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3/10

대학원생의 외왕내제



지도교수님이 새해맞이 전공자 모임에서 각자 5분씩 발언/발표할 수 있도록 파워포인트 슬라이드를 한두 장씩 준비해 오라고 하셨다. 발표 내용은 근황, 성찰, 다짐, 희망, 새해 계획 등이다.

내가 발표한 내용 중에는 ‘나는 대학원생인가, 연구자인가?’에 대한 것이 있었다. 두 달 전 전공자 모임 때 저녁식사 끝나고 맥주 마시는 자리에서 지도교수님이 연구자로서의 정체성을 강조한 적이 있었다. 대학원생 각자가 자신이 연구자라는 정체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부분은 나도 동의하는 내용이다. 내가 추가한 부분은 대학원생이 대외적으로 자기자신을 연구자라고 하는 것은 썩 좋지 않다는 내용이다.

신문 같은 데 대학원생이 쓴 칼럼을 보자. 대학원생이 칼럼을 쓸 수는 있는데 그 중 상당수는 자기 자신을 꼭 “연구자”라고 칭한다. 멀쩡히 대학원을 다니고 있고, 그만두거나 쫓겨난 것도 아닌데 연구자라고 쓴다. 칼럼 내용을 보니 영 의심스러운데 굳이 연구자라고 하니 어떤 논문을 썼는지 찾아보고 싶을 수밖에 없다. 그렇게 찾아보면, 필자가 연구가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 아닐까 싶은 경우가 적지 않다. 소속 분야 자체도 믿을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아무 말이나 해도 오냐 오냐, 똥을 싸도 오냐오냐, 오줌을 싸도 오냐오냐 하는 분야들이다.

멀쩡히 소속이 있고 ‘대학원생’이라는 중립적인 표현이 엄연히 있는데도 굳이 자기자신을 ‘연구자’라고 칭하는 것은 안목 없음에서 비롯된 자의식 과잉이 아닐까? 박사과정 중에 해외 학술지에 논문을 척척 게재하는 사람들도 자기 자신을 대학원생이라고 한다. 이러한 사례들을 놓고 보면, 나는 대학원을 그만두거나 쫓겨나지 않는 이상 대외적으로는 무조건 ‘대학원생’이라고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실력도 없으면서 자의식만 과잉인 사람으로 오해받을 소지를 줄일 수 있다.

나를 이를 일종의 외왕내제(外王內帝)로 비유했다. 고려가 대외적으로 왕이라고 하고 내부적으로는 황제를 칭한 것처럼, 대학원생도 대외적으로는 자신을 대학원생이라고 하되 스스로는 연구자라고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소송을 진행하면서 하게 된 생각인데, 지도교수와 지도학생의 관계는 변호사와 의뢰인의 관계와 비슷한 것 같다. 보통의 경우, 의뢰인은 변호사를 전적으로 믿고 멀거니 앉아 있는 경우가 많다. 절대로 그러면 안 된다. 변호사가 아무리 능력 있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의뢰인이 멍청하게 멀거니 있으면 도와주지 못한다. 재판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변호사가 준비 서면에 어떤 내용을 썼고 변론을 어떻게 하는지, 변론 전략은 무엇인지, 증거와 증인은 어떻게 확보해야 하는지, 상대방은 어떻게 대응하는지 등을 모두 의뢰인이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지도교수도 마찬가지다. 석사과정생도 아니고 박사학위논문을 준비하는 사람은 심사위원 다섯 명으로 어느 분야의 누구를 모셔올지부터 머릿속에 있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지도교수가 모르는 분야니까 박사과정이지 지도교수가 다 알면 석사과정이게? 전부는 아니어도 전반적인 것을 내가 모두 기획한 다음 지도교수의 행정적인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여기의 연장선에 논문제출자격시험이 있다. 지도교수님은 내가 경제학과 수업을 듣고 쉬는 시간에 담당 교수에게 질문을 하면서 안면을 트는 것을 생각했다고 한다. 내가 논문제출자격시험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경제학과 선생님들과 친해진 다음 논문심사장으로 모셔온다는 것이다. 나는 그런 전략이 나에게는 맞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건 우수한 학생에게나 적용되는 것이지 나 같은 학생에게는 적합하지 않다. 약간 친해진 사람에게 큰 부담을 지게 하면 오히려 사이가 소원해진다. 나는 논문제출자격시험을 돌파해서 어느 정도 경제학에 관한 능력이 있음을 입증한 뒤, 이에 근거하여 경제학과 선생님들한테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몇몇 경제학과 선생님들이 나에게 경제학의 철학이 무엇인지 물어본 적이 있다. 나의 답변을 들은 분들 중 대부분은 참 좋은 것을 한다, 가치 있는 것을 한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래서 내가 도와줄 수 있느냐고 했을 때는 대부분 거절하거나 도망갔다. 이유는 간단하다. 나의 작업이 성사된다면 가치 있는 일이겠으나, 이를 위해 어느 정도로 도와주어야 할지 가늠이 안 되기 때문이다.

