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동과정에서는 한 달에 한 번씩 <선배와의 대화>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이번 달에는 서양과학사로 박사학위를 받은 선배님을 초청하여 <선배와의 대화>를 진행했다. 내 전공과 밀접하지는 않았으나 다른 분야의 이야기에는 나름대로 흥미로운 구석이 있기 마련이라서 발표가 끝날 때까지 잘 듣고 있었다. 발표가 끝나고 질의응답 시간이 있었다. 주로 과학사 전공자들이 질문했다. 나는 강연에서 매우 지엽적인 부분에 대해 질문할 것이어서 손들고 구두로 질문하지 않고 채팅창을 통해서 질문했다.
강연자는 초반에 이런 이야기를 했다. 한국에서 서양과학사를 전공하는 것이 왜 힘든지에 대한 것이었는데, 간단하게 줄이자면, 외국에서는 한국 사람이 왜 서양과학사 같은 것에 왜 하느냐고 하고 한국에서는 사람들이 (실제로는 잘 모르면서) 다 안다는 식으로 반응한다고 한다. 예전에 강연자는 한국 과학자들을 대상으로, 1930년대 미국 과학이 한국 과학에 시사하는 점이 있으니 미국 과학사를 참고할 필요가 있겠다는 내용의 강연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당시 강연에 왔던 과학자들의 반응이 시큰둥했다고 한다. 어차피 자기네들이 다 안다는 식의 반응이었다고 한다.
나는 그 이야기에 꽂혔다. 강연의 주된 내용은 서양과학사 사료를 어떻게 찾고 연구지원 프로그램 등에 어떻게 참여할지였는데, 내가 당장 서양과학사를 할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런 건 내가 알 바가 아니었다. 내가 궁금한 것은, 한국 과학자들이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고 할 때 그들이 그렇게 반응하게 만든 요소가 무엇이었느냐는 것이다. 그들은 한국인이어서 그랬던 것인가, 과학자여서 그랬던 것인가? 나는 채팅창을 통해 강연자에게 질문했다.
“사소한 질문이라서 채팅으로 하겠습니다. 과학사 발표에 대하여 한국 과학자들은 다 안다는 식의 반응을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혹시 과학사에 대한 외국 과학자들의 반응은 어떤지 아시는지요. 어떤 것을 물으면 한국인들은 몰라도 안다고 대답하고 일본인들은 대충 알아도 모른다고 대답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한국 과학자의 반응이 한국인이어서 그랬던 것인지 아니면 과학자여서 그랬던 것인지 궁금해서 질문합니다.”
나의 질문에 강연자는 조심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강연자는 자신이 겪은 일을 일반화하여 섣불리 결론을 내릴 수 없다고 하면서 조심스럽게 자신과 동료의 일화를 언급했다. 강연자는 두 가지 측면에서 흥미로웠다고 말했다.
우선, 강연자가 만난 해외 과학자들은 과학사에 호의적이었다고 한다. 학교에서 과학사 강연을 하면 노벨상 수상자도 와서 흥미롭게 듣고 간다고 한다. 물리학을 하다가 물리학사를 연구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하고, 통계역학 쪽 교과서를 쓰는 어떤 교수는 안식년에 진화론을 공부하다가 과학사에도 손을 대기도 했다고 한다.
또 다른 흥미로운 점은, 스스럼 없이 “I don’t know”라고 대답한다는 것이라고 한다. 강연자가 있었던 학교에서뿐만 아니라 강연자의 동료가 있던 케임브리지 같은 데서도 대가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I don’t know”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심지어, 강연자가 과학사 권위자한테 1930년대 미국 과학사에 대해 질문했더니 그 권위자는 “나는 1940년대 전공이라서 잘 모른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반대로, 한국에서는 유교의 영향인지는 모르겠으나 제너럴리스트에 대한 요구가 있는 것 같다고 강연자는 말했다. 가령, 학부생들이 과학사 전공인 자신에게 전공과 거리가 먼 역사 일반에 관하여 질문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는데, 여기에 유교 문화가 반영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고 했다.
