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0/30
[참고 문헌] 과학철학 - 자연 법칙 (선집)
2021/10/28
[cpbc TV] 양정무 교수의 교회미술 2000년 (총 13강)
2021/10/27
[과학철학] Cartwright (1999), Ch 3 “Nomological Machines and the laws they produce” 요약 정리 (미완성)
[ Nancy Cartwright (1999), The Dappled World (Cambridge University Press), pp. 49-74. ]
1. Where do laws of nature come from?
2. An illustration from physics of a nomological machine
3. Models as blueprints for nomological machines
4. Capacities: openness and invention
5. Do we really need capacities?
6. Metaphysical aside: what makes capacity claims true?
7. Nomological machines and the limits of science
1. Where do laws of nature come from?
p.49 #1
The view of post-logical-positivist empiricists
: Laws of nature are basic and other things come from them.
Cartwright follow Rom Harre in rejecting this story.
Capacities are basic
and laws of nature obtain on account of the capacities;
or more explicitly, on account of the repeated operation of a system of component with stable capacities.
Sometimes the arrangement of the components and the setting
are appropriate for a law to occur naturally.
But in any case, it takes what Cartwright calls nomological machine to get a law of nature.
p.49 #2
p.50 #1
A nomological machine is a fixed (enough) arrangement of components or factors, with stable (enough) capacities that in the right sort of stable (enough) environment with, with repeated operation, give rise to the kind of regular behaviour that we represent in out scientific laws,
the role of nomological machines in generating a variety of different kinds of laws: the laws we test in physics, causal laws, results in economics and probabilistic laws
2. An illustration from physics of a nomological machine
p.50 #2
Kepler's law
: we have to establish the arrangement and capacities
of mechanical elements and the right shielding conditions
that keep the machine running properly
so that is gives rise to the Kepler regularities.
p.50 #3
Newton's achievement was to establish the magnitude of the force
required to keep a planet in an elliptical orbit.
The shielding condition is crucial here.
To ensure the elliptical orbit, the two bodies must interact
in the absence of any additional massive body and of any other factors
that can disturb the motion.
p.51 #1
Newton's solution to Kepler's problem
(1) Newton showed that the elliptical geometry of the orbit determines
the inverse-square kind of attraction.
(2) Conversely, he also showed that an attraction could give rise to
the observed regularity of the elliptical motion of Mars.
In both cases, the mechanical concept of force is assumption
that in the right circumstances a force has the capacity
to change the state of motion of massive body.
p.52 #1
Cartwright does not deny the unifying power of the principles of physics.
But she does deny that these principles can generally be reconstructed as regularity laws.
Newton's 'law of gravitation' is not a statement of a regular association between some occurrent properties, instead, about the force between them.
The term 'force' does not refer to yet another occurrent property like mass or distance.
Rather, it is an abstract term that describes the capacity of one body to move another towards it.
A capacity that can be used in different settings produces a variety of different kinds of motions.
p.52 #2
3. Models as blueprints for nomological machines
p.53 #1
On the physics side: chapter 4, chapter 8
On the economics side: chapter 6, chapter 7
p.53 #2
3. Models as blueprints for nomological machines
4. Capacities: openness and invention
5. Do we really need capacities?
6. Metaphysical aside: what makes capacity claims true?
7. Nomological machines and the limits of science
(2015.07.20.)
2021/10/26
김우재 교수의 <교수신문> 인터뷰 − 『과학의 자리』는 어떤 책일까?
김우재 교수가 『과학의 자리』라는 책을 냈다고 한다. <교수신문> 인터뷰에 따르면, “책이 어렵더라”는 기자의 푸념에 김우재 교수는 “그건 내가 독자를 존중하기 때문”이라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이 책이 다루는 서양철학사는 한국의 철학전공자나 과학학 연구자들에게조차 생소한 내용을 담고 있다. 편향적인 인문주의 전통에 매몰된 학자들은 책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아무도 우리가 오해해온 서양사상사를 이야기하지 않기에, 과학자로 과학의 자리를 고민하고 공부해온 입장에서 내가 할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어떤 서양철학사를 다루길래 전공자나 연구자에게도 생소한 내용이라는 것인지 궁금하다. 책을 읽어보지 않았으니 아직 그 부분에 아직 말할 수는 없겠으나, <교수신문>과의 인터뷰에 대해서는 몇 마디 할 수 있을 것 같다.