선행은 선한 의지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행위의 결과에 비해 투입되는 비용이 너무 커지면 그 행위를 주저하기 마련이다. 우물에 빠지려는 아이를 구하는 것은 이익을 구해서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네가 구한 아이이니 그 아이가 대학 가고 결혼할 때까지 전부 책임져야 한다고 하고 정말로 그래야 한다면 아이를 구한 행위를 후회하거나 행위를 안 하게 된다. 경제학과 선생님들의 선한 의지에 호소하기 전에 그에 소요되는 비용이 어느 정도인지 눈에 보이게 하고 그것을 최소화해야 한다. 그게 논문제출자격시험으로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이다. 내가 판을 모두 짜놓았고 철학 부분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경제학 부분은 딱 요만큼만 봐주시면 된다고 해놓아야 경제학과 선생님의 선한 의지가 작동할 수 있다.

지난 번에 내가 논문제출자격시험에서 떨어졌을 때 학과주임 선생님이나 지도교수님이나 어떻게 할지를 물으셨다. 학과 규정이 바뀌어서 시험에 통과한 것으로 할 수 있는 상황이다. <과학사통론1>과 <과학사통론2> 중 하나만 일정 학점 이상을 받으면 논문제출자격시험을 통과한 것으로 제도가 바뀌었는데, 나는 두 과목 모두 들었고 둘 다 해당 학점을 넘겼다. 나를 염두에 두고 제도가 바뀐 건 아니겠지만, 학과주임 선생님은 이것을 내 이름을 따서 해당 규정을 “◯◯◯법”이라고 하셨다. 나는 논문제출자격시험을 한 번만 더 보고 그래도 떨어지면 같은 시험을 세 번 보면 부끄러우니까 과학사로 통과한 것으로 하기로 했다.

(2025.01.10.)


2025/03/05

첫 학부 수업 후기



이번 학기 강의 평가가 나왔다. 그럭저럭 나쁘지 않게 나왔다. 학부 수업에서 강의 평가 평점 테러를 당했던 선생님들의 이야기를 종종 들었는데, 다행히 나는 그런 것을 안 당했다. 첫 학부 수업을 무사히 마쳤다.

나는 수업에서 무리해서 진도를 나갔다. 학생들 중 상당수가 수업 내용을 명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알면서도 진도를 계속 나갔다. 서프라이즈 퀴즈를 냈다. 비평문을 써오도록 했다.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중 기말고사만 한 번만 보거나 시험 없이 기말보고서로 대체하는 수업이 많다고 학생들을 통해 뒤늦게 들었지만,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를 모두 보았다. 그래도 무사히 학기를 마쳤다. 나의 기본 방침은, 동일한 노동량과 노동시간을 유지하는 선에서 학생들에게 최대한 다양하고 많은 것을 보여주되 학생들의 부담은 최소한으로 하는 것이었다.

서프라이즈 퀴즈가 10점 만점인데 자기 이름과 학번을 쓰는 1번 문제에 9점을 배점했다. 내가 그렇게 할 거라고 하니 학생들이 웃었는데 진짜로 그렇게 하니까 시험지를 받아본 어떤 학생이 “아니, 그게 진짜였네?”라고 말했다. 서프라이즈 퀴즈의 답을 모두 알려준 다음 일부 문제가 기말고사에 나온다고 했고 정말로 그렇게 했다.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모두 예상 문제를 실제 문제의 2배수 정도로 만들어 공개했고 문제 변형 없이 예상 문제에서만 문제를 냈다. 기말고사 때는 답안에 어떤 내용이 포함되어야 하는지 그 범위도 알려주었다.