나는 강연자의 답변을 듣고, ‘모른다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누군가 어떠한 것에 대해 모른다고 말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는 발화자가 어떠한 상태에 있음을 가리키는 것인가? 과학사에서 대가로 대접받는 사람이 자신은 1940년대 전공이라서 1930년대는 잘 모른다고 한다면, 그 때의 모른다는 것은 어떤 상태를 가리키는 것인가?
일상적인 상황에서 나에게 어떠한 것에 대해 아는지 여부를 물었을 때 고려하는 것은, 내가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고 그 대상의 속성이나 계보 등에 대해 기술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인 것 같다. 보통은, 내가 책이나 공책을 뒤지지 않고서도, 또는 인터넷에서 위키백과나 나무위키 등을 찾지 않고서도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자세한 정보를 전달할 수 있느냐를 가지고, 또는 얼마나 오랜 시간 주저리주저리 쉬지 않고 떠들 수 있느냐를 가지고 내가 어떠한 것에 대해 아는지를 판별하는 것 같다.
그런데 전문가나 전문가에 근접한 사람들을 보면 고려사항이 하나 더 있는 것 같다. 바로, 자기가 접근가능한 다른 전문가이다. 예전에 내가 석사학위 논문 때문에 고통받고 있을 때 대학원 선배가 내가 딱해 보였는지 경제학 박사인 자기 친구한테 도움을 구하겠다고 전화를 건 적이 있었다. 내가 그럴 것까지 없다고 했는데도 그 선배는 자기 친구한테 전화를 걸었고, 결국 나는 옆에서 통화 내용을 엿듣게 되었다.
“어, 아무개야. 오랜만이다. 너 중력 모형이라고 아냐?”
“중력 모형? 모르는데.”
“야, 너 박사잖아.”
“박사인데, 그거 내 전공이 아니야.”
“아니, 전공이 아니어도 그렇지, 박사인데 몰라?”
“박사여도 자기 전공이 아니면 모르지. 너도 철학 다 아는 거는 아니잖아?”
“아니, 그렇기는 한데, 그래도 너는 경제학 박사잖아?”
“그래도 전공 아니면 잘 몰라.”
그렇게 선배와 선배 친구와의 통화는, 박사인데 그걸 왜 모르냐, 박사여도 그건 모른다고 하다가 끝이 났다.
선배의 친구가 중력 모형을 아예 까맣게 몰랐을 리는 없다. 경제학 박사가 아무리 자기 전공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중력 모형을 모르겠는가? 분명히 알기는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끝까지 모른다고 한 데는 두 가지 고려가 있었을 것이다. 하나는 접근가능한 전문가의 존재였을 것이다. 아마도 선배의 친구는 국제무역론 전공자가 알 것으로 기대할 수 있는 지식에 비하면 자신의 지식은 별 게 아니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질문자의 지식이었을 것이다. 질문자가 중력 모형 어쩌고 했다면 아마 학부 수준이거나 그에 근접할 것인데, 중력 모형에 대한 자신의 지식이 그러한 학부 수준보다 월등히 낫지는 않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이 두 가지를 고려하여 나온 대답이 “나는 전공이 아니라서 잘 모른다”였을 것이다.
