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교수님이 새해맞이 전공자 모임에서 각자 5분씩 발언/발표할 수 있도록 파워포인트 슬라이드를 한두 장씩 준비해 오라고 하셨다. 발표 내용은 근황, 성찰, 다짐, 희망, 새해 계획 등이다.
내가 발표한 내용 중에는 ‘나는 대학원생인가, 연구자인가?’에 대한 것이 있었다. 두 달 전 전공자 모임 때 저녁식사 끝나고 맥주 마시는 자리에서 지도교수님이 연구자로서의 정체성을 강조한 적이 있었다. 대학원생 각자가 자신이 연구자라는 정체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부분은 나도 동의하는 내용이다. 내가 추가한 부분은 대학원생이 대외적으로 자기자신을 연구자라고 하는 것은 썩 좋지 않다는 내용이다.
신문 같은 데 대학원생이 쓴 칼럼을 보자. 대학원생이 칼럼을 쓸 수는 있는데 그 중 상당수는 자기 자신을 꼭 “연구자”라고 칭한다. 멀쩡히 대학원을 다니고 있고, 그만두거나 쫓겨난 것도 아닌데 연구자라고 쓴다. 칼럼 내용을 보니 영 의심스러운데 굳이 연구자라고 하니 어떤 논문을 썼는지 찾아보고 싶을 수밖에 없다. 그렇게 찾아보면, 필자가 연구가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 아닐까 싶은 경우가 적지 않다. 소속 분야 자체도 믿을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아무 말이나 해도 오냐 오냐, 똥을 싸도 오냐오냐, 오줌을 싸도 오냐오냐 하는 분야들이다.
멀쩡히 소속이 있고 ‘대학원생’이라는 중립적인 표현이 엄연히 있는데도 굳이 자기자신을 ‘연구자’라고 칭하는 것은 안목 없음에서 비롯된 자의식 과잉이 아닐까? 박사과정 중에 해외 학술지에 논문을 척척 게재하는 사람들도 자기 자신을 대학원생이라고 한다. 이러한 사례들을 놓고 보면, 나는 대학원을 그만두거나 쫓겨나지 않는 이상 대외적으로는 무조건 ‘대학원생’이라고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실력도 없으면서 자의식만 과잉인 사람으로 오해받을 소지를 줄일 수 있다.
나를 이를 일종의 외왕내제(外王內帝)로 비유했다. 고려가 대외적으로 왕이라고 하고 내부적으로는 황제를 칭한 것처럼, 대학원생도 대외적으로는 자신을 대학원생이라고 하되 스스로는 연구자라고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소송을 진행하면서 하게 된 생각인데, 지도교수와 지도학생의 관계는 변호사와 의뢰인의 관계와 비슷한 것 같다. 보통의 경우, 의뢰인은 변호사를 전적으로 믿고 멀거니 앉아 있는 경우가 많다. 절대로 그러면 안 된다. 변호사가 아무리 능력 있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의뢰인이 멍청하게 멀거니 있으면 도와주지 못한다. 재판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변호사가 준비 서면에 어떤 내용을 썼고 변론을 어떻게 하는지, 변론 전략은 무엇인지, 증거와 증인은 어떻게 확보해야 하는지, 상대방은 어떻게 대응하는지 등을 모두 의뢰인이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지도교수도 마찬가지다. 석사과정생도 아니고 박사학위논문을 준비하는 사람은 심사위원 다섯 명으로 어느 분야의 누구를 모셔올지부터 머릿속에 있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지도교수가 모르는 분야니까 박사과정이지 지도교수가 다 알면 석사과정이게? 전부는 아니어도 전반적인 것을 내가 모두 기획한 다음 지도교수의 행정적인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여기의 연장선에 논문제출자격시험이 있다. 지도교수님은 내가 경제학과 수업을 듣고 쉬는 시간에 담당 교수에게 질문을 하면서 안면을 트는 것을 생각했다고 한다. 내가 논문제출자격시험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경제학과 선생님들과 친해진 다음 논문심사장으로 모셔온다는 것이다. 나는 그런 전략이 나에게는 맞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건 우수한 학생에게나 적용되는 것이지 나 같은 학생에게는 적합하지 않다. 약간 친해진 사람에게 큰 부담을 지게 하면 오히려 사이가 소원해진다. 나는 논문제출자격시험을 돌파해서 어느 정도 경제학에 관한 능력이 있음을 입증한 뒤, 이에 근거하여 경제학과 선생님들한테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몇몇 경제학과 선생님들이 나에게 경제학의 철학이 무엇인지 물어본 적이 있다. 나의 답변을 들은 분들 중 대부분은 참 좋은 것을 한다, 가치 있는 것을 한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래서 내가 도와줄 수 있느냐고 했을 때는 대부분 거절하거나 도망갔다. 이유는 간단하다. 나의 작업이 성사된다면 가치 있는 일이겠으나, 이를 위해 어느 정도로 도와주어야 할지 가늠이 안 되기 때문이다.
선행은 선한 의지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행위의 결과에 비해 투입되는 비용이 너무 커지면 그 행위를 주저하기 마련이다. 우물에 빠지려는 아이를 구하는 것은 이익을 구해서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네가 구한 아이이니 그 아이가 대학 가고 결혼할 때까지 전부 책임져야 한다고 하고 정말로 그래야 한다면 아이를 구한 행위를 후회하거나 행위를 안 하게 된다. 경제학과 선생님들의 선한 의지에 호소하기 전에 그에 소요되는 비용이 어느 정도인지 눈에 보이게 하고 그것을 최소화해야 한다. 그게 논문제출자격시험으로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이다. 내가 판을 모두 짜놓았고 철학 부분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경제학 부분은 딱 요만큼만 봐주시면 된다고 해놓아야 경제학과 선생님의 선한 의지가 작동할 수 있다.
지난 번에 내가 논문제출자격시험에서 떨어졌을 때 학과주임 선생님이나 지도교수님이나 어떻게 할지를 물으셨다. 학과 규정이 바뀌어서 시험에 통과한 것으로 할 수 있는 상황이다. <과학사통론1>과 <과학사통론2> 중 하나만 일정 학점 이상을 받으면 논문제출자격시험을 통과한 것으로 제도가 바뀌었는데, 나는 두 과목 모두 들었고 둘 다 해당 학점을 넘겼다. 나를 염두에 두고 제도가 바뀐 건 아니겠지만, 학과주임 선생님은 이것을 내 이름을 따서 해당 규정을 “◯◯◯법”이라고 하셨다. 나는 논문제출자격시험을 한 번만 더 보고 그래도 떨어지면 같은 시험을 세 번 보면 부끄러우니까 과학사로 통과한 것으로 하기로 했다.
(2025.0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