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1/24

[외국 가요] 웨더 걸스 (The Weather Girls)



The Weather Girls - It’s Raining Men

( www.youtube.com/watch?v=uYxZmYicKg8 )

(2024.01.02.)


언 발에 오줌 누기



나는 주중에는 기숙사에 살고 주말에는 집에 간다. 집이 시골집이라 마당이 있고 마당 구석에는 감나무가 있다.

나는 집에서 볼 일을 볼 때 오줌은 뒷마당에 있는 감나무 밑에서 눈다. 어느 날 화장실에서 볼 일을 보다 한정된 자원이 이런 식으로 소모되는 게 말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후로 집에서 볼 일 볼 때는 그렇게 한다. 마당이 담장 안에 있기 때문에 괜찮다.

어젯밤, 나는 맥주를 두 병 마시고 볼 일을 보기 위해 현관문을 나왔다. 현관문을 나오면 문 앞에 있는 고양이집에서 고양이가 뛰쳐나와서 재롱을 떤다. 내가 뒷마당으로 가면 으레 고양이들은 나를 따라온다. 어젯밤도 그랬다.

감나무 밑에서 오줌을 누는데 점점 발등이 뜨듯해졌다. “언 발에 오줌 누기”라는 한국 속담이 떠올랐다. 깜짝 놀라 나는 급히 바지를 손으로 만져보았다. 바지는 멀쩡했다. 멀쩡히 오줌을 잘 누고 있는데 왜 내 발등이 뜨듯해지나 싶어서 오른쪽 발등을 보니, 나를 따라온 노란 수컷 고양이가 내 발등 위에 오줌을 누고 있었다.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화도 나지 않았다. 내가 고양이한테 “너 뭐 하냐?”라고 가만히 물으니까 고양이는 나를 슬쩍 보더니 슬금슬금 도망갔다.

술은 내가 먹었는데 왜 고양이가 나한테 이러는 걸까? 나는 이런 일을 처음 당했다. 아흔 살이 넘은 할머니도 이런 경우는 처음 본다고 하셨다.

(2014.11.24.)


2015/01/23

철학의 미래



철학의 여러 분야 중 윤리학만 빼고 나머지는 다른 학문에 편입될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가끔씩 있다고 들었다. 그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의 근거는 단순하다. 지금의 분과 학문들은 철학에서 떨어져나온 것이고, 그렇게 되면서 철학이 다루는 영역도 줄어들었고, 이러한 추세는 지속될 것이니, 언제일지는 모르더라도 결국 철학 고유의 영역으로 남는 것은 윤리학 정도일 것이라는 말이다. 나는 그러한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철학과에서 다루어야 할 것은 오히려 늘어날 것이다.

철학에는 형이상학, 윤리학, 인식론 같은 전통적인 분야 말고도 비교적 최근에 생긴 분과 학문에 대한 철학도 있다. 물리학의 철학, 생물학의 철학, 사회과학의 철학 등이 그것이다. Routledge Contemporary Introductions to Philosophy Series 등은 여러 분과 학문에 대한 철학을 소개한다.

이 시리즈에 심리철학이 있고 심리학의 철학도 있다. 이름은 비슷한데 내용은 전혀 다르다. 심리철학은 심리학에 필요하기는 하지만 심리학에서는 다루지 않는 메타적인 문제(심신문제 등)를 다루고, 심리학의 철학에서는 주로 심리학에서 다루는 문제 중 메타적인 문제를 다룬다.

경제학의 철학을 소개하는 책도 있다. 경제학의 철학은 게임이론처럼 경제학에서 다루는 주제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철학의 주제인 ‘인과’도 다룬다. “통화량 증가는 물가상승의 원인이다”라는 말을 떠올려보자. 경제학에서 하는 설명 중 상당수는 인과적 설명이다. 그런데 ‘인과’는 무엇인가.

철학의 전통적인 주제인 ‘인과’는 대부분의 개별 학문의 철학에서 문제가 된다. 물리학의 철학에서도 인과를 다루어야 하고 생물학의 철학에서도 인과를 다루어야 하고 경제학의 철학에서도 인과를 다루어야 한다. 각 학과에서 인과 전문가를 고용하는 것은 너무 비-효율적이다. 철학과에서 인과를 다루는 것이 비용 측면에서 봐도 효율적이다. 그러니까 일종의 아웃소싱인 셈인데, 이는 인과 같은 전통적인 문제가 각 분과 학문의 문제가 된다고 하더라도 철학과가 별도의 학과로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인과와 관련된 근대적인 논의의 시발점은 흄이다. 그런데 듣기로, 흄이 인과를 문제 삼은 계기 중 하나는 중세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우인론이라고 한다. 이것과 관련하여 아리스토텔레스를 연구하는 사람도 있어야 하며, 이 사람들을 사학과로 보낼 수는 없는 일이다. 결국 고대철학부터 현대철학까지 한 세트로 철학과에 있어야 한다. 이는 철학과가 별도의 학과로 유지될 것이라는 또 다른 근거일 것이다.

