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1/03

소주를 마신 듯한 착각



동료 대학원생에게서 어떤 이야기를 들었다. 다른 대학원생이 읽은 책의 내용에 관한 이야기였는데 이야기를 듣다가, 순간 내 의식이 잠깐 끊기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느낌이 들자마자 나는 ‘이제 술을 그만 먹어야지. 얼마 먹지도 않았는데 의식이 끊기네’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나는 그 날 술을 한 잔도 마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날은 내가 몸이 조금 피곤했다. 대구에 있는 디지스트(DGIST)에 시험 감독하러 갔다 왔기 때문이다. 오전 6시 50분쯤에 광명역에서 KTX를 타고 디지스트를 가서 학부 교양시험 두 개를 감독하고 다시 서울에 오니 오후 9시쯤이었다. 가서 한 것이라고는 학부 시험 감독한 것과 남는 시간에 교수 연구실에서 개인적인 일 좀 한 것뿐인데도 오가는 데 시간을 많이 써서 그런지 몸이 피곤했다. 서울에 와서 저녁을 먹었다. 순대국밥집에 들어가서 순대국밥을 주문했다.

그냥 순대국밥을 먹을까 하다가 순대국밥을 특으로 시켰다. 그냥 순대국밥보다 고기가 더 많이 나왔다. 따뜻한 국물을 몇 숟가락 떠먹고 고기 몇 점 먹으니 몸이 약간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술 한 잔 마시면 좋겠다 싶었다. 어렸을 때 SBS <야인시대>에서 김두한이 했던 대사가 떠올랐다. “순대국이지만은 소주 안주로는 딱일 거야. 많이들 먹으라구.”(김두한이 선거운동할 때 조직원들하고 순대국집에서 점심 먹으며 한 대사) 그런데 생각해보니, 내가 순대국밥을 먹을 때 소주를 곁들여 먹은 적이 거의 없었다. 나는 순대국밥을 주로 혼자 먹는다. 소주 두세 잔만 마시면 좋을 거 같은데 소주 한 병을 시키면 남기기 아까우니 한 병을 다 마셔야 하고, 그래서 소주를 안 시킨 것이다. 물론 한 병을 다 마신다고 해서 크게 문제가 될 것은 없다. 그렇지만 나는 그 다음날 술을 마실 예정이었다. 특별히 약속이 있어서는 아니고, 수요일은 트럭에서 파는 구운 닭을 파는 날이니 맥주 한 잔 마시기로 혼자 마음먹고 있었던 것이다. 어차피 다음 날 술을 마실 것이니 굳이 오늘 마셔야 하나, 나도 곧 마흔 살이 되는데 운동도 제대로 안 하면서 저녁 먹으면서 술이나 마시면 안 되지 않나, 하는 생각했다. 그런데 내일 맥주를 마실 것이라고 해서 소주 한 잔 마시는 게 그렇게 큰일날 일인가? 고민하다가 순대국밥 안에 있는 고기를 다 먹고 말았다. 고기가 다 먹었으니 안주는 없는 셈이다. 국물에 공기밥을 말아먹고 식당에서 나와서 기숙사 가는 버스에 탔다.

나는 버스 뒤쪽에 탔고 동료 대학원생은 몇 정류장 지나서 중간에 탔다. 버스에서 내릴 때쯤에야 서로 보게 되었다. 그렇게 버스에서 같이 내려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다른 대학원생이 어떤 책을 읽은 이야기를 했던 것이다.

동료 대학원생의 책 이야기를 듣다가 내 의식이 잠깐 끊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것은, 책의 내용이 전개되다가 갑자기 뜬금없는 결론이 나왔기 때문이다. 그러한 결론이 나오려면 무언가가 한참은 추가되어야 할 것 같은데 중간 단계 없이 바로 그런 결론이 나오니까 나는 의식에서 그 몇 단계가 지워진 것으로 순간 착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동료 대학원생은 그 책에 애초에 그런 단계 같은 것은 없다고 말했고, 그 지점이 원래 의도했던 개그 포인트였다.

내 정신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책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 건 내가 그 날 술을 한 잔도 마시지 않았다는 기억에 의존해서였다. 나는 동료 대학원생에게 말했다. “아니, 왜 그런 결론이 나오죠? 순간 내가 술 먹고 의식이 잠깐 끊긴 줄 알았네.” 책의 저자가 술 마시고 책을 쓴 것도 아닐 테고, 설사 술 마시고 책을 썼다고 해도 퇴고할 때는 술을 안 마셨을 텐데, 왜 그런 결론이 나왔을까?

하여간, 의식이 끊긴 듯한 느낌과 그로 인해 그 날 술을 먹은 것으로 순간 착각하고 나서, 감각이나 느낌, 단편적인 기억을 속이거나 조작하는 데는 굳이 능숙한 최면술사나 사악한 악마도 필요 없고 몇 가지 단순한 조건만 맞아떨어지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순대국밥을 먹으면서 소주를 안 마시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2021.11.03.)