이를 고려한다면, 1940년대 미국 과학사의 대가가 1930년대 미국 과학사를 잘 모른다고 하는 것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건 자기가 아무리 대가라고 해도 자기가 접근가능한 또 다른 대가, 즉 1930년대 미국 과학사의 대가만큼 1930년대 미국 과학에 대해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어떤 사람이 어떤 것에 대해 안다고 할 수 있는지 여부는 그 사람이 고립된 상태에서 어떤 대상에 대해 어느 정도 수준에서 얼마나 많이 오랫동안 떠들 수 있는가가 아니라, 접근가능한 네트워크에서 자신의 지식 수준을 고려했을 때 나올 수 있는 결론일 것이다. 이를 응용한다면, 학부생들이 과학사 전공자에게 역사 일반에 관한 아무 질문이나 하는 것도, 또 그들이 그렇게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도 설명할 수 있다. 학부생들에게는 접근가능한 전문가가 있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을 것이다. 또한, 자기가 어떤 것에 대하여 아는지 모르는지 여부가 접근가능한 네트워크에서 결정된다고 생각할 기회도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믿을 수 있는 교수나 강사를 보면 평소에 묻고 싶었던 것을 아무거나 물어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접근가능한 전문가에 의존하여 자기가 그 분야에 대해 모른다고 판단하려면, 전제해야 하는 것이 또 하나 있다. 바로, 해당 전문가에 대한 신뢰이다. 내가 모르는 부분을 다른 전문가가 비교적 정확히 알 것이라고 믿을 때만, 나는 그것에 대해 모른다고 아무렇지 않게 말할 수 있다. 내가 모르듯이 전문가도 모를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래서 내가 아는 만큼 전문가도 비슷하게 알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나는 그것을 모른다고 순순히 말하지 않을 것이다. 관습에 따라 “잘 모르지만...”이라고 하더라도 주저리주저리 말할 것이다. 단호하게,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I don’t know”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단순히 미덕이나 덕목의 문제라기보다는 다른 사람에 대한 신뢰의 문제와 관련될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한국 사람들은 왜 모르면서도 안다고 하는지, 왜 의사가 처방한 대로 따르지 않는지도 짐작할 수도 있겠다. 바로, 남을 못 믿기 때문이다. 내가 다른 전문가의 전문성을 판단할 수 없을 때, 어차피 내가 모르니까 전문가를 믿자는 쪽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어차피 모르는데 전문가가 정말로 그걸 아는지 어떻게 알 수 있겠냐는 식으로 가는 것이다. 과학사 강연에 대한 일부 과학자들의 반응도 비슷한 맥락에서 볼 수도 있다. 과학사 강연에 나오는 과학 이야기는 과학자인 자기도 안다 이거다. 그런데 아무리 과학자라고 해도 과학사까지 다 알지는 않을 것 아닌가? 그 때 과학자들의 반응을 좌우하는 것은 과학사 전문가에 대한 신뢰일 것이다. 과학사 전문가를 신뢰한다면 과학 내용까지는 알지만 과학사 내용은 모른다고 말할 텐데, 과학사 전문가를 신뢰하지 않으니까 어차피 내가 과학사 모르는 거 과학사 전문가도 과학사를 제대로 아는지 알 수 없으니까 과학을 더 많이 아는 내가 과학사 전문가보다 더 많이 안다는 쪽으로 기울어진 것은 아닐까?
한때 유행했던 통섭이니 융합이니 하는 것들도 되돌아볼 필요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통섭이 무엇이든, 용어의 유래가 어찌 되든, 하여간 자기 분야에만 함몰되지 않고 다른 분야도 살펴보고 다른 업계 사람들도 만나고 다른 분야의 사람들끼리 공동 작업을 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렇게 했을 때 얻을 수 있는 순기능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내가 잘 몰랐음을 알게 되는 것이겠다. 그런데 한국에서 그러한 유행에 동조했던 사람들을 보면 꼭 그렇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이것 저것 수박 겉핥기나 해서 사실은 지식이 유의미하게 늘어나지도 않았는데도, 이것도 알고 저것도 안다면서 스티브 잡스 같은 소리나 하며 주접이나 떨고 다니던 사람들이 종종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는 그러한 수박 겉핥기가 다른 분야 전문가에 대한 신뢰를 높이는 데는 전혀 도움이 안 되었음을 보여주는 사례일 것이다.
(2021.10.20.)