철학에서 물리학, 생물학, 심리학, 경제학 같은 학문들이 분리되어 나갔다고 철학의 영역이 줄어든 게 아니다. 오히려 철학의 고유 분야들은 대부분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았으며, 집 나갔다가 자식까지 달고 집에 되돌아오기도 한다.

과학철학의 주제 중 하나는 ‘과학적 설명’이다. 과학적 설명은 그렇지 않은 설명과 어떤 점에서 다른가? 20세기 중반에는 과학적 설명이 법칙을 포함하는 논증 형식을 띤다는 점에서 그렇지 않은 설명과 다르다고 보았다. 초기조건과 법칙을 결합하면 물리현상은 설명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생물학에는 법칙이 없다. 이들 학문에서의 설명은 왜 과학적 설명인가? 여기서 법칙 대신 등장하는 후보들이 ‘메커니즘’과 ‘모형’이다. 모형으로 생물학 뿐 아니라 물리학도 설명할 수 있다는 사람들이 등장하고, 메커니즘으로 생물학 뿐 아니라 사회과학도 설명할 수 있다는 사람들도 등장했다. 이제 해야 할 일은 메커니즘이 뭔지, 모형이 뭔지, 그리고 얘네를 통해서 하는 설명이 왜 과학적 설명인지 설명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법칙이 무엇이냐는 문제도 해결이 된 게 아니다. 경제학에도 “법칙”이라고 부르는 게 있다. 이 법칙 중 일부는 경험적 일반화이고 일부는 분석적 참인 것 같다. 여기에 대해 카트라이트는 “인과역량”이라는 개념을 사용해서 물리법칙을 설명하는 방식과 동일한 방식으로 경제법칙을 설명하는데, 후버는 물리학의 이상화와 경제학의 모형제작이 다르다면서 “인과적 구조”를 주장한다. 경제학의 등장은 법칙이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 범위를 넓혔다. 해결해야 할 것은 해결되지도 않은 채 해결해야 할 게 더 생긴 셈이다.

정리하자면, 철학에서 전통적인 문제가 해결된 것도 아니고 언제 해결될지 그 기미도 보이지 않는데, 분과 학문의 발달과 함께 그와 관련된 철학적 문제들도 늘어나고 있다. 그래서 나는 분과 학문들이 발달할수록 철학의 영역도 확장될 것이라 믿는다. 몇몇 대학에서 철학과가 없어질 수는 있어도, 다른 학문이 있는 한 철학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철학의 미래는 전혀 걱정하지 않고 내 미래만 걱정하고 있다.

(2014.11.21.)


2015/01/11

최재천 식 통섭은 불가능하고 불필요하다



최재천 교수가 주장하는 문・이과 통합은 이과가 중심이 되는 문과 통합이다. 현재 이과생이 배우는 것을 그대로 배우면서 문과 학생이 배우는 것까지 다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최상위권 학생들은 그래도 된다. 그런 학생들은 몇 문제 틀리지도 않으면서 한 문제 덜 틀리려고 안간힘을 쓰니까, 그럴 시간에 더 많은 것을 배우게 하는 것이 좋을 수도 있다. 그런데 문・이과 통합을 실업계를 제외한 모든 문・이과 학생 모두에게 적용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떤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어떤 능력이 없어서 문과생이나 이과생이 된다. 수학을 못해서 문과생이 된 학생들 중 대부분은 글도 제대로 못 읽는다. 이과생 중에 상당수는 문과 상위권보다도 수학을 못한다. 최재천 교수 말대로 문・이과를 통합하면 이들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이전보다 교육적 효과가 커지기는 할까? 아마도 여러 가지 사회적 비용만 늘어날 것이다.

그런데 문・이과 통합이 왜 필요한가? 최재천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직업을 5~6번 갈아타야 하는데 그 직업이 가지런히 문과 직업으로만, 또는 이과 직업으로만 있을 수가 없다. 그런데 국가가 나서서 개인의 미래를 “내가 생각할 때 넌 과학을 공부할 필요 없다” 이렇게 말했다가 나중에 그 사람이 과학을 배우지 않아서 노숙자가 되면 누구의 책임인가?