2022/01/02

무운



임진왜란 때 조선사람들 사이에서는 왜적은 얼레빗 같고 명나라 군사는 참빗 같다는 말이 돌았다고 하는데, 명군의 폐해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수년 간의 전란으로 황폐해진 조선을 저주하기까지 한 것이다. 보통은, 행운을 빈다고 이야기하는데, 명군은 조선의 행운을 빌어도 모자란 상황에 무운을 비는 마음에서 관왕묘까지 조성했다. 무운이란 무엇인가? 운이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정황만 보더라도, 조선이 명을 재조지은의 나라로 떠받든 것과 별개로, 명은 조선이 전란 이후에 재기하지 않기를 바란 것임에 틀림 없다.






* 링크(1): [동아일보] 관왕묘의 財神 관우가 유커를 부른다면 / 안영배 전문기자의 풍수와 삶

( www.donga.com/news/Opinion/article/all/20171129/87495776/1 )

* 링크(2): [YTN] 안철수 대선 출마, 캐스팅보트의 위력?

( www.ytn.co.kr/_ln/0101_202111011702372382 )

(2021.11.02.)


2021/12/31

[과학철학] Feyerabend (2010), Against Method, Ch 5 요약 정리 (미완성)

      

[ Paul Feyerabend (2010), Against Method, 4th edition (Verso), pp. 33-48.
  Paul Feyerabend (1975), Against Method, 1st edition (New Left Books).
  파울 파이어아벤트, 「제5장」, 『방법에 반대한다』 (그린비, 2019), 103-125쪽. ]
  
  
[p. 33, 103쪽]
- 어떤 이론도 그 영역 내의 이미 알려진 모든 사실들과 일치하지는 않음.
- 이론과 사실 사이의 불일치
• 불일치(1): 수적인 불일치(numerical disagreement)
• 불일치(2): 질적인 실패(qualitative failures)

■ 수적인 불일치 [pp. 33-36, 103-107쪽]
- 수적인 불일치: 이론은 수치적인 예측을 하는데 실제로 얻은 값이 예측과 오차 범위를 훨씬 상회하는 경우
- 예(1): 갈릴레오 시대의 코페르니쿠스적인 견해는 매우 평범하고 명백한 여러 사실들과도 불일치했음.
• 갈릴레오: “아리스타코스와 코페르니쿠스가 이성을 가지고 감각을 정복하여 감각을 무시하고 이성을 그들 신념의 여주인으로 삼았다는 것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 예(2): 뉴턴의 중력이론은 처음부터 심각한 난점들에 시달렸음.
- 예(3): 보어의 원자모형은 정확하고 흔들릴 수 없는 반대증거가 있었지만 도입되고 유지됨.
- 예(4): 특수상대성이론은 카우프만의 명백한 실험과 밀러의 반박이 있었지만 유지됨.
- 예(5): 일반상대성이론은 수성의 근일점 이동과는 다른 천체 역학 분야에서는 험난한 시간을 보냄.
- 이러한 불일치들은 양적인 문제들이며, 우리에게 질적인 조정을 행하도록 강요하지는 않음.

■ 질적인 실패 [pp. 37-43, 108-118쪽]
- 질적인 실패: 모든 사람들이 쉽게 알 수 있고, 친숙한 환경과 불일치
- 예(1): 파르메니데스의 불변적이고 동질적인 일자에 관한 이론
• 불변하고 균질적인 일자(the One)라는 개념
• 파르메니데스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도 영감을 줌.
- 예(2): 뉴턴의 색채 이론
• 뉴튼에 따르면 빛의 내부적 구조는 결코 변화할 수 없으며, 옆/측면으로(lateral) 아주 조금만 팽창함.
• 그런데 거울의 표면은 뉴턴이 인정하는 광선의 팽창 정도보다 훨씬 거칠기 때문에, 뉴턴의 이론에 따르면 거울은 벽과 같이 빛을 반사할 수 없는 것으로 생각되어야 함.
• 뉴턴은 “광선의 반사는 반사체의 표면 전체에서 고르게 발산되는 어떤 힘에 의한 결과”라는 임시변통적인 가설을 마련하여 위기를 벗어나려 함.
- 예(3): 맥스웰과 로렌츠의 전자기학
• 고전적인 전자기학은 자유입자가 자기 가속적이라는 사실을 함축함.
• 유한한 팽창을 갖는 전하의 경우에는 자기 가속적이란 것을 설명하기 위해 시험 불가능한 응력(stress)과 압력을 부여해서 상대성 이론과 일치하도록 만듦.
• 이론이 난관에 부딪혔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새로운 원리가 발견되었음을 시사하는 방식으로 그 이론을 정식화함.
- 질적인 실패를 극복하기 위한 통상적인 절차로는 (매우 자의적인) 어느 선까지는 이전의 이론을 사용하고, 미세한 부분을 계산하는 경우에는 새로운 이론을 첨가하는 것.
- 예(4): 수성의 근일점
• 수성의 근일점은 한 세기당 약 5600초의 속도로 움직임.
• 이 값에서 5026초는 기하학적인 것이고. 575초는 태양계 내의 섭동(perturbation)에 기인한 것으로 역학적인 것.
• 섭동 가운데서 43초를 제외하고 모두 고전역학에 의해 설명됨.
• 이러한 설명은 그 43초를 이끌어내는 전제가 적당한 초기 조건을 덧붙인 일반상대성이론이 아님을 나타냄. 그 전제는 어떤 상대론적 가정을 주어지더라도 고전물리학을 포함함.
• 상대론적인 계산인 슈바르츠쉴드의 풀이는 행성계를 실재적 세계에 존재하는 것으로 다루지 않고, 우리의 우주를 대칭적 우주라는 공상적인 우주를 가정하여 문제를 해결함.
- 예(5): 갈릴레오 시대의 태양중심설
  
