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료 대학원생에게서 어떤 이야기를 들었다. 다른 대학원생이 읽은 책의 내용에 관한 이야기였는데 이야기를 듣다가, 순간 내 의식이 잠깐 끊기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느낌이 들자마자 나는 ‘이제 술을 그만 먹어야지. 얼마 먹지도 않았는데 의식이 끊기네’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나는 그 날 술을 한 잔도 마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날은 내가 몸이 조금 피곤했다. 대구에 있는 디지스트(DGIST)에 시험 감독하러 갔다 왔기 때문이다. 오전 6시 50분쯤에 광명역에서 KTX를 타고 디지스트를 가서 학부 교양시험 두 개를 감독하고 다시 서울에 오니 오후 9시쯤이었다. 가서 한 것이라고는 학부 시험 감독한 것과 남는 시간에 교수 연구실에서 개인적인 일 좀 한 것뿐인데도 오가는 데 시간을 많이 써서 그런지 몸이 피곤했다. 서울에 와서 저녁을 먹었다. 순대국밥집에 들어가서 순대국밥을 주문했다.
그냥 순대국밥을 먹을까 하다가 순대국밥을 특으로 시켰다. 그냥 순대국밥보다 고기가 더 많이 나왔다. 따뜻한 국물을 몇 숟가락 떠먹고 고기 몇 점 먹으니 몸이 약간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술 한 잔 마시면 좋겠다 싶었다. 어렸을 때 SBS <야인시대>에서 김두한이 했던 대사가 떠올랐다. “순대국이지만은 소주 안주로는 딱일 거야. 많이들 먹으라구.”(김두한이 선거운동할 때 조직원들하고 순대국집에서 점심 먹으며 한 대사) 그런데 생각해보니, 내가 순대국밥을 먹을 때 소주를 곁들여 먹은 적이 거의 없었다. 나는 순대국밥을 주로 혼자 먹는다. 소주 두세 잔만 마시면 좋을 거 같은데 소주 한 병을 시키면 남기기 아까우니 한 병을 다 마셔야 하고, 그래서 소주를 안 시킨 것이다. 물론 한 병을 다 마신다고 해서 크게 문제가 될 것은 없다. 그렇지만 나는 그 다음날 술을 마실 예정이었다. 특별히 약속이 있어서는 아니고, 수요일은 트럭에서 파는 구운 닭을 파는 날이니 맥주 한 잔 마시기로 혼자 마음먹고 있었던 것이다. 어차피 다음 날 술을 마실 것이니 굳이 오늘 마셔야 하나, 나도 곧 마흔 살이 되는데 운동도 제대로 안 하면서 저녁 먹으면서 술이나 마시면 안 되지 않나, 하는 생각했다. 그런데 내일 맥주를 마실 것이라고 해서 소주 한 잔 마시는 게 그렇게 큰일날 일인가? 고민하다가 순대국밥 안에 있는 고기를 다 먹고 말았다. 고기가 다 먹었으니 안주는 없는 셈이다. 국물에 공기밥을 말아먹고 식당에서 나와서 기숙사 가는 버스에 탔다.
나는 버스 뒤쪽에 탔고 동료 대학원생은 몇 정류장 지나서 중간에 탔다. 버스에서 내릴 때쯤에야 서로 보게 되었다. 그렇게 버스에서 같이 내려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다른 대학원생이 어떤 책을 읽은 이야기를 했던 것이다.
동료 대학원생의 책 이야기를 듣다가 내 의식이 잠깐 끊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것은, 책의 내용이 전개되다가 갑자기 뜬금없는 결론이 나왔기 때문이다. 그러한 결론이 나오려면 무언가가 한참은 추가되어야 할 것 같은데 중간 단계 없이 바로 그런 결론이 나오니까 나는 의식에서 그 몇 단계가 지워진 것으로 순간 착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동료 대학원생은 그 책에 애초에 그런 단계 같은 것은 없다고 말했고, 그 지점이 원래 의도했던 개그 포인트였다.
내 정신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책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 건 내가 그 날 술을 한 잔도 마시지 않았다는 기억에 의존해서였다. 나는 동료 대학원생에게 말했다. “아니, 왜 그런 결론이 나오죠? 순간 내가 술 먹고 의식이 잠깐 끊긴 줄 알았네.” 책의 저자가 술 마시고 책을 쓴 것도 아닐 테고, 설사 술 마시고 책을 썼다고 해도 퇴고할 때는 술을 안 마셨을 텐데, 왜 그런 결론이 나왔을까?
하여간, 의식이 끊긴 듯한 느낌과 그로 인해 그 날 술을 먹은 것으로 순간 착각하고 나서, 감각이나 느낌, 단편적인 기억을 속이거나 조작하는 데는 굳이 능숙한 최면술사나 사악한 악마도 필요 없고 몇 가지 단순한 조건만 맞아떨어지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순대국밥을 먹으면서 소주를 안 마시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2021.1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