용접, 미장, 특수차량 운전 등은 뒤늦게 배울 수도 있지만 과학은 어려서부터 배워도 어렵다고들 한다. 그런데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과, 배우지 않으면 안 되게끔 교육과정을 바꾸는 것은 다르다. 과학에 재능이 있고 흥미를 느끼지만 어쩌다 실업계에 간 학생이 과학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제도적인 장치를 마련하는 것과, 과학을 못해서 인문계에 갈 수밖에 없는 학생이 이과생만큼이나 수학과 과학을 배워야만 하게끔 만드는 것은 다르다. 문과에 온 학생들 중 상당수는 현재 문과 수학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한다. 그런 학생들이 이과 수학을 배우면 이과 직업을 가질 수 있나?

융합・통섭 이야기를 할 때는 꼭 외국 이야기를 한다. 외국의 훌륭한 사람 누구누구는 얼마나 박식했는지 이 분야 저 분야 여러 분야에 손댔다더라 어쨌다더라 이야기한다. 그건 훌륭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안 훌륭한 사람들은 실제로 어떻게 사는가? 언론에서 문・이과 구분은 한국과 일본에서만 하는 거라고 해서, 정말 그런지 독일인 대학원생에게 물어보았다. 동료 대학원생은, 다른 나라는 모르겠고 독일의 경우 그런 구분은 딱히 없는데, 10학년까지는 공통으로 배우고 11학년, 12학년에는 선택 과목으로 갈라진다고 했다. 이건 문과, 이과라는 말만 없는 것이지 그 둘을 구분한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럴 수밖에 없다. 독일인이라고 머리를 하나씩 더 달고 있는 것은 아닐 테니 말이다.

그 대학원생은 경희대 어학원에서 한국어 배울 때 있었던 일을 나에게 말했다. 경영학과 학부생이 쇼팽과 관련한 수업을 수강하고 학점 인정받은 걸 보았다며 이렇게 말했다. “경영학과 학생한테 쓸데없는 걸 너무 많이 가르쳐요. 그런 걸 왜 하는지 모르겠어요. 시간 낭비예요.” 독일인 눈에 비친 후마니타스 칼리지의 모습은 이러했다.

유럽을 돌아다니다 유럽 사람과 결혼한 후배의 말에 따르면, 보통의 유럽 사람은 보통의 한국 사람보다 아는 것도 없고 똑똑하지도 않고 일도 안 한다고 한다. 그런데 유럽 사람들은 왜 한국 사람보다 잘 살까? 왜 유럽 사람의 노동생산성은 한국 사람의 노동생산성보다 높을까? 아마도 산업 구조나 사회 구조가 한국과 달라서일 것이다.

한 나라의 능력은 그 나라를 구성하는 개인들의 능력에 의존하는 것은 맞다. 그렇지만 그 개인들의 능력으로 환원되지는 않는다. 문맹률이 높은 나라에서 고도의 산업을 일으키기 어렵겠지만, 개인들의 지식 수준이 높다고 해서 곧바로 선진국이 되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한 나라의 성취는 조직적인 생산 활동에 의한 성취다. 시골에서 혼자 농사짓는 사람도 크게 놓고 보면 그 나라 농업기술이나 농업정책의 틀 안에서 움직인다. 여타 산업 활동 같은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구조에 대한 언급은 없고 항상 개인을 조지자고만 한다. 도대체 한국인은 얼마만큼 많이 배우고 많이 일해야 하는가?

기계를 만드는 사람이든 프로그램을 만드는 사람이든 다른 사람들이 더 적게 알고도 더 쉽고 편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물건을 만든다. 헬스 트레이너들도 더 적게 운동하고 더 쉽게 근육 만드는 방법을 고안한다. 그런데 왜 배운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못 괴롭혀서 안달일까. 그러면서도 자기들이 남을 괴롭힌다는 사실도 모른다.

* 링크: [조선비즈] 도정일 對 최재천…인문학과 과학의 만남

( 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4/10/31/2014103101071.html )

(2014.11.11.)


초등학교 셔틀버스의 전원주택 진입로 출입을 막다

전원주택 진입로에 깔린 콘크리트를 거의 다 제거했다. 제거하지 못한 부분은 예전에 도시가스관을 묻으면서 새로 포장한 부분인데, 이 부분은 다른 부분보다 몇 배 두꺼워서 뜯어내지 못했다. 그 부분을 빼고는 내 사유지에 깔린 콘크리트를 모두 제거했다. 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