김우재 교수는 과학사 없이 철학사를 설명할 수 없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책의 핵심 논지는, 뉴턴 이후 과학뿐 아니라 학문 생태계 전반의 방법론이 바뀌어 버렸고, 이 영향력 아래서 철학사는 과학사 없이 설명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근대과학은 모든 학문지형에 영향을 미쳤다. 17세기 뉴턴의 근대과학 성립 이후, 프랑스의 계몽철학자들이 등장했고, 이 흐름은 서양 사상사의 모든 부분에 궤적을 남겼다. 우리가 문학가로만 알고 있는 볼테르가 뉴턴을 소개한 인물이라는 점이, 가장 상징적일 듯하다. 대문호라는 괴테조차 근대과학의 성과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이를 거부하기 위해 직접 과학을 공부하고 실험까지 수행했던 인물이다. 이 점을, 한국의 철학자들은 가르치지 않는다. 근대과학은 실험과 이론의 결합이라는 방법론 속에서 꾸준히 진보해 왔고, 이 과학적 방법론은 학문의 기준이 되었다. 뉴턴 이후 서양의 모든 학문은 바로 이 근대과학의 승리에 대한 반응(reaction)이다. 18세기 이후 서양철학자들의 저술을 읽어보라. 그들은 모두 과학을 염두에 두고 자신의 작업을 진행했다는 걸 알게 될 거다.”
근대과학이 모든 학문지형에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은 청소년용 교양서적에도 나온다. 웬만한 사람들은 다들 알고 있다.
김우재 교수는 한국의 철학자들이 괴테가 과학을 공부했다는 사실을 학생들에게 가르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지 않는가? 괴테가 과학을 공부했다는 사실을 왜 철학자들이 가르쳐야 하지? 독문과 교수도 아니고 철학과 교수가 왜?
괴테가 과학을 공부했다는 것도 그렇게 깜짝 놀랄 만한 사실은 아니다. 괴테는 뉴튼의 광학 이론에 반대하여 색채에 대한 자신의 이론을 전개했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 『색채론』인데 이 책은 이미 2000년대 초에 한국에서도 번역이 되었고 그와 관련된 한국어 논문도 여러 편 나왔다. 그런데 괴테가 과학을 공부했는데 그게 뭐 어쨌다는 것인가?
김우재 교수는 한국의 강단 인문학을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그러나 대학 철학 수업에서 철학 사상사의 한 축으로 과학사가 다뤄지는 경우는 잘 없었던 거 같다. 한국의 강단 인문학은 어쩌다 과학적 전통에 무지한 반쪽짜리 학문이 됐나.
“애초 서양에선 자연철학자라고 불리던 사람들이 과학자가 되었고, 철학의 전통 속에 과학이 들어가는 데 아무런 장애가 없었다. 뉴턴도 스스로를 과학자가 아니라 자연철학자라 부르던 인물이다. 한국 근대학문의 역사를 따라 올라가보자. 우리에겐 그런 전통이 아예 없다. 일제 시대 이후 서구로 유학 갔던 한국의 인문학자들은 한국에 서양철학을 수입하면서도, 과학은 쏙 빼고 논의를 진행했다. 예를 들어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이 아니라 실천이성비판을 통해 한국에 수입되었고, 비엔나의 논리경험주의 전통은 아예 수입조차 되지 않았다. 과학철학이나 과학사 그리고 과학사회학 등의 전통이 한국에 들어오긴 했지만 비주류에 불과하다.”
우선, 철학사 수업에서 과학사를 왜 안 다루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서양 철학의 전통에는 과학의 자리가 있는데 왜 한국 대학의 철학과 수업에는 과학의 자리가 없을까? 철학사 책을 보면 답이 간단히 나온다. 서구에서 만든 철학사 책에도 과학사는 잘 안 나오거나 아주 약간만 나온다. 한국어로 번역되어 나온 철학사 책으로는 힐쉬베르거 철학사, 앤서니 케니 철학사, 러셀 철학사, 코플스턴 철학사 중 일부 등이 있다. 이들 중 어느 책에서도 본격적으로 과학사를 다루는 책은 없다. 나와도 아주 약간만 나올 뿐이다.