비평문을 쓰라고만 하면 아예 쓰지 못하거나 수업 자료를 그대로 베낄 것이어서 글쓰기 방법에 관한 별도의 강의와 읽을 자료에 관한 해설 강의를 찍어서 올렸다. ChatGPT를 쓰다 걸린 학생이 있는데, 차마 0점 처리를 할 수는 없어서 ChatGPT를 쓰고 안 걸리는 방법을 알려주고 내 수업에서는 하지 말고 다른 사람 수업에서 하라고 했다. 참고 문헌을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질문을 받고는 정석대로 참고 문헌을 찾는 방법과 시간 없을 때 참고 문헌을 부풀리는 방법을 모두 알려주었다. 참고 문헌을 부풀렸을 때 바로 걸려서 욕먹는 방법과 의심은 받지만 일단 넘어가는 방법이 있는데 이 또한 내 수업에서는 하지 말고 다른 사람 수업에서 하라고 했다.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예상 문제와 가능한 답안 작성 범위를 알려주었는데도 걱정하는 학생들이 있어서, 나는 모르겠으면 틀리라고 했다. <언어철학> 수업은 어차피 상대평가니까 남들보다 덜 틀리기만 하면 된다고 했다. 그렇게 말하고 정말로 상대평가로 최대한 학점을 잘 주었다. 최하 점수가 C+였고, A와 B의 비율은 학교에서 허용한 최대한으로 할당했다. <심리철학> 수업은 절대 평가여서 최하 점수가 B+였다. 중간고사 답안지로 백지에 가까운 것을 냈다? B+였다. 초짜 강사를 만나서 고생했으니 점수라도 잘 받으라는 취지도 있었다. 성적을 잘 주어서 그런지 성적이의신청이 단 한 건도 없었다.

진도를 약간 무리해서 나간 것은 맞다. 학생들이 수업 내용을 잘 따라가지 못하는 것 같으면 보통은 수업 진행 속도를 늦추거나 학습량을 줄이거나 한다. 보통은 그게 맞기는 한데,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경제수학>이나 <경제통계학> 같은 수업은 학생들이 수업 내용을 숙지하지 못할 경우 <계량경제학> 수업 들을 때 봉변을 당할 수 있으므로 진도량과 숙지 정도의 균형을 고려해야 한다. 그러나 <언어철학>이나 <심리철학>은 수업 내용을 숙지 못해서 다른 학부 수업을 듣는 데 지장이 생길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렇다면 진도를 그냥 나가도 된다.

내가 수업 시간에 어떤 것을 설명했는데 내가 한 설명을 학생들이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고 해보자. 그러면 방금 설명한 것을 다시 설명하면서 내가 착각하거나 잘못 이해한 것은 아닌지, 내가 잘못 설명하지는 않았는지 다시 생각해 본다. 내가 잘못 설명한 것 같으면 정정하고 다시 설명한다. 다시 생각해 보아도 내가 맞은 것 같으면 어떻게 하느냐? 학생들을 한 명씩 응시하며 중요 내용을 다시 설명한다. 그러면 학생들 중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이 나온다. 그 학생은 수업 내용을 이해해서 끄덕인 것인가? 그건 중요하지 않다. 다음 부분으로 넘어가도 되는 분위기가 형성된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 기세를 수업 끝날 때까지 유지하면 계획한 대로 진도를 나갈 수 있다. 실제로 나는 그런 식으로 수업계획서대로 진도를 다 나갔다.

진도가 많이 나가서 학생들이 불만을 품는 것이 아니다. 진도가 많이 나간 다음에 강사가 학생들보고 자기가 한 것을 똑같이 따라 해보라고 해서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물론, 공학 같은 경우는 강사가 하는 대로 학생들이 똑같이 따라 할 수 있어야 한다. 그걸 못 하면 사고가 난다. 인문학은 그렇지 않다. 학생들이 강사가 한 것을 따라 하지 못한다고 해도 아무도 다치지 않는다. 내가 가르친 학생들 중 대부분은 졸업 이후 전공과 무관한 삶을 살 것이다. 그러면 하지도 않을 것을 따라 하라고 할 게 아니고 이 수업이 아니면 못 볼 것을 다양하게 보게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자기 전공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른 채로 졸업하는 것보다는 그게 낫다.

기세로 진도를 나갈 때의 장점 중 하나는, 학생들에게 수업 내용과 관련해서 보여줄 수 있는 것이 늘어난다는 것이다. 이해를 했든 못 했든 진도를 나가면 해당 분야에 어떤 철학자가 어떤 논의를 했는지, 어떤 주제가 있는지를 더 많이 보여줄 수 있다. 이게 중요하다. 내가 다니는 학교의 수업과 비교해서 다른 학교에서 같은 수업을 담당한 선생님이 얼마나 잘 가르치는지는 녹화 강의가 없는 이상 알 방법은 없다. 웬만큼 입소문이 날 정도로 명강의가 아니면 누가 무엇을 가르치는지도 잘 모른다. 그런데 어느 학교 철학과에서는 이 철학자도 가르치고 저 철학자도 가르치고 별걸 다 가르치는데 내가 다니는 철학과에서는 철학자의 이름도 못 들어봤다고 하면 기분이 나빠진다. 코스 요리를 시켰는데 다 못 먹을 것 같다고 해서 나와야 할 요리가 안 나오면 기분이 나쁠 수밖에 없다. 손님이 다 먹든 못 먹든 나와야 할 요리는 나와야 한다.

