때부터 자기들끼리 피식피식 웃으면서 “솔직히 우리가 봐도 웃긴데?” 하면서 글을 쓰지 않았을까 싶다.

하여간 “잠자코 앉아서 뒈질 날이나 기다려라” 같은 표현을 생각해내는 북한 매체를 보면서, 나도 모국어 감각을 갈고 닦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한국에서 힙합하는 사람들도 그런 건 배워야 한다. 통일 되고 북한에 힙합이 전파되면 정말 볼만 할 것이다.

* 뱀발: “잠자코 앉아서 뒈질 날이나 기다려라”는 웬만한 상황에 사용해도 어색하지 않은 표현이다.

(1)

이성계의 낙마 소식을 듣고 정몽주가 이성계 병문안을 왔다. 병문안을 하고 돌아가려 하는데 이방원이 정몽주에게 차 한 잔을 권한다.

- 이방원: “포은 선생님, 제가 시를 한 수 지었는데 들어보시겠습니까?”

- 정몽주: “들려줘 보게.”

- 이방원: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 선생님께 답시를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 정몽주: “잠자코 앉아서 뒈질 날이나 기다려라.”

(2)

임진왜란 때 고니시 유키나가는 대군을 이끌고 동래성에 도착했다. 전투가 시작되기 전 고니시 유키나가는 동래부사 송상현에게 푯말을 써서 보냈다.

- 고니시 유키나가: “명을 치려하니 길을 빌려 달라.”

- 송상현: “잠자코 앉아서 뒈질 날이나 기다려라.”

(3)

폼페이우스를 지지하던 로마 원로원은 카이사르에게 군대를 해산하고 로마로 돌아오라는 결정을 내렸다. 군대를 끌고 루비콘 강을 건너는 것은 로마에 대한 반역행위다. 결단을 촉구하는 부하들 앞에서 카이사르는 이렇게 말했다. “원로원 역적패당 놈들, 잠자코 앉아서 뒈질 날이나 기다려라.”

* 링크: [조선일보] “잠자코 앉아 뒈질 날이나 기다려라” 北, 김정은 비판한 朴대통령에 막말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6/09/11/2016091100335.html )

(2016.09.17.)

초등학교 셔틀버스의 전원주택 진입로 출입을 막다

전원주택 진입로에 깔린 콘크리트를 거의 다 제거했다. 제거하지 못한 부분은 예전에 도시가스관을 묻으면서 새로 포장한 부분인데, 이 부분은 다른 부분보다 몇 배 두꺼워서 뜯어내지 못했다. 그 부분을 빼고는 내 사유지에 깔린 콘크리트를 모두 제거했다. 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