서양에서 자연철학자들이 과학자가 되었다는데 왜 철학사 책에는 과학사가 잘 안 나오는가? 철학도 전문화된 분야가 되었기 때문이다. 다루어야 할 양이 방대하니 자료를 취사선택하여 철학사를 집필할 수밖에 없다. 어떤 것을 넣고 어떤 것을 뺄 것인가? 보통은 이후 철학에 영향을 끼치는 것 위주로 넣고 영향이 미미한 것은 뺀다. 예를 들어, 어떤 학자가 형이상학도 하고 인식론도 하고 윤리학도 하고 자연철학도 하고 별 걸 다 했다고 치자. 철학사 책에 이러한 것들이 모두 동등한 비중으로 들어가는가? 아니다. 후대에 영향을 미치는 큰 부분일수록 더 큰 비중을 가진다. 그러니 철학사에서 다루는 어떤 철학자든 형이상학의 비중이 높고 자연철학의 비중이 낮을 수밖에 없다. 이미 20세기 초중반에 서구에서 나온 철학사 책도 이러한데, “일제 시대 이후 서구로 유학 갔던 한국의 인문학자들은 한국에 서양철학을 수입하면서도, 과학은 쏙 빼고 논의를 진행했다”는 비판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
김우재 교수는 “비엔나의 논리경험주의 전통은 아예 수입조차 되지 않았다”는 것이 그렇게나 애통한 모양이다.(보통은 비엔나 학파의 논리실증주의, 베를린 학파의 논리경험주의라고 하던데...) 물론, 논리실증주의든 논리경험주의든 해당 이론들이 한국에 도입된 것은 상당히 오래전의 일이며 학부 수업에서 다룬 것도 몇 십 년이 넘어간다. 김우재 교수가 이러한 사실을 몰라서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아마도 이론의 도입과 전통의 도입을 구분한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어느 기독교 사회에 불교 이론이 도입되어 불교에 대한 이해가 늘어날 수 있지만 그와 별개로 불교 전통은 도입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니, 김우재 교수가 애초에 주장하고자 한 것은, 논리경험주의 이론이 한국에 도입되었으나 논리경험주의의 전통까지 도입된 것은 아니라는 것으로 해석할 여지는 있다.
김우재 교수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으려면, 일단 김우재 교수 박사가 말하고자 하는 논리경험주의의 전통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하고, 서구에서 그러한 전통이 현재까지 어떻게 이어지는지를 보여주어야 한다. 김우재 교수가 논리경험주의의 전통을 강조하는 것은 서구와는 다른 한국 사회의 모습을 말하기 위해서이니, 서구와 한국의 20세기 전반부의 지적 전통이 다르다는 것만 지적해서는 안 되고, 현재의 서구 사회와 한국 사회가 어떤 식으로 다른지, 그리고 해당 전통들이 각 사회의 차이를 어떻게 만들었는지를 설명해야 한다. 막상 서구와 한국의 현재 모습을 비교해보았는데 별반 다른 점이 없다면, 『과학의 자리』는 근거 없는 주장을 하느라 기존의 교양서적을 재탕한 것에 불과할 것이다. 과연 『과학의 자리』에는 현재의 서구와 한국을 설득력 있게 비교하는 부분이 있을까? 나중에 확인해 보아야겠다.
김우재 교수의 준엄한 외침은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한국 강단 인문학자 중에서 과학자 출신이 단 한 명이라도 있나? 그들이 과학을 말할 때면 항상 인용하는 토마스 쿤도 물리학자였고, 자유주의 전통에서 가장 중요한 철학자인 칼 포퍼는 과학철학이 전공인 사람이다. 비트겐슈타인도 비엔나 써클과 교류하며 논리경험주의 전통 속에서 과학을 고민한 인물인 데다 기계공학자였고, 기호학의 아버지라고만 알려진 퍼스는 사실 화학자로 경력을 시작했다. 한국에 이런 인문학자가 단 한 명이라도 있나? 한국 강단 인문학계엔 인문학 순수주의자만 넘쳐날 뿐이다. 하지만 미안하게도 세상에 순수인문학이라는 건 없다. 과학이 발견한 사실들을 제외하면, 인문학은 현실에 기반한 그 어떤 논의와 상상력도 펼쳐 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한국 강단 인문학은 점점 말도 안 되는 형이상학 아니면 도덕적 훈계나 들이미는 꼰대들의 학문이 되어가는 것 아닌가 생각한다.”
김우재 교수는 “한국 강단 인문학자 중에서 과학자 출신이 단 한 명이라도 있나?”라고 묻는다. 웬만큼 자신 있지 않고서는 “단 한 명이라도 있나?”라고 물으면 안 된다. 그렇게 자신 있게 물었는데 한 명이라도 나오면, 그게 한 명에 불과하더라도 그렇게 물어본 사람이 부끄러워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분야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체 하고 싶어 죽겠더라도 “단 한 명이라도 있나?”라고 묻는 것은 자제하는 것이 좋다.