[pp. 44-45, 118-120쪽]
- 이론들은 어떠한 ‘양적인 결과’를 재현할 수 없으며 또한 놀랄 만큼 ‘질적으로 무능력’함.
• 과학은 지금까지의 성취를 이루기 위해서, 존재하는 모든 난점들을 이론과 사실 사이의 ‘관계’ 속에 밀어 넣어야만 했고 ‘임시변통적인’ 근사치나 다른 절차를 통해 이것을 은폐해야만 했던 것임.
- 이론은 경험에 의해 판정되어야 하며 이론이 이미 받아들여진 기본적인 진술들과 모순된다면 이를 거부해야 한다는 방법론적 요구를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 입증(confirmation)이나 증거보강(corroboration)에 관한 여러 이론들
• 이러한 것들은 이론을 알려진 사실들에 완전히 일치하도록 만들 수 있다는 가정에 의존하며 도달된 일치의 양을 평가의 원리로 삼음.
• 이러한 요구와 이론들은 모두 쓸모없음.
- 방법론자들은 반증의 중요성을 지적할지 모르지만, 이들은 상대성이론이나 양자이론과 같은 이론이 틀렸을지 모른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음.
   
[p. 45, 120-121쪽]
- 흄: 사실로부터 이론을 이끌어낼 수 없음.
• 사실에서 도출되는 이론만을 허용해야 한다면, 우리에게 어떠한 이론도 남지 않음.
- 그러므로 우리가 알고 있는 과학은, 우리의 방법론을 수정하며 반-귀납(counterinduction)을 허용할 경우에만 존재할 수 있음.
• 올바른 방법은 ‘반증에 기초하여’ 이론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반증된’ 이론들 사이에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것.
  
[pp. 45-46, 121-123쪽]
- 사실과 이론은 부조화 상태에 있을 뿐 아니라 정확하지 분리되지도 않음.
• 과학자가 실제로 취급하는 자료, 그의 법칙, 그의 실험결과, 수학적 기교, 인식론적 선입견, 그가 받아들인 이론들의 불합리한 결론에 대한 그의 태도는 여러 면에서 확정되지 않은 애매한 것이며, ‘역사적 배경에서 충분히 분리되지 않은 것’
- 관찰언어, 감각의 핵, 보조과학, 배경을 이루는 사변 등 이 모든 상황을 고찰해야 하는 이유는, 한 이론이 증거와 일치하지 않는 것은 그 이론이 부정확하기 때문이 아니라 ‘증거가 오염되어 있을 수 있기 때문’임.
•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이 어려움을 겪은 것은 이 ‘모든’ 이유들 때문이었음.
  
[pp. 46-47, 123-124쪽]
- 우리에게 방법론에 대한 새로운 조망이 필요한 것은 증거가 가지는 이러한 ‘역사적-생리학적 성격’ 때문임.
• 증거는 단순히 객관적인 사태를 기술할 뿐만 아니라, 이 사태에 관한 얼마간의 주관적, 신화적, 그리고 오래 전에 잊혀진 견해를 표현하기도 함.
• 실험결과와 관찰을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여기고 이론이 이를 증명하라고 하는 것은, 관찰상의 이데올로기를 전혀 검토하지 않고 당연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
  
[pp. 47-48, 124-125쪽]
-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우리가 계속 사용하고 모든 진술에 전제된 것을 검사할 수 있으며, 우리의 관찰을 표현하기 위해서 습관적으로 사용하는 용어들을 비판할 수 있는가?
- 비판의 첫 단계는, 이러한 ‘개념’들과 ‘비교’할 수 있는 것을 만들어내는 것임.
• 과학의 영역 밖에 나가서 기존의 이론적인 원리들을 깨뜨리는 새로운 개념체계를 발명하거나, 또는 새로운 체계를 장외의 과학이나 종교나 신화체계나 무능력자의 관념이나 미치광이의 터무니없는 생각으로부터 받아들이는 것.
• 이 첫 단계도 반-귀납적임.
- 따라서 반귀납은 ‘사실’이고 과학에 있어서 정당하고 필요함.

 
(2021.07.08.)
     

[외국 가요] 빌리 홀리데이 (Billie Holiday)

Billie Holiday - I’m a fool to want you ( www.youtube.com/watch?v=qA4BXkF8Dfo ) ​ Billie Holiday - Blue Moon ( www.youtube.com/watch?v=y4b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