내가 이렇게 말한다면 누군가는 음식점의 음식과 대학의 학부 수업의 유비가 가능하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음식점에서는 음식을 남기더라도 서비스로 더 주면 손님이 좋아하는데 대학에서는 정반대 아니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에 대한 나의 대답은, 음식점에서도 남기면 벌금 매긴다고 해놓고 음식을 계속 가져오면 손님이 화를 낸다는 것이다. 대학에서 학생들이 자기가 제공받는 교육 서비스를 제대로 누리지 못한다고 해서 강사가 학생들을 타박한다든지, 수업 중에 화가 나 있다든지, 훈계한다든지 하는 것이 아니라 “이거 나름 맛있는 건데 한 번 맛이나 보시지 입도 안 대셨네”라고 한다고 해보자. 이야기는 달라진다.

나는 <언어철학> 수업에서 기말고사 보기 전 마지막 시간에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한 학기 동안 콜린 맥긴의 『언어철학』 한 권을 다 보기로 했는데, 정말로 이렇게 다 보았습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서울대 빼고, 연고대 빼고, 서울에 있는 웬만한 대학에서 하는 <언어철학> 수업과 적어도 진도에 있어서는 거의 차이가 없다는 거죠. 그러면 내가 그 학교들에 계시는 선생님들만큼 수업을 잘 했느냐? 그런 건 여기서 따지지 맙시다. 어쨌든 진도에 있어서는 전혀 꿇리지 않는다는 거예요. 다른 학교 철학과 다니는 친구가 에반스 어쩌고 그러면 나도 수업 시간에 배웠다고 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런데 친구가 그냥 지나가는 게 아니라 캐물으면 어떻게 하느냐? 오래전에 배워서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하든가, 강사가 초짜여서 잘 못 가르쳤다고 하세요.”

<심리철학> 수업에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는데 이런 말을 덧붙였다.

“저는 다른 학교에서도 다 김재권의 『심리철학』으로 가르치는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다른 학교에서 <심리철학> 수업하는 선배가 김재권 책이 너무 어렵다고 라벤스크로포드 책을 주 교재로 쓴다고 하더라구요. 그걸 너무 늦게 들었어요. 학기 중반 이후에 들어서 돌이킬 수 없었는데, 하여간 우리는 서울 시내 웬만한 대학에서 하는 <심리철학> 수업에 비해 적어도 진도로는 꿇리지 않습니다. 그러면 제가 그 선생님들만큼 잘 가르쳤느냐? 그런 건 굳이 여기서 따지지 맙시다.”

(2025.01.05.)


2025/03/02

화천이와 연동이의 빈자리



여름에 연동이가 집을 나간 뒤 몇 달 간 우리집에는 고양이가 없었다. 고양이가 없으니 금방 빈자리가 드러났다.

창고에서는 쥐가 페트병에 담긴 쌀을 먹으려고 페트병을 쏠았다. 페트병에 구멍이 뚫려서 쌀이 줄줄 샜다. 땅콩을 캐서 창고 구석에 두었더니 까치들이 심심할 때마다 들어와서 땅콩을 먹고 갔다. 덮개 같은 것으로 덮어도 치우고 땅콩을 먹었고 상자에 두어도 빈틈을 찾아내서 땅콩을 먹었다. 사랑방에는 뱀이 들어올 뻔했다. 사랑방에서 컴퓨터를 하다 느낌이 이상해서 방문을 보니 방충망 너머로 유혈목이가 허리를 세우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재작년에 방충망을 교체하지 않았다면 뱀이 그대로 방으로 들어왔을 것이다. 코브라가 아니어도 웬만한 뱀은 허리를 세울 수 있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굳이 그것을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지는 않았다. 놀라서 죽을뻔했다.

나나 어머니나 “고양이가 없어서 불편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나와 어머니 모두 실제 일어났던 일을 반-사실적으로 말할 때는 항상 “화천이가 있었다면”, “연동이가 있었다면”이라고 말한다. “화천이가 있을 때는 뱀도 잘 잡았는데”, “화천이가 있을 때는 쥐가 꼼짝도 못 했는데”, “화천이는 기러기도 잡았는데”, “연동이도 똑똑해서 화천이처럼 자랐을 텐데”라고 말하지 “고양이가 있었다면”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우리집에 있었던 것은 여느 고양이가 아니라 화천이와 화천이의 새끼들과 연동이였기 때문이다.

(2025.01.02.)


[프라임 LEET] 2026학년도 대비 LEET 전국모의고사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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