과학자 출신 강단 인문학자로는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였던 김영식 선생님이 있다. 김영식 선생님은 1973년에 하버드 대학에서 화학물리로 박사학위를 받고, 1977년에 서울대 화학과 교수가 된 다음, 3년 뒤인 1980년에 프린스턴 대학의 과학사-과학철학 협동과정에서 동아시아 과학사 연구로 역사학 박사학위를 받고, 1984년에 서울대에서 과학사-과학철학 협동과정을 창설하고, 2001년에 서울대 화학과 교수를 그만 둔 곧바로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로 부임했다. 그러니까 김영식 선생님의 존재를 아는 사람이라면, “단 한 명이라도 있나?”라고 묻는 것이 아니라 “한 명 말고 더 있나?”라고 물었을 것이다. 그런데 한국에서 과학사를 약간이라도 알면서 김영식 선생님의 존재를 모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비유하자면, 과학사를 안다고 하면서 김영식 선생님을 모른다는 것은, 경제학을 안다고 하면서 조순・이준구・정운찬 교수를 모른다고 하는 것과 같다.
토마스 쿤이 물리학 박사였다는 점을 가지고 유효하게 주장하려면, 이후에도 그러한 전통이 면면이 이어져 오늘날에도 과학사나 과학철학에 과학자 출신들이 진입하여 연구하고 있음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일회적인 사건을 가지고 근거 없는 주장을 하는 것밖에 안 된다. 그런데 토마스 쿤은 이미 물리학 박사학위를 받기 전에 과학사와 과학철학 쪽으로 마음이 기울어졌으며 이후에 과학철학자로 활동을 하면서도 철학적인 훈련을 많이 받지 못했음을 후회했다. 김우재 교수가 왜 그러한 사실을 언급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정말로 몰라서 그랬을까, 아니면 자기 주장의 근거가 약화될까봐 그랬을까?
과학철학 쪽 인적 구성에 대한 자료는 못 찾았는데 과학사학계의 인적 구성에 대한 자료는 이미 김동원의 1994년 논문인 「과학사학계의 최근 동향」(『서양사론』 42권, 229-248쪽)에 나온다. 이 논문에서는, 과학사 초창기에는 철학이나 과학에서 활동하던 사람들이 과학사로 유입되었는데, 과학사가 학문 분야로 자리를 잡으면서 과학보다는 역사를 더 강조하게 되었고 학부에서 역사를 전공한 사람들의 유입이 증가하게 되었음을 언급한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어떤 분야든지 초창기에는 자리 잡혀 있지 않기 때문에 다른 분야에서 활동하던 사람들이 유입되지만,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히면 나름대로의 교육 체계와 연구 체계가 확립되기 때문에 그 분야에서 자체적으로 후학을 양성하는 경향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지금도 과학사와 과학철학 분야에는 이공계 학부 출신의 비중이 높다. 그렇지만 과학자로 활동하던 사람이 이들 분야로 진입하는 사례는 외국에서도 매우 드문 것으로 알고 있다.(물론 물리학과에서 물리학의 철학을 하는 사람을 예로 들면 안 된다. 그건 반칙이다.) 이것이 해당 분야가 썩어서 그런 것인지, 성숙기로 진입해서인지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과연 『과학의 자리』에는 이러한 구분이 나올까?
과학철학이나 과학사에 대한 배경지식이 하나도 없다고 하더라도, “한국 강단 인문학자 중에서 과학자 출신이 단 한 명이라도 있나?”라고 하면서 그것이 마치 인문학계의 문제인 것처럼 구는 것 자체가 이상하다는 것을 누구라도 쉽게 알 수 있다. 과학자 출신 인문학자라는 것은 과학자가 된 다음에 인문학자가 되는 것이다. 과학자 출신 인문학자가 없다면, 그게 과학계의 잘못인가, 인문학계의 잘못인가? 과학자가 된 사람을 구슬리든지 족치든지 해서 인문학자로 만들어야 과학자 출신 인문학자가 되는 것이니, 이는 과학계 잘못 아닌가? 왜 한국 과학계에는 과학자가 된 다음 인문학자가 되고자 하는 진취적인 전통이 없는가?
김우재 교수는 현대에도 통합적인 지식인이 가능하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한편으로는 점점 세부 분과가 쪼개지고 전문화되는 현대 학문의 흐름상 통합적인 지식인상은 구조적으로 어렵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책에서 그런 지식인상이 불가능하지 않다는 걸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과학과 인문학이라는 이분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심지어 조선 말기에도 실학이라는 전통이 나타난 적이 있다. ‘과학자냐 인문학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자신의 자리에서 제 학문의 역사와 전통에 얼마나 진지하고 치열하게 접근하느냐가 문제일 뿐이다. 한국엔 과학을 모르는 인문학자가 많아서 문제인 게 아니라, 자신의 학문 전통조차 제대로 치열하게 고민하고 공부하지 않은 인문학자만 있어서 문제인 것이다. 인문학의 전통을 치열하게 고민하고 공부한 학자라면, 과학의 자리를 지나치지 않을 방법은 없다.”
과학과 인문학의 이분법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과학을 모르는 인문학자가 비난받는 만큼 인문학을 모르는 과학자도 비난받아야 할 것 같은데, 왜 과학을 모르는 인문학자만 직살나게 욕을 먹고 인문학을 모르는 과학자는 욕을 먹지 않는가? 어쨌든 김우재 교수는 “‘과학자냐 인문학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자신의 자리에서 제 학문의 역사와 전통에 얼마나 진지하고 치열하게 접근하느냐가 문제일 뿐”이라고 하니 이 부분은 그냥 넘어가자. 그런데 도대체 그 역사와 전통에 진지하고 치열하게 접근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왜 자기 연구나 잘 하면 되는 것이 아니고 그 학문의 역사와 전통에 치열하게 접근해야 하는가? 뉴튼은 연구의 상당 부분이 연금술에 관한 것인데, 왜 김우재 교수는 연금술을 안 하는가? 연금술을 안 할 거면 화학이라도 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김우재 교수가 뉴튼처럼 물리학자가 아니라서 그런가?
인터뷰 내용만 보아서는, 김우재 교수가 말하는 역사와 전통에 대한 접근이란 결국 인문학과 과학을 모두 잘 하는 사람이 되자는 말인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누구나 알 듯이, 하나 잘하기도 어렵기 때문에 사회적인 분업이 생기는 것이다. 김우재 교수가 통합적인 지식인의 사례로 든 것은 조선 말 실학자인데, 이것이 적절한 예가 되려면 실학자들이 단순히 머리 좋고 잘 나서 둘 다 잘했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작업에서 인문학과 과학이 내적으로 연관됨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내적으로 연관된 것이 아니라면, 둘 중 하나만 하고 그 하나를 더 잘 하는 것이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이로울 것이다. 내적으로 연관되더라도 해당 분야들이 미성숙하여 한 분야에 속한 것뿐이라면, 한 사람이 여러 분야들을 동시에 한다는 것도 미덕은 아닐 것이다. 『과학의 자리』에는 그러한 내적 연관에 관한 내용이 나올까?
정약용이 지은 『논어고금주』에는 당대의 자연과학이 얼마나 반영되어 있을까? 나는 잘 모르겠다. 『목민심서』에는? 내가 읽기로는 그냥 잔소리 해놓은 것이던데.
인터뷰에서 보이는 몇 가지 징후만 보아도, 과연 『과학의 자리』에서 “다루는 서양철학사는 한국의 철학전공자나 과학학 연구자들에게조차 생소한 내용을 담고 있”는지 의심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인터뷰만 이상하고 책은 멀쩡할 수 있으니 나중에 『과학의 자리』를 훑어보기는 할 생각이다.
* 뱀발
내가 정확하게 알지는 못하므로 단언할 수는 없겠지만, 자연철학은 외국에서도 철학보다는 과학사 쪽에서 다루는 것 같다. 내가 자연철학 책을 본 것도 철학과 수업이 아니라 과학사 수업에서였고 해당 자연철학 교재도 과학사학자가 쓴 것이었다. 자연철학에 대해 궁금한 사람은 에드워드 그랜트가 쓴 자연철학사 책을 참고하면 될 것 같다.
Edward Grant (2007), A History of Natural Philosophy: From the Ancient World to the Nineteenth Century (New York: Cambridge University Press)
* 링크: [교수신문] 김우재 “과학없는 인문학, 순수인문학이라는 건 세상에 없다”
( 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73913 )
(2021.08.26.)
한강 작가 노벨문학상 수상 예언한 알라딘 독자 구매평 성지순례
졸업하게 해주세요. 교수되게 해주세요. 결혼하게 해주세요. * 링크: [알라딘] 흰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소설 ( 